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적이었다. ‘타이베이 3부작’ 중에서 <타이페이 스토리>(1985)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의 중간에 위치하는 <공포분자>(1986)는 에드워드 양 감독이 산업적으로 코너에 몰렸을 때 꽃피운 걸작이다. 전작인 <타이페이 스토리>는 주인공 아룽을 연기한 동료 허우샤오시엔 감독과의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해준 작업이었지만, 개봉 나흘 만에 극장에서 내렸고 평단으로부터 싸늘한 반응을 얻었다. 당시 에드워드 양을 포함한 대만 뉴웨이브 영화인 50명은 정부와 배급사를 상대로 “대만 영화산업에 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가, 그들을 반대하는 기득권 영화인들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던 차였다.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하고, 타이베이는 덩달아 커지며, 38년 동안 이어진 계엄령은 해제(1948년 선포된 대만 계엄령은 1980년대에 이르러 계엄령 해제 요구가 빗발치자 1987년에 해제됐다.-편집자)를 앞둔 가운데,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샌드위치 맨>(1983)과 에드워드 양, 가일정, 도덕신, 정의 감독이 함께 만든 옴니버스영화 <광음적고사>(1982)를 시작으로 전세계 영화계에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신랑차오’(新浪潮, 대만 뉴웨이브)는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급변하는 성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에드워드 양이 내놓은 세 번째 장편영화 <공포분자>는 대만 사회에 메스를 들이댄 차갑고 냉철한 사회 풍자극이자 스릴러물이다. 전작과 달리 개봉 당시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대만금마장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사건과 우연의 연속적인 충돌에 따라 전개된다. 이립중(이립군)과 주울분(무건인) 부부를 제외하면 아무런 관련이 없는 네명의 등장인물들이 얽히면서 서사를 교차로 이끌어간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소년은 경찰 수사를 피해 도망가다가 다리를 다친 소녀를 우연히 보고 카메라에 담는다.소년은 그녀를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녀에게 점점 매료된다. 이립중과 주울분은 부부 생활에 지쳐 권태기에 빠진 부부다. 이립중은 동료 의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과장 승진의 기회를 얻는다.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던 소설가 주울분은 글이 마음처럼 써지지 않아 괴로워한다. 불량 학생들과 어울리는 딸이 못마땅한 소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집에 가두고, 소녀는 무료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전화번호부를 뒤져 무작위로 장난전화를 건다. 그때 소설을 쓰던 주울분은 소녀의 전화를 받는다. 줄거리만 보면 연관성이 없는 인물들의 사연을 나열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공포분자>는 인물 관계의 변화에 따라 영화의 방향이 정교하게 바뀌는 이야기다. 인물들이 겪는 우연한 일들은 불행을 만들어내고, 그 불행은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일로 발전한다.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말이다.
생전의 에드워드 양 감독은 결코 동의하지 않았지만(심지어 서구 평론가들을 두고 ‘게으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지만), <공포분자>를 보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욕망>(1966)이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사진작가가 공원에서 한 커플의 다정한 모습을 몰래 찍는 <욕망>의 초반부 시퀀스가 소년이 소녀를 몰래 찍고 그녀에게 빠져드는 <공포분자>의 초반부와 비슷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다르지만, 범죄 현장을 데이트로 오인한 뒤 내면의 공허함을 겪는 <욕망> 속 인물의 심리 변화가 <공포분자>의 인물들에게도 비슷하게 드러난다(그럼에도 <공포분자>를 <욕망>에 비유하기엔 두 영화가 너무나 다르다).
경제가 성장하고 그로 인한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은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사진 속 소녀에 빠져든 소년, 할 일이 없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장난전화를 거는 소녀, 부부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채 소설 쓰기에 몰두하는 주울분,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채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의사 이립중 등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데다가 인간관계에서 쉽게 균열을 드러낸다. 특히, 주울분이 과거 연인 관계였던 출판사 편집장 심씨에게 “난 부부 얘기 말고는 쓸 게 없어. 내 세계관은 점점 작아지고 있어. (중략) 환경의 변화가 필요해”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이립중이 아내인 주울분에게 “말을 해, 말을 해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결혼하면 소설을 접기로 했잖아”라는 장면을 보면 주울분과 이립중 부부는 서로에게 거는 기대가 다른 만큼 상대방에 대한 실망감도 크게느낀다.
“시대가 달라지면 사람과 공간도 달라지니 이야기와 영화적 형식도 달라져야 하는 건 당연하다.” 생전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에드워드 양 감독이 한 말대로 <공포분자>는 한 사람이 작업한 게 맞나 싶을 만큼 전작인 <타이페이 스토리>와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나 <독립시대>(1994), <마작>(1996) 등 이후 만든 영화들과도 다른 형식을 선보인다. 이 영화는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구조를 따른다. “그날은 봄의 첫날이었다. 계절을 이해한다면 변화는 윤회의 반복일 뿐. 올봄은 여느 해와 다르지 않다. 그들 같은 부부에게 가장 큰 문제는….”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주울분의 내레이션은 이 영화에서 유일한 내레이션으로, 이 영화가 그가 쓴 소설임을 짐작하게 한다(영화의 중반부 사진 찍는 소년과 그의 여자 친구가 주울분이 등단한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그가 쓴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영화의 줄거리와 흡사하다). 이처럼 <공포분자>는 영화 속 인물인 주울분이 쓴 소설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졌다가, 서사가 전개되면서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점점 흐릿하게 한다. 형식에 대한 새로운 시도는 형식주의자로서 에드워드 양 감독의 지독하리만치 완벽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에드워드 양의 작품 수가 같은 시기에 활동한 허우샤오시엔 감독에 비해 많지 않은 건 사전에 완벽하게 계산되어야 제작에 들어가는 그의 성격과 관련 있다).
에드워드 양은 이립중에게 두 가지 버전의 결론을 내놓는데 어느 쪽이 현실인지 알 수 없다. 그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분명한 건 어느 쪽 결말이든 그에게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라는 거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조금만 관심을 보이면 극단적 선택까지 가는 일이 없을 텐데 우리의 무관심 때문에 그 사람이 불행을 맞는다는 건 안타깝다. 그 점에서 <공포분자>는 에드워드 양이 그려내는 자본주의의 씁쓸하면서도 냉정한 풍경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