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안 풍경> 제작 한양영화공사 / 감독 박종호 / 상영시간 119분 / 제작연도 1962년
1960년과 1961년에 유행한 가족 드라마가 결정적으로 기댄 장르 요소는 희극성이다. 희비극이라는 당시의 광고문구가 말해주듯 비극적인 내용이 그려지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밝은 정서를 유지하며 희극적인 요소를 곳곳에 배치하고 엔딩 역시 희망적으로 마무리한다. 소시민 코미디라고 불린 이유이기도 한데, 바로 그 주역은 서민 가족의 아버지로 분한 김승호, 또 그의 상사 역이나 수금하러 다니는 사람 같은 감초 역할로 코미디 파트를 책임지는 배우 김희갑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장르의 특성이 그렇듯, 1960년대 초반 가족 드라마 역시 장르적 관습에 균열이 일어나고 혼종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비극적인 요소가 강해지거나 정극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61년작 <돼지꿈>(감독 한형모)이다. 영화는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건설한 후생주택에 사는 중학교 선생(김승호) 가족을 그린다. 주택할부금을 갚기도 빠듯한 어려운 생활을 하는 부부는 재미 동포 찰리 홍(허장강)이라는 사기꾼에게 큰돈을 잃고 마지막에는 교통사고로 외아들(안성기)마저 잃는다. 압도하는 비극은 전반부의 희극성을 완전히 휘발시켜 버리는 것이다. 1962년작 <골목안 풍경> 역시 당시의 신문광고들은 풍자와 희극 같은 요소로 장르를 포장하고 있지만, 영화의 본질은 ‘스위트홈’의 환상을 깨는 방향으로 구축되어 있다.
<골목안 풍경>은 시나리오작가로 처음 영화 일을 시작한 박종호의 연출작이다. <아름다운 악녀>(감독 이강천, 1958)의 시나리오로 데뷔한 그는 2편의 각본을 더 맡은 후 1959년 김지미와 이민, 최무룡이 주연한 <비오는 날의 오후 3시>(1959)로 감독 데뷔했다. 그가 시나리오까지 쓴 이 영화는, 전후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장르를 어떻게 수용해냈는지 연구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작품이다.
이후 그는 <지상의 비극>(1960), <그토록 오랜 이별>(1962), <겨울나그네>(1962) 등 사회적 관심과 멜로드라마 장르에 대한 고찰이 돋보이는 영화들을 연이어 연출했다. 다섯 번째 작품 <골목안 풍경>은 ‘HLKV 문화방송’ 라디오 주말연속극을 영화화했는데, 역시 박종호가 각본을 맡았다. 홍보에서는 서민 가족 드라마로 포장되었지만,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그려지는 정극 멜로드라마의 톤으로 연출된 작품이다. 비록 스타 감독은 아니었지만 그는 안정된 연출력을 기반으로 어느 순간 파격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인상적인 감독이었다.
산아제한이라는 이슈
영화는 제목에서 환기되는 것처럼, 일견 가족 드라마의 분위기로 시작한다. 활기찬 음악과 함께 등장한 내레이션 목소리가 서울의 풍경을 보여주며 한 가족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1960년대 초입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의 이슈가 된 인구문제를 진지하게 거론하는 것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240만명이 넘는다며 “이젠 사람이 사람 등쌀에 밟혀 죽을 지경이다”라는 말과 함께 카메라는 아이들로 분주한 골목 안 풍경을 잡아낸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산아제한 정책이 포함된 가족계획을 발표한 해가 바로 이 영화가 개봉된 1962년이다. 박정희 정권은 심각한 빈곤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인구 억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았고, <골목안 풍경> 역시 정부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는 걷잡을 수 없는 멜로드라마적 전개의 도화선이 될 뿐이다.
이제 골목 안 한 가족의 아침 풍경이 펼쳐진다. 구청 세무과 계장인 고주사(김승호)는 부인(조미령)과 9남매의 자식 그리고 어머니(정애란), 남동생 영택(최무룡)과 같이 산다. 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로 촬영되었는데, 대가족을 잡아내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가족들이 한방에 모두 모여 식사하는 장면에서 와이드스크린이 장점을 발휘한다. 내레이션과 함께 등장했던 활기찬 음악은 그들의 아침 식사 자리에서도 계속되지만, 등교하는 아이들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끊긴다. 9남매 자식의 건사가 결코 행복한 풍경이 아님을 신호하는 것이다. 또 고주사는 일어나지 않는 소설가 지망생 영택을 아침부터 때리기까지 하고 노모가 나서 둘을 말린다. 영화는 처음부터 가족 드라마의 관습과 어긋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활기찬 음악이 시작되면서 고주사가 급히 출근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한양재단(한양대학교) 산하, 당대의 메이저 영화사였던 한양영화공사가 제작한 작품답게 세무과 사무실 세트는 상당한 규모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장점 중 하나는 다른 가족 드라마들처럼 가장의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피상적으로 그리지 않는 것이다. 유흥세 징수 등 세금과 업무를 촘촘하게 묘사하는 것은 119분에 달하는 드라마의 밀도를 높이는 데 일조한다. 아침부터 고주사를 찾은 박과장(양춘)은 딸이 5명인데 부인이 또 임신했다며 피임약에 관해 물어본다. 둘은 순전히 남성의 관점에서 임신과 피임에 대해 사담을 나눈다.
앞서 운을 뗀 것처럼, 피임과 임신의 문제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처남 호성(김진규)은 불임 문제로 그의 부인(이빈화)과 몸싸움까지 하고, 그날 저녁 호성은 술자리에 고주사를 불러 넋두리를 한다. 김진규는 예의 그 특유의 지적인 신사의 얼굴로 부부 싸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의 얼굴이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뉘앙스를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고주사가 호성의 책방에 들렀을때 집은 책 제목은 ‘임신과 피임법’이었고, 호성의 아내가 산부인과에서 검사받는 장면에서는 의사로 분한 김희갑이 등장해 마치 문화영화의 한 장면처럼 임신에 대해 설명하기도 한다.
악다구니와 같은 삶
산부인과 장면이 끝나고 영화의 초반 30분이 지난 시점, 호성이 만나는 내연녀 은미(김지미)가 처음 등장해 이 영화가 가족 드라마가 아닌 멜로드라마의 지분을 가지고 있음을 강력하게 알린다. 호성은 다방 마담 은미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지만 사실 그녀는 다방의 실제 소유주인 김사장(장동휘)의 내연녀이고 그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다. 9남매를 키우느라 고통을 받는 고주사 부부도, 은미-호성-김사장의 복잡한 관계도 따지고 보면 부적절한 임신의 결과물이다.
이 영화를 본질적인 의미의 멜로드라마로 규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는 악다구니 같은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순간이다. 아침밥을 먹던 호성이 밖에서 아이를 낳아오겠다고 하자 부인은 남편의 멱살을 잡고 팔까지 문다. 그들의 싸움은 부인이 은미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책방에서도 계속된다. 가장 결정적인 몸싸움 장면은 이 영화의 후반 30분을 지배한다. 은미는 김사장의 새로운 내연녀가 되어 다방을 맡게 된 미스 홍을 상대로 말 그대로 처절한 격투를 벌인다. 60년대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여성간의 사투이다.
감독은 배우 김지미가 만들어낸 파토스적 에너지를 계속 끌고 가는데,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맨발로 도심 거리를 지나 김사장의 식당으로 간다. 본부인에게는 머리채까지 잡히는 김사장이 은미에게는 가혹한 폭행을 가한다. 결국 김사장과 호성에게 버림받은 은미는 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은미가 점한 멜로드라마가 이렇게 끝나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유서를 쓰고 집을 나간 고주사를 걱정하는 가족의 모습이 등장한다. 영화의 마지막, 동생 영택의 소설이 현상 공모에 당선되고 그는 고주사를 고초에 빠뜨린 김사장을 직접 찾아가 30만환을 갚는다. 고주사도 집으로 돌아오고, 관계를 회복한 호성 부부는 고주사의 두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심해 그의 부담을 덜어준다. 이것은 과연 해피엔딩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