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공포분자'의 공포분자들과 종결될 수 없는 해석에 대하여
2020-09-29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관객을 위한 안전지대는 없다

무절제한 비행(卑行)으로 발목이 부러진 혼혈소녀 슈안은 어머니의 아파트에 감금된다. 속절없는 억류에 따분해진 그는 무작위로 번호를 골라 장난 전화를 건다. “당신의 남편에게 문제가 있어요.” 슈안이 꾸민 스토리는 소설가 주울분에게 도달한다. 그러나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슈안이 알려준 주소지에서 울분을 맞이하는 사람은 낯선 청년이다. 이 청년은 울분을 자극하여 식어버린 창작의 열정을 부활시킨다.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전화, 성명불상의 청년은 영화의 초입에 등장했다가 울분의 백일몽으로 처리되었던 상황과 기이하게 연결된다. 그 꿈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경찰차, 도박장에서의 총격전, 사이렌 소리에 이끌린 사진가에 관한 이미지로 구성 되었다. 울분은 매너리즘에 빠진 결혼 생활과 일상에 침투한 파편적인 사건을 조합하여 소설의 스토리를 만든다. 소설의 제목은 ‘결혼실록’. 나른해진 부부 관계를 자극하는 한통의 장난 전화가 파문을 일으켜 비극적 결말로 치달아가는, 일본 추리소설풍의 이야기다. 인과관계의 사슬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흩어지는 네트워크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공포분자>의 스토리는 이 소설에 의존한다. 몇몇 단서들이 소설의 입구와 출구를 신호하고 있지만 모든 게 명백하지는 않다. 예술적 충동을 통해 울분의 상상 안에서 재조합된 이 스토리 중 어디까지가 실재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공포분자들

제목에 대해서는 숙고가 필요하다. 액면 그대로 공포를 유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위협하는, 강요하는 또는 혼란을 야기하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공포를 조장하는 자는 누구인가? 액자구조의 스토리 안팎을 돌아다니는 공포분자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공포분자>의 서사에는 다층적인 차원과 그것을 이끄는 캐릭터가 존재한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기만적인 내러티브 디자인은 스토리텔링 장치에 대한 관습적인 이해를 시험하고 실재와 그것의 가공 사이에서 발생하는 왜곡을 형상화한다. 서로에게 낯선 인물들의 삶이 교차하는 복합 서사 구조에도 불구하고 플롯은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관객이 우연 또는 필연으로 해석할 수 있는 희미한 실마리들을 제공한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인물은 사진가와 소설가이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허구를 창작하는 예술가라는 것이다. 사진가의 사진과 작가의 소설을 중심으로 또는 대비로 <공포분자>의 스토리는 짜인다. 사진가 창은 이미지를 숭배하여 에로틱한 환상에 빠지는 첫 번째 공포분자이다. 부자 아버지를 두었고, 입대를 앞둔 그는 울분의 꿈 전과 후로 구성된 긴 오프닝 시퀀스의 주인공이다. 카메라는 거리에 버려진 시체를 비추고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이 도착한 뒤 총격전이 벌어진다. 외견상 이 시퀀스는 범죄 누아르 또는 울분의 참조목록에 있는 일본 추리소설의 클리셰와 겹친다. 같은 시간 창은 슈안을 정탐한다. 슈안은 남자친구이자 잡범인 대순이 불법 도박장으로 사용한 아파트 2층에서 뛰어내려 다리를 절룩거린다. 창은 멀리서 슈안을 관찰하여 사진을 찍은 뒤 작업실에서 인화 한다. 그는 일상에서 수집한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전체를 완성하는 콜라주 또는 자신의 방에 걸린 뭉개진 화소의 포스터 사진처럼 슈안의 사진을 확대한다.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그는 동거 중인 연인이 좌절감을 느낄 만큼 슈안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연인의 질투에 염증을 느낀 창은 그녀를 떠나 총격전이 벌어졌던 고립된 아파트로 이사한다. 창의 아파트는 이미지를 조형하는 암실로 변형된다. 슈안이 암실로 개조한 도박장을 재방문했을 때 그녀의 장난 전화를 비난하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창은 슈안의 실체를 인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환상을 위해 진실을 무시한다. 창의 환상은 슈안이 훔친 카메라를 문 앞에 두고 대순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깨어진다. 그는 냉담하게 떠났던 옛 연인에게 돌아가고, 울분의 소설이 화제의 중심에 오르자 진실의 증언자가 되기로 한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도외시하는 사진가 창의 상황을 이어받는 인물은 소설가 주울분이다. 영감이 부족한 작가인 울분은 창작을 위해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않는’ 공포분자이다. 울분은 현실을 착취한다. 그녀는 미뤄둔 소설의 아이디어를 주변에서 발생한 사건으로부터 착취하여 현실을 발명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울분은 집필을 재개하여 올해의 소설 공모에 도전하려 한다. 슈안의 장난 전화는 성공한 기업의 오너인 전 애인 심씨와 재회하기로 한 울분의 결정을 합리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사건은 또한 작가로서 슬럼프에 빠진 울분의 공적인 삶을 재건하는 데 공헌한다. 따라서 남편의 행실에 의혹을 일으키는 이 전화는 울분이 남편을 떠나기로 한 직접적인 이유가 아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가 창작하는 스토리는 현실과 혼란스럽게 섞이고, 현실을 위태롭게 한다. 울분이 현실과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 꿈을 꾸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관객은 이 영화 안에 현실과 허구로 분리된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슈안은 지루한 현실에서 이탈하기 위해 허구를 지어내는 세번째 공포분자이다. 창의 카메라와 울분의 소설을 위한 모티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녀야말로 현실과 허구의 무분별한 혼융을 조장하는 공포분자이다. 슈안은 자신의 행위가 야기할 파장을 의식하지 못하는 위험한 창작자이다. 그녀는 울분에게 남편의 부정을 고지하고, 실연당한 여인을 가장(假裝)하여 수면제 한병을 집어삼키고 자살하려 했다고 장난 전화를 걸기도 한다. 부러진 발목이 낫자 그녀는 해방되는데,미국 군인과 사랑에 빠진 어머니와 달리 슈안은 대순을 선택하여 함께 범죄를 모의한다. 호텔방으로 유인한 중년 남자의 지갑을 훔치려다 실랑이가 벌어지자 슈안은 남자를 칼로 찌른다. 살인 후 도시를 방랑하던 그녀는 피를 흘리며 사진가 창의 암실로 변한 도박장으로 회귀한다. 자신의 사진을 확대한 이미지의 콜라주 앞에서 슈안은 정신을 잃는다. 어두운 방에서 깨어난 그녀는 사랑을 맹세하는 창과 동침하지만 대순이 출소하자 옛 연인에게 돌아간다.

마지막 공포분자는 울분의 남편 이립중이다. 그는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하는’ 공포분자이다. 아내가 떠난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립중은 울분이 쓴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은 뒤 모든 상황을 간단히 요약해버린 그는 교착상태에 놓인 결혼 생활과 아내가 쓴 소설을 혼동한다. 아내가 떠난 이유를 수년간의 생기 없는 부부 관계 때문이 아닌 한통의 장난 전화 때문이라고 확신한 립중은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그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떠나기 전 자신의 앞에서 흐느끼는 아내를 보고 그는 예술적 영감을 잃은 울분이 절망하여 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내는 실종된 것이 아니라 그를 떠난 것이다. 소설이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정확한 초상화가 아니라는 것을 립중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직장에서도 그는 허구와 현실을 혼동한다. 고대했던 승진을 이루기 위해 그는 동료를 모함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아내가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상사인 주임에게 거짓말을 한다. 현실을 왜곡하고 허구를 창조함으로써 그릇된 인상을 창조하려는 립중의 불안한 내면은 테러로 귀결된다.

연기가 당신의 눈을 가리고

공포분자들의 행태와 관련하여 심오한 메타포가 등장하는 한 시퀀스가 있다. 슈안의 어머니는 슈안의 친부로 짐작되는, 오래전 타이베이를 떠난 미군에 대한 상념에 젖어 <Smoke Gets In Your Eyes>를 듣는다. 멜랑콜리를 과장하는 사운드트랙이 배경음으로 깔리면서 어머니가 슈안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 화면은 슈안을 찍은 창의 흑백사진들로 커팅된다. 흑백사진 속 슈안, 빨래처럼 줄에 널린 필름, 내동댕이쳐지는 카메라, 쏟아지는 필름통의 몽타주는 창의 연인을 덮친 절망을 표현한다. 어머니의 방에서 시작된 노래는 창의 방으로 이동하면서 비(非)동기화 음악으로 전환된다. 실연의 노래는 두신의 무드를 반영하지만 슈안의 어머니와 창의 연인 위로 노래가 흐를 때 두 인물을 연결하는 것은 오직 사운드트랙뿐이다. 연인을 상실했다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은 영화 안에서 결코 만나지 않는다. 사랑과 욕망이 냉철함을 가린다는 노래 가사는 진실에 눈멀게 하는 자극들을 주의깊게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보는 것과 그 이유에 대해 질문할 것을 요청하는 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사운드와 이미지의 분리는 <공포분자>의 복잡한 플롯을 견인하는 형식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웃하여 연결되었으나 둘 사이의 어떤 연결의 동기도 찾을 수 없는 현상들 내지는 세계에 공포를 야기하는 조각난 현실에 대한 은유를 보게 된다. 차라리 여기서 대비되는 것은 감금된 슈안(현실)과 슈안을 재현한 이미지(허구) 사이의 간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슈안이 대순의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진 뒤 덩그러니 남은 그녀의 콜라주는 인간을 병들게 하는 거짓 이미지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바람에 펄럭이는 조각 사진들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1966)에서 살인현장 사진의 형상이 점점 더 모호해지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창의 환상 속 슈안과 실제 슈안의 차이는 자명한데, 빈틈이 많은 모자이크는 현상의 총체를 재현하지 못한다. 슈안의 이미지는 영감을 주지만 조각난 사진을 조합한 콜라주는 범죄 세계에 은거하는 그녀의 비열함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

<공포분자>는 관객이 몽타주에 대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배신하여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해 질문한다. 에드워드 양은 현실과 허구 사이의 전환을 무의식적인 편집으로 숨기고,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 옆에 편집되어 시각적 논리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전통적인 몽타주의 언어 규칙을 무시한다. 따라서 울분의 삶과 그녀가 쓴 소설 사이의 관련성이 애매한 것처럼 이미지와 사운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논리에 대한 추정은 불완전하다. 현실과 허구의 유사성 또는 미러링을 통해 플롯은 각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자유의 한계를 정의하려 한다. 오프닝 시퀀스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조합이 에드워드 양의 주제에 대한 탐사를 위해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에 대한 예고이다. 복잡하게 구성된 몽타주는 모두 한날 오전 7시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몽타주는 숏의 논리를 파괴한다. 몽타주의 개요는 이러하다. 길바닥에 쓰러진 남자, 깨진 벽, 창문 안에서 빨래하는 여인, 전선과 파이프 따위의 잔해물들이 너저분한 골목길, 총성, 총을 들고 도망가는 남자,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질주하는 경찰차, 잠에서 깨는 울분, 소설 쓰기에 대한 립중과 울분의 대화, 아파트 창문 사이로 보이는 총을 든 익명의 팔, 총성,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옮기는 또 다른 남자,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가로지르는 경찰차, 경찰차에서 내려 상황을 체크하는 경찰, 카메라 셔터 소리, 카메라를 든 창, 창을 검문하는 두명의 경찰, 도박장에서 뛰어내리는 슈안과 대순, 발작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창, 대순을 체포하는 경찰, 쓰레기통 뒤에 몸을 숨겼다가 다리를 절룩이며 골목 안쪽으로 멀어지는 슈안, 카메라 셔터 소리. 그 뒤에 이 모든 상황을 요약하는 “그날은 봄의 첫날이었다”라는 울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깔린다. 이 내레이션은 아마도 그녀가 쓰고 있는 소설 <결혼실록>의 첫 문장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끊임없이 중계되어 무한히 조각난 전체가 되는 상상적 서사의 초입에서 시각적 표현과 사운드 디자인에 깃든 복잡한 은유가 시작된다. 이 시퀀스에서 사운드 디자인은 자연주의를 거스른다. 카메라 셔터가 작동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사운드는 셔터 소리뿐이고 형사들이 범죄 현장을 기웃대는 수상한 남자(창)를 추궁하는 말들, 슈안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의 착지음은 들리지 않는다. 이 시퀀스를 울분이 쓴 소설의 도입부로 본다면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파편적인 단편들의 몽타주, 사운드의 선택적 사용은 문학의 묘사에 대한 영화적 번안이라고 해석할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소설에 묘사된 장면을 영화를 통해 보고 있는 셈이다. 그들 스스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단편들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였을 때 존재하지 않았던 의미로 비약하는 상상의 서사가 창조된다. 영화 곳곳에서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윙윙대는 형광등 소리, 도시의 억압적인 앰비언스 사운드 역시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복잡한 내러티브 외에도 소리의 기원은 혼란을 유발하고 의도하지 않은 기만의 레이어를 만든다. 에드워드 양은 복수의 캐릭터가 희미하게만 연결될 수 있도록 던져둔 채 부조화를 창조하는 몽타주 시퀀스들을 제시함으로써 사운드와 이미지 모두에 의문을 가지도록 만든다.

테러와 구토

타이베이의 공포분자들은 교차하고, 만나고, 구겨지지만, 플롯은 그들의 개별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 여기에는 두개의 엔딩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첫 번째 엔딩은 이립중이 울분과 심씨가 머무는 집에 잠입하여 심씨를 총격하고 슈안을 만나는 버전이다. 승진에서 탈락한 뒤 완전히 무너져내린 립중은 친구인 구 형사의 총을 훔쳐 승진에서 자신을 밀어낸 주임을 살해한다. 에드워드 양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주임의 숏 뒤에 구 형사가 잠에서 깨어나는 숏을 연결함으로써 앞의 사건을 구 형사의 꿈처럼 처리했다. 이어지는 신에서 립중은 심씨의 거처에 잠입하여 그를 살해한 뒤 울분을 겨누었던 총구를 비틀어 거울에 구멍을 낸다. 이어서 거리로 나온 립중은 슈안을 호텔방으로 유인하고 구 형사 일행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호텔방을 급습한다. 첫 번째 엔딩은 구형사가 호텔방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사운드와 흰 벽에 핏덩이가 튀는 총격음의 오버랩으로 종료된다.

또 다른 버전의 엔딩은 구 형사의 집 욕실에서 립중이 권총 자살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울분의 꿈이다. 전날 립중과 술을 마신 구 형사는 아침에 일어나 욕조에 머리를 기대고 죽은 립중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의 뇌수는 꼬질꼬질 때가 묻은 일본식 욕조로 흘러들고 있다. 이어서 울분이 잠에서 깨고 그녀 옆에는 죽은 줄 알았던 심씨가 누워 있다. 첫 번째 엔딩과 두번째 엔딩 사이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구 형사와 울분의 숏이 나란히 삽입되어 있다. 립중의 테러는 구 형사의 악몽인가? 또는 립중의 권총 자살은 울분이 잠든 사이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구상된 소설의 결말인가? 물론 소설은 살인과 자살을 포함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숏은 울분이다. 그녀는 관객이 방금 본 장면들을 숙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씨가 일어나고 넋이 나간 표정의 울분이 바닥에 구토를 할 때 화면은 암전된다. 그녀는 고대하던 임신을 하게 된 것인가?

어리둥절한 두 버전의 엔딩에 대해 소설가 울분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과거사를 단편소설로 지어낸 사실에 대해 말하는 심씨 앞에서 울분은 “그냥 소설일 뿐이에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결국 현실이 아니라 허구”라고 말한다. 이 말은 소설을 읽고 심씨의 사무실에 쳐들어온 립중에게 울분이, 울분의 소설 내용을 듣고 공포를 느끼는 창에게 그의 연인이 반복하는 말이기도 하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만 <공포분자>는 현실과 소설을 번갈아가며 왕래하고, 영화 속 인물들은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 현실과 허구의 교환 가능성은 그것이 물리적, 정신적으로 억류된 인물들의 탈출 수단이었던 까닭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 슈안의 기망(欺罔)과 울분의 몰각적인 창작 방식, 현실과 픽션을 구별하지 못하는 립중의 아둔함, 그리고 현실 너머에 있는 슈안의 이미지에 대한 창의 강박은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의 본질을 말해준다. 거짓의 속성에 대한 도덕적 혐오감은 마지막 숏에서 울분의 구토가 전하는 느낌처럼 메스껍다.

픽션의 파괴적인 힘, 불경한 판타지로 빠져들게 될 위험이라는 <공포분자>의 테마는 관객에게 안전한 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만 뉴웨이브의 주력 감독들에게서 발견되는 전통적인 스타일과 달리 에드워드 양은 주제를 강화하는 시청각 이미지의 조력을 통해 불확실성의 세계를 진단한다. 주름과 매듭으로 이루어진 서사에 호응하는 편집은 상이한 시공간을 연결하는 동시에 인물의 감정 상태를 공유하기 위해 이미지와 사운드를 분리한다. 이질적인 캐릭터들의 앙상블, 퍼즐처럼 전체적인 그림이 즉각 나타나지 않는 플롯, 사운드와 이미지의 병치, 부조화의 몽타주, 현실과 픽션 사이의 난기류는 메시지와 그것의 의미에 대한 종결되지 않는 해석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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