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프랑스 영화학자 자크 오몽이 바라본 코로나19 시대 영화의 존재론
2020-07-15
글 : 자크 오몽 (영화학자)
번역 : 이정하 (단국대학교 공연영화학부 교수)

우리 모두는 현재 이 행성에서 우리의 존재란 과연 무엇일까를 다시 한번 질문하게끔 하는 전세계적 사건의 충격 속에 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이로 인해 어떻게 변화할지 가늠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하지만 영화는 곧바로 그 영향권 아래 들어갔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사회적, 심리적 삶에서 영화가 어떤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산업적, 상업적 측면에서 바라본 사태는 간명하다. 수개월 이어진 제작과 유통의 정지. 이는 실로 재난에 가깝다. 영화 산업기계, 게다가 글로벌화된 영화 산업기계는 자본주의 체제하에 있는 이런 유형의 모든 산업과 똑같이 기능한다. 즉 자본과 시장이 순환되어야 한다. 상황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영화관의 배급 체계는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다. 반대로, 상황이 초래한 위기 그리고 칩거는 TV, 특히 인터넷을 통한 영화의 네트워크 유통에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이다. 짐작건대 넷플릭스 같은 유통 및 생산망은 보다 강건해져서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것이다. 이에 대해 더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관점은 경제학자나 사회학자 혹은 미디어 전문가의 관점이 아니라, 무엇보다 영화 형식들, 영화 형식의 유효성 및 특성 등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대학 연구자이자 에세이스트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마틴 스코시즈 <아이리시맨>(2019).

10년 전쯤 나는 한 작은 책 <영화에서 남아 있는 것>에서 영화가 어떤 채널을 통해 우리에게 도래하건 영화는 무엇보다 미학적, 정신적, 그리고 철학적 현상으로서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 앞에서,모든 것은 감각과 더불어 시작한다. 영화와 함께 시작한 감각은 우리 자신의 경험을 강화하고 우리 안에서 사유가 태어나도록 한다. 정신에 가해지는 영화의 작용에서 감각은 본질적 역할을 한다. 위 책에서 나는 영화를 세 주제를 통해 정의했다. 먼저, 시간의 형태화. 둘째, 영화에 각종 위치를 부여하는 장치를 통한 시선의 고양.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재와의 조우 가능성. 여기에는 상업과 유통에 대한 고려가 완전히 빠져 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세 관점에 동의한다. 물론 이런 종류의 영화에 대한 정의는, 예를 들어 가장 최근의 마틴 스코시즈와 라브 디아즈의 영화에 매우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문제의 미국 감독은 스크린의 나이 든 배우들을 회춘시키는 데 수백만달러를 쓴 반면(<아이리시맨>), 필리핀 감독인 라브 디아즈는 영화 한편을 완성하는 데 10만달러도 쓰지 않았다(<중지>). 넷플릭스가 제작한 영화에서 오랫동안 이미 본 듯한 효과들을 재반복하며 진부한 시나리오를 다룬 스코시즈의 영화보다 라브 디아즈의 영화가 내게는 더 창의적이고 생기넘치는 작품으로 보인다는 점을 강조할 생각은 없다. 영화는 살아남기 위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적응하는 방법들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존재 그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단지 소비 방식(주류영화냐 독립적인 작가영화냐, 장르영화냐 예술영화냐 하는)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브 디아즈 <중지>(2019).

영화는 또한 영화의 고유한 역량, 곧 이미지를 창조하기, 허구를 발명하기, 세계, 사회, 인간으로 시선을 움직여가기 등과 같은 것에 의해 정의된다. 나는 현재 발잔 재단이 후원하고 내가 제안한 연구장학금프로젝트에 부응해 한국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의 젊은 연구자 수십명이 보내온 연구 계획서를 읽고 있는 중이다. 이는 영화미학과 관련된 기획으로서, 우리는 영화의 물질성, 디테일, 그리고 현재라는 세 가지 가능한 방향을 제시했다. 주제의 제목으로는 조금 추상적으로 보일수 있는 방향이지만, 이는 현재의 혁신적인 영화(단지 비평이나 영화제 등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만이 아닌 새로운 사고, 생산적인 사고의 진작을 고민하는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주제들이다. 영화 이미지의 물질성이란 무엇보다 시간, 그리고 빛(그러므로 색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픽셀 영화는 필름 영화와 동일한 외관처럼 보이지만, 내밀한 구조에서 완전히 다르다. ‘디테일’ 개념(부분적으로 미술사에서 기인한)은 이 첫 번째 질문의 연장선에 있다. 이미지가 단지 서사의 유희 속 장기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한, 이미지란 그 자체로도 존재한다. 즉 이미지는 자신을 구성하는 디테일들에 의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현재라는 시간은 오랫동안 영화예술에 가장 어려운 철학적 질문을 제기해온 문제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영화란 영원한 현재의 예술(우리의 체험과 다른 형태화된 현재)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체험과 마찬가지로 영화적 시간은 지나가기 위해, 그리고 지나간 것이 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바로 이 때문에 질 들뢰즈는 영화에서 “현재란 존재하지 않”고, 다소 복잡한 과거의 지층들만이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문제들은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종류의 문제라기보다, 단지 부분적인 측면들에 관한 연구들을 통해 다뤄질 수 있는 다소 복잡한 문제들이다.

한국에 번역된 자크 오몽의 저서들.

나는 우리에게 보내온 여러 연구 제안서들을 검토하면서,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한 젊은 연구자들의 문화, 상상력, 지성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무엇보다 이에 흔적을 남긴 영화 자체의 중대한 변화에 충격을 받았다. 선진국이건 그렇지 않은 나라건 현재 거의 모든 국가의 연구자들이 보내온 대학 교육 경력들에서 우리는 현재 움직이는 이미지 예술의 주요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잘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또한 이들의 독창적인 생각들에 매우 기분 좋은 놀람을 금치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생체매개발광發光’(만든 말이지만 표현적으로 뛰어난 말인)에 관한 연구나, 영화에서 적외선과 자외선에 관한 연구, 극단적으로 긴 영화 등에 관한 연구 제안들은 진정으로 영화미학에 관련된 연구이자, 감각, 이미지, 시간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고자 한 제안들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많은 제안서를 관통하는 현재의 세계적 상황이 감지됐다. 오늘날 영화미학을 말하는 것은 또한 세계화, 이주, 노동(그리고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의 문제적 상태)과 같은 강력하게 편재한 현상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또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문제를 바라보는 것 역시 불가피하며, 때로 이미지에 거의 고유한 삶을 부여하는 입장도 가능하다. 나처럼 50여년 전 심각하게 영화 연구를 시작한 사람에게 작금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나의 전망은 전혀 부정적이지 않다. 모든 국가의 젊은 영화연구자들이 향유하는 문화 자체에 거대한 진보가 이뤄졌다. 이들 연구자들이 바라보는 연구의 사명은 반세기 전 우리와 같지 않다. 내가 이른바 ‘연구’(비평가의 리듬으로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취해 글을 쓰는)를 시작했을 때, 상황은 단순했다. 즉 기호학 같은 거대 담론 형식의 학제적 접근이 있었고, 새로운 영화들은 때로 놀라움을 주기도 했지만 거의 유사한 서사적, 시각적 도식들을 반복 생산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심각하게, 그리고 다양한 측면에서 변화했다. 먼저, 기존 시네마의 영화와 조형 예술가들의 영화 사이의 구분이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중요 시네아스트들에 헌정된 전시회나, 미술관 설치작품들에 점점 더 빈번히 영화가 개입하는 현상은 영화를 보러 가는 이들의 기대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다(일반적인 영화관으로 기존 서사 영화를 보러 가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디지털(진부하지만 여전히 말할 가치가 있는) 또한 몇몇 중요한 형식적 혁신들을 가져왔다. 이중 가장 괄목할 만한 새로운 형식이라 할 매우 긴 숏(그리고 슬로 무비와 원테이크 무비)은 시간의 문제와 관련된다.

한국에 번역된 자크 오몽의 저서들.

마지막으로, 다큐멘터리가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작가영화 사이에서 일종의 선택지로 자리 잡은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영화 연구는 매우 가까이서 이 중요한 변화들을 따라왔고, 여전히 그 과정은 진행 중이다. 영화 연구는 항상 전환기에 놓여 있다(최근의 위기는 이를 더욱 강력하게, 그리고 상이한 흐름들 속에서 상기시키고 있다). 하지만 영화 연구자들(비평가나 감독들 또한 마찬가지로)은 이러한 상황에 전혀 낙담할 필요가 없다. 비평가는 지성, 섬세함, 그리고 의식을 요구하는 매우 까다로운 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다. 비평가는 새로운 영화의 역량과 가치를 결정한다. 반면 대학의 담론들은 가치판단을 조심스레 유보하면서 규칙성과 현상들의 정확한 위치를 탐지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반세기 동안 대학에서 담론이 진화하는 과정을 함께해온 나로서는 이론적 반성이 여전히 끊이지 않으며, 또 계속해서 새로운 놀라움을 주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대학에서의 영화 연구는 거의 반세기 전 첫 번째 모던영화와 작가영화의 움직임 이후 시작됐다. 대학은 논리적으로 곧 영화분석(때로 역사적 고찰에 도움을 받은, 대체적으로 구조적 유형의 분석)의 필요성에 역점을 뒀다. 차츰 다양한 학제, 그리고 이전부터 존재하던 학파들이 영화라는 동시대적 대상에 흥미를 갖게 됐다. 조금 단순화해 얘기하자면, 사회학과 미학이 재빨리 영역을 분할했다. 이후 대부분 국가의 대학에서 영화과는 실험영화 제작이나 영화 기술교육부터 추상적인 이론적 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위를 아우르는 매우 다양한 시도들을 담당한다. 오늘날 대학에서의 영화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유의 운동과, 사회 내에서 영화에 대한 사고의 변화가 거의 동시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현상이다. 일상적 대상과 사적인 작품들(상업과 예술) 사이의 거대한 분할과 공유가 있다. 그리고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가치와, 미학적, 형식적 효과 사이(원한다면, 내용과 형식 사이)에 또 다른 분할과 공유가 있다.

한국에 번역된 자크 오몽의 저서들.

아마도 바로 내일 우리는 어쩌면 지금과는 조금 다른 채널을 통해 움직이는 이미지 형태의 작품들을 수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대한 영화건 형편없는 영화건, 익명의 영화건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진 영화건, 영화는 한편에 의미와 이데올로기적 가치, 그리고 다른 한편에 형식의 고유성과 창의성이라는 이중의 분석 작업을 위한 대상으로 여전히 남을 것이다. 내가 읽은 젊은 연구자들(내일의 교육자들일)의 계획서들은 바로 영화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에 빠질 수 없는 분리불가능한 이중의 특성을 증언해주고 있다. 그것은 곧 영화란 감정이자 감각이라는 점, 그리고 영화란 의미작용이자 반응을 요구하는 자극이라는 점이다. 이 둘 모두 연구돼야 하지만, 나는 후자는 전자 없이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즉 먼저 영화의 형식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하나의 담론이기 전에, 무엇보다 하나의 감각적 경험이다. 디지털 시대라 할지라도 그러하며, 무엇보다 디지털 시대이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바로 내일 영화가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유통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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