[김호영의 네오 클래식]
[김호영의 네오 클래식]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2020-07-06
글 : 김호영 (한양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삶도, 영화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Zendegi Edame Darad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상영시간 95분 / 제작연도 1991년

895년 12월 뤼미에르 형제의 최초의 영화 상영은 커다란 스캔들과 함께 격렬한 논쟁을 낳는다. 그들의 발명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계 인사들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의 움직임은 모두 가짜이자 조잡한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비난은 주목받지 않았던 의외의 영화 한편으로 빠르게 종식된다. <아기의 식사>라는 짧은 영화에서, 아기의 식사 모습이 아니라 마당 한구석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뭇잎의 움직임이 뒤늦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영화 속의 모든 움직임을 가짜로 만들어낼 수 있어도 나뭇잎의 미세한 흔들림만큼은 실제 움직임의 재생이라는 사실을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간혹, 최초의 영화에서 보았던 나뭇잎의 흔들림을 그 느낌 그대로 되살려내는 영화들이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도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코케 삼부작’ 혹은 ‘지그재그 삼부작’으로 불리는 세편의 영화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한편으로 대재난 이후의 삶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기원을 찾아간다.

삶을 이어주는 길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오가는 교묘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0년 이란 북부에 대지진이 일어나자, 감독은 아들과 함께 차를 몰고 자신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에 출연했던 두 소년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영화의 배경이기도 했던 소년들의 동네 ‘코케’가 지진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케로 가는 길들은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그나마 접근 가능한 고속도로도 차들로 꽉 막혀 있다. 감독은 길을 찾아 인근 마을을 헤매면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또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던 노인과 아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코케로 가는 길을 찾게 된 감독은 난민촌에 아들을 맡기고 홀로 차를 몰고 떠난다. 낡은 차가 가파른 경사를 넘지 못하고 여러 번 미끄러져 내리지만, 지나가는 이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험한 고갯길을 넘어간다.

실재와 허구가 뒤섞인 이 줄거리를 바탕으로 영화는 참담한 재해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등장했던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 마을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미로처럼 얽혀 있던 좁은 골목, 노새와 염소가 오르내리던 돌계단, 진흙과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집들도 모두 무너지거나 땅밑에 묻혀버렸다. 먼지 가득한 잔해들과 흙더미 속에서 무엇이라도 찾아내려 애쓰는 무표정한 사람들의 모습은 영화 내내 마음을 착잡하게 만든다. 그러나 막상 감독과 만나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태도는 담담하다. 집과 가족 등 거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생을 전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려 한다. 누구는 65명의 친척이 죽었어도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신혼살림을 꾸리고, 누구는 여동생과 조카 셋을 잃고도 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난민촌에 TV 안테나를 설치한다. 또 누구는 무너진 집의 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며 중단되었던 일상을 다시 이어간다.

그리고 길 위에는 끊임없이 오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가스통이나 탁자, 석유난로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몇 시간씩 걸어서 이동한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지만, 길을 통해 삶을 다시 꾸리고 새로 시작하려 하는 것이다. 키아로스타미의 다른 영화들에서처럼 여기서도 길의 의미는 절대적이다. 길이 있어야 삶이 가능하고, 길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길이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이고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에서 길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이라면, 이 영화에서 길은 지진으로 끊어진 삶을 다시 이어주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에는 허구와 실재, 영화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교묘히 무너뜨리는 다양한 장치들이 삽입되어 있다. 감독은 우선 전작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던 소년들의 실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그들의 마을로 직접 찾아간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감독은 실제 감독이 아니라 대역배우다. 그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찾다가 전작에서 조연으로 등장했던 이웃 마을의 소년들을 만난다. 마찬가지로 전작에 등장했던 한 노인을 만나는데, 노인은 영화 속 감독에게 자신이 영화에서 실제보다 더 늙게 나왔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바라보며 영화를 찍고 있는 진짜 감독(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 물그릇이 어디 있냐고 물어본다. 즉 영화는 이전 영화에서 ‘허구’의 등장인물로 나왔던 ‘실제’ 사람들과의 만남을 보여주지만, 이 만남은 다큐멘터리 형식이 아니라 ‘허구’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진행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어디까지가 영화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의 영역인가?

허구와 실재 사이의 이같은 경계 허물기는 사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실제 재판 과정을 촬영하면서 사기 피해를 입은 가족과 피고인에게 사기의 과정을 재연하게 하는 <클로즈업>(1990)에서부터 처음 만난 남녀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을 돌아다니며 부부 역할놀이를 하는 이야기를 담은 <사랑을 카피하다>(2010)에 이르기까지, 그의 많은 영화들은 허구와 실재 사이에서 매우 유려한 월경의 유희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월경의 시도들은 단순히 형식적 실험이나 지적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부단한 질문과 사유를 향한다. 키아로스타미에게 영화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동시에 현실의 일부이며, 따라서 픽션과 다큐, 허구와 실재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시간이 흐르고 있고 생이 진행 중인 현실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 어떤 형식이든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한 장면은 영화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키아로스타미의 깊은 사유를 잘 드러내준다. 영화 중반, 주인공-감독은 어느 집 입구에 앉아 있다가 허물어진 벽의 창문 너머로 바람에 흔들리는 올리브나무를 발견한다. 그리고 무엇엔가 홀린 듯 다가가 한참을 바라본다. 마치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에서처럼, 올리브나무의 나뭇잎들이 무너진 마을 구석 어딘가에서 바람에 흔들리며 고요히 시간 속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처음으로 현실의 움직임과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을 재생해 보여준 매체였다. 그로 인해 다른 어느 매체와도 변별되는 독자성과 고유한 매력을 얻었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은 그 최초의 영화적 매혹이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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