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직장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PC방과 노래방 업주들이 팀을 짜서 찾아온다. 코로나19로 영업이 금지된 이후부터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죽음을 생각하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버틴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밖에 없다. “죄송합니다. 제게는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관료제는 그렇게도 도망칠 구멍을 잘도 만들어주었다. 나의 시간은 그들의 고통과 무관하게 재깍재깍 잘도 흘러간다. 그런데 그 고통을 마주한 채 이렇게 별 탈 없이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그렇게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은 죽음을 맞이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
연루의 세계
익히 알려져 있듯이,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삼부작’은 프랑스 국기에 표현된 프랑스 대혁명의 세 가지 가치,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영화다.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는 그 가치를 이상화하기보다는 그 실현을 가로막는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쪽에 가깝다. 그에게 이들 가치는 단순히 이념의 차원에 존재하는 순수한 가치가 아니다. 우리는 <세 가지 색: 레드>(이하 <레드>)의 엔딩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 평등, 박애를 표상하는 각 영화의 인물을 제외한 모든 승객은 죽음을 맞는다. 방점은 생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죽음의 대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렇게 이들의 가치는 순진무구한 천사가 아니라 온몸에 피를 묻힌 전사라 불러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나와 타인의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고통과 불행에 연루된 자로서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세 가지 색 삼부작’을 통해 건져 올리고 싶다. 그것이 고통받는 자들의 신음으로 가득한 지금,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현재화하는 방법일 것이다.
두개의 삶
키에슬로프스키는 자신의 영화적 테마를 곧잘 반복하곤 했다. 가령,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누군가를 엿보는 인물은 <레드>의 판사에게 반복되고, <십계1>의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은 <세 가지 색: 블루>(이하 <블루>)에서 가족의 죽음으로 반복되며, <데칼로그>의 심장병에 걸린 가수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다시 등장한다. 심지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등장했던 노파는 ‘세 가지 색 삼부작’ 모두에서 수거함에 빈병을 넣는 모습으로 반복해 등장한다. 앙드레 바쟁은 장 르누아르를 언급하면서 작가는 평생 한편의 영화를 만든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러한 작가 리스트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이가 바로 키에슬로프스키이다.
그런데 키에슬로프스키에게 이러한 반복은 작품과 작품 사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이렌느 야곱이 동시에 연기한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크의 삶이 잘 보여주듯이, 키에슬로프스키는 ‘두개의 삶’이라는 테마를 통해 한 작품의 주제로 곧잘 연결시키곤 했다. 그러니까 ‘두개의 삶’은 그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두개의 삶’은 <레드>에서 은퇴한 판사와 청년 오거스트의 관계를 통해 다시 반복된다. 법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한 판사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채 이웃의 전화를 도청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땅에 떨어진 책에 펼쳐진 페이지에서 판사 임용 시험에 출제될 문제를 우연히 발견하고 사랑하는 이가 배신하는 아픔을 겪는 등의 판사의 젊은 시절 일화는 젊은 판사 오거스트의 현재 삶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그러니까 오거스트는 판사의 젊은 시절을 살고 있다. 달리 말하면, 판사는 오거스트의 ‘잠재적 미래’다. 하지만 그것이 오거스트가 판사의 현재와 동일한 미래를 반드시 갖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원하는 것은 예정된 운명의 길을 가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운명에서 벗어나 잠재된 또 다른 삶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실제로 키에슬로프스키는 판사를 두고 “오거스트가 배를 타지 않았을 경우 늙어서 어떻게 되었을지 보여주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이야기한다. 현실의 세계와 나란히 함께하는 잠재된 세계는 키에슬로프스키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세상의 모습이 구슬이나 차창에 왜곡된 형상으로 출현하는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다. 베로니카와 베로니크의 관계처럼 ‘한 인물 안의 두개의 삶’이 존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키에슬로프스키가 보여주는 세계는 단순히 물질적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어쩌면 키에슬로프스키만큼 실재(the real)란 ‘현재화된 것’과 ‘잠재적인 것’의 합이라는 베르그송에서 들뢰즈로 이어지는 철학적 개념을 영화적으로 잘 보여준 감독은 없을 것이다. 잠재적인 것 앞에서 우리의 삶은 무한으로 열린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그 무한의 삶에 다가가려 한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해석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우리의 현실적 삶 옆에 또 다른 잠재적 삶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세계가 결코 온전한 세상이 아님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확정할 수 없는 불완전한 세계 앞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선택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윤리적 선택의 무거움이다. 베로니크는 그 무게 앞에서 타인의 삶으로 향한다. 자신의 삶을 가능하게 한 조건으로서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죽음의 길에 들어선 베로니카와 꿈을 포기한 대가로 삶을 지속하는 베로니크 중 그 누구를 더 옳다거나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베로니크의 삶에서 베로니카에게 없는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는 단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의 고통, 좌절, 희생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 있다.
보이지 않는 끈을 자각하기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는 베로니크에게 소포로 배달된 ‘구두끈’이 등장한다. 베로니크는 이 구두끈을 자신의 심장 박동을 기록한 기록지 위로 포갠다. 우리는 심장마비로 베로니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베로니크가 아련한 슬픔을 느꼈음을 알고 있다. 베로니크가 감지한 슬픔은 현실 세계의 인과율에서는 불가능한 반응이다. 하지만 키에슬로프스키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두개의 심장을 이어주는 이 구두끈은 키에슬로프스키의 세계관을 물질적으로 구현한다. <레드>의 도입 장면에서 세상 곳곳에 연결되어 있는 전화 케이블 역시 마찬가지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이보다 더 세련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이러한 세계관을 구현하는 장면은 발렌틴과 오거스트의 모습을 교차할 때다. 이 두 사람 역시 현실적인 인과율에서는 서로 무관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키에슬로프스키의 카메라(와 편집)는 인근에 사는 두 사람을 어떤 관계가 있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연결하려 한다. 예를 들면 오거스트가 개와 함께 집을 나서면 그를 비추던 카메라가 발렌틴의 집으로 이동하면서 두 사람을 어떤 관계로 묶으려 하는 식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서사와 그 시각화가 서로 모순되는 듯한 이러한 연출은 키에슬로프스키가 현실 세계 너머에 또 다른 인과율이 놓여 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인과율이라고 하면 우리가 감각하는 물질적인 현실 세계의 원칙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키에슬로프스키에게 이 세계의 인과율은 그렇게 단순한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영화적으로 반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인과율은 근대주의의 결정론적 세계관 너머에 존재하는, 아니 그것이 깨진 곳에서 출현하는 보이지 않는 운명적 힘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표면적 현실 세계에서는 인과율적으로 무관한 사건이나 인물이라 할지라도, 더 큰 차원에서 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다. 그러한 더 큰 차원의 인과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베로니크는 베로니카의 죽음을 감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영화에 반복되는 ‘두개의 삶’이라는 테마는 인과율 너머의 인과율에 의해 서로 연루된 세계를 전제로 할 때 성립 가능하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베로니크가 절망감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을까? 내게 그 장면은 베로니크가 베로니카의 죽음을 감지했을 때가 아니라, 동화작가이자 인형조종사인 알렉상드르가 <두 개의 삶>이라는 작품을 위해 만든 두개의 인형과 마주할 때이다. 어쩌면 이 순간 베로니크는 자신의 운명을 조종하는 신의 실체를 엿본 것인지도 모른다. 발렌틴이 알렉상드르를 처음 만나던 날, 그녀는 인형극보다는 ‘인형을 조종’하는 그의 모습에 매혹되었지만, 이제는 그에게서 자신 역시도 신이 조종하는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 가지 색: 화이트>(이하 <화이트>)가 평등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영화였듯이, 결코 이 신은 공평하지 않다. 베로니카와 베로니크, 판사와 오거스트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타인의 죽음과 나의 생존, 타인의 불행과 나의 안락을 결정하는 것은 우연의 결과다. 베로니카가 죽지 않았다면 베로니크가 죽었을 것이다. 연루된 두 사람의 죽음과 삶을 가르는 것은 우연의 결과다. 누군가의 절망과 희생, 또는 죽음의 대가로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운명과 우연이 교차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진짜 눈물의 공포>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세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우주는 심술궂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리석은 신이 창조한 우주이다. 그 신은 창조 작업을 망쳐서 불완전한 세계를 만들어놓고는, 반복되는 시도를 통해서 구해낼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구해내려고 한다. 우리 모두는 ‘못난 신의 아이들’인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가 더 큰 차원의 인과율, 또는 연루의 세계관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 ‘못난 신의 아이들’에 의해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엔딩에서 인형조종사 곁을 떠난 베로니크는 아버지의 집으로 향한다. 베로니크는 차를 멈추고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거친 나무에 손을 갖다 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공방에서 나무의 표면을 다듬던 아버지는 무언가를 느낀 듯 그 행동을 멈춘 채 뒤돌아본다. 그러고는 영화 첫 장면에서 베로니카가 합창하던 노래가 들려온다. 마치 이 장면은 베로니카의 아버지마저 베로니크의 존재를 감지하는 듯한 느낌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장면은 키에슬로프스키가 보여주려는 ‘연루된 세계’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인과율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이 세계의 원리. 그리고 그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감지하는 것.
타인을 향한 눈물 섞인 미소
‘세 가지 색 삼부작’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이들 영화가 자유, 평등, 박애를 이야기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가능성(또는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주제를 경유한다는 사실이다. 이들 영화의 인물은 사랑 때문에 좌절하면서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사랑의 실패는 존재의 자기 소멸로 이어지곤 한다. 실제로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진 후, <블루>의 줄리는 고독 속으로, <화이트>의 카롤은 하찮은 무능력자로, <레드>의 판사는 사회적 관계를 절연한 삶 속으로 들어간다. ‘세 가지 색 삼부작’의 테마를 자기 소멸의 삶에서 벗어나기, 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지젝은 이들 영화가 인물을 ‘상징적 죽음’이라는 영도 수준으로 끌어내린 후, “타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세계로의 재통합으로 나아가는 항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이들 영화는 인물이 상징적 죽음의 단계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때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적 죽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영도 상태에서 ‘선택의 자유’를 얻은 인물이 실질적으로는 조금의 자유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가령, <블루>에서 줄리는 남편과 딸의 죽음 이후 전적으로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삶에 내던져진다. 줄리는 가족과 살던 곳을 정리해 파리로 떠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도 못한다. 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그녀가 진짜 자유로워지는 것은 남편이 다른 여인과 외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이다. 그 이후 줄리는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상실을 상실’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정신분석학에서 ‘애도’라 칭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줄리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찾았을 때, 그녀는 한 노인이 번지점프하는 TV 속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두 번째 방문에서는 누군가의 외줄타기 장면이 등장한다). 그 장면의 노인처럼 어머니는 가상의 죽음에 빠져 있는 존재다. 어머니는 줄리와 자신의 동생인 마리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녀는 과거에 갇혀 산다. 죽은 남편에게 벗어나지 못한 줄리나 과거에 머물러 있는 어머니는 궁극적으로 같은 처지다. 과거의 기억에 갇혀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상징적으로) 죽은 삶과 다르지 않다. 과거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의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자유의 시작이다. 그녀는 그때부터 다시 곡을 쓰기 시작한다. 달리 말해,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다시 창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엔딩에서 줄리의 눈동자에 비친 줄리의 나신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치 그 모습은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의 모습과 닮았다(이 장면은 남편의 애인이 초음파로 태아를 보는 장면 이후에 등장한다).
<블루>는 그 엔딩에서 줄리와 관계되었던 이들의 모습을 한명씩 몽타주로 연결한 뒤, 이를 눈물 섞인 미소로 바라보는 줄리의 얼굴을 담는다. 지젝의 지적처럼, 이 눈물은 “추상적 자유에서 벗어나 타인들을 사랑으로 끌어안는 구체적인 자유”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증명할 수도 있고, 그렇기에 “행복의 진술”일 수도 있으며, “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편안해진 것”임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줄리 개인 차원의 눈물 섞인 미소가 아니다. 우리는 그 직전에 각자의 죄의식과 고통에 빠져 있는 인물들의 몽타주를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들의 삶과 자신을 연루시킬 때 가능한 눈물과 미소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세 가지 색 삼부작’은 모두 인물의 눈물 섞인 미소를 보여주며 엔딩을 맺는다. 그것은 모두 타인을 향한 눈물과 미소다. 죽어버린 세계와 절연한 자들이 잠재된 세계와 접속하며 짓는 눈물 섞인 미소. 지금이야말로 그 절연과 미소 섞인 눈물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