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 코로나19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신작 개봉이 줄줄이 밀렸고 그만큼 OTT와의 접촉면이 넓어졌다. 물론 전에 없던 것들이 갑자기 생겨났다기보다는 변화의 징후가 감지되었던 것들이 단번에 촉진된 상황이다. 이 와중에 한국영화의 면면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결론부터 말해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물론 지난해부터 제작된 것이 올해 공개되는 거지만 요 몇해 동안 규모 있는 한국 상업영화의 면면과 비교해볼 때 올해 특별히 나빠진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반적인 만듦새는 나아진 것 같다. 의미 있는 시도도 있었고, 장르적으로도 좀더 다양해진 게 아닐까 싶다.
안시환 지난해와 올해를 비교하는 게 유의미한 것 같진 않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다만 올해 여름영화인 <반도> <강철비2: 정상회담> 등을 놓고보면 실망스럽다. 전작의 흥행에 기댄 속편들인 셈인데 다음 연작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매력적이지도 않고 기대감을 주는 데도 실패했다. 코로나19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예전만큼의 스코어를 기록했을까 생각해보면 회의적이다.
김병규 한국을 폐허로 상정하고 계속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물론 이건 올해만의 경향이라고 보긴 어렵다. 예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줄줄이 나왔을 때도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상정하는 영화들은 늘 있어왔다. 그럼에도 올해는 유독 그런 경향이 도드라졌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하 <다만악>)이나 <사냥의 시간>을 보면 마지막에 꼭 해변으로 상징되는 어떤 낙원으로 도피한다. 이건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사는 공간을 서사적으로 구획하는 데 실패한 결과다.
안시환 최근 몇해 동안 나온 한국영화에는 이상하게 이 땅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감독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끝맺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사건을 벌인 땅에서 수습을 못하고 결국 도망이란 수단을 통해 극적인 비약을 하는 거다.
송경원 올해는 부쩍 해외 로케이션 영화가 늘었다. 서사적인 필연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갈 수 있으니까 나가보는 것처럼 보인다. 해외 올 로케이션이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는 그림을 보여줄 것 같은, 스펙터클과 규모에 대한 필요밖에 남지 않는다. 과연 이런 로케이션이 유효한가, 다양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김병규 이걸 징후라고까지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서사적인 방기다. 해외는 일종의 가상공간이자 이야기의 도피처인 셈이다. 약간 비약하면 <남산의 부장들>에서 “군대놀이를 한다”는 대사가 있지 않나. 여름에 나오는 한국영화에는 소년들의 놀이에 대한 거의 강박적인 집착이 있다. 다만 이게 개별 감독들의 무능력인지, 아니면 주술적인 차원에서 한국영화에 드리운 그림자인지는 숙고해볼 여지가 있다. 적어도 최근 한국영화에선 아무도 지금 이곳에서 서사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를 질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창동의 <버닝>이나 임상수의 <하녀>에서 한국은 몸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는 분신(焚身)의 공간이었다. 발을 디디고 선 공간이 서사적으로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 감독에겐 이런 질문들이 필요하다.
김소희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은 알겠는데 그 답이 해외 로케이션으로 이어지는 걸 보면 90년대 말 뮤직비디오가 떠오른다. 영화들이 더 스펙터클을 추구하며 만들어지는 탓도 있을 테고. 결과적으로는 외부로 나가려는 욕망만 보일 뿐 상상력이 부재한다. <다만악>의 경우는 기술적으로 빼어난 장면들이 있을지언정 영화 전체는 마치 화보집처럼 보였다.
김병규 이정재 배우의 뮤직비디오? (웃음)
송경원 동의한다. 차라리 2000년대 중반 영화들에서 서울 등 도시 공간을 다루는 방식들이 훨씬 새로웠다. 예를 들면 <멋진 하루>(2008) 같은 영화에선 친숙한 공간이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려졌다. 봉준호의 <마더>도 전국 각지를 로케이션해서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어디서 본 듯한 지방 소도시 마을을 창조해내지 않았나. 이런 표현을 달가워하진 않지만 한국적인 공간이란 특수성이 있었는데 올해 영화들에선 이런 부분이 지워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침입자> 같은 영화는 반가웠다. 집으로 공간을 제한하긴 해도 물리적으로 발을 디디고 있는 인상이다.
안시환 장르적으로 보면 일종의 페티시적인 활용이 반복된다. 탈출이라고 하면 항구, 항만, 컨테이너가 나오는 식으로. 결국 서사도 이런 선택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면 <다만악>이 왜 방콕을 무대로 하는가. 거기서는 그래도 될 것 같아서다. 다 때려부수는 난장을 치고 싶은데 한국에서 할 순 없으니 그냥 해외, 그것도 난장을 쳐도 될 것 같은 나라를 안일하게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송경원 이건 서사의 문제로 연결시킬 수 있겠다. 여름 상업영화에 대한 평 가운데 유독 눈에 많이 들어오는 단어가 개연성이다. 영화에 대한 문제를 지적할 때 개연성의 부재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여름 시장을 공략하는 영화들이 갑자기 서사적으로 헐거워진 걸까.
안시환 거기서 관객이 말하는 개연성이 뭔지 잘 모르겠다. 개연성이란 단어 자체에 개연성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진짜 서사적인 구멍이나 결핍이 있는 것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데 그걸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때 이른바 개연성이란 말로 퉁 쳐서 표현하고 있는거다. 가령 <반도>에 대한 불평은 좀비물이나 전작에 대한 기대치를 배신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다만악>에 대한 호의는 액션에 대한 기대치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김소희 서사적인 개연성과 디테일이 주는 개연성이 다소 분리되는 것 같다. 서사적 개연성은 주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데 반해 디테일이나 재현은 오류가 발견되면 치명적이다. 가령 <반도>에서 개연성 문제는 잦은 슬로모션이나 신파라기보다는 재현 방식의 오류에서 온다. 동선이 꼬인다든지 좀비물의 몇몇 설정이 깨지는 순간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다. 반면 <다만악>에선 액션에 대한 기대치만 채워주면 서사적인 헐거움은 크게 개의치 않고 즐긴다.
김병규 <다만악>은 컨셉과 세팅으로 끌고 가는 영화다. 서사적으로 공격당할 지점은 애초에 비어 있거나 굳이 밝히지 않는다. 그런 설명을 도리어 불필요하다고 받아들이는 관객이 적지 않다. 반대로 <반도>의 오프닝에서 전사(前史)를 만들어주고, 사연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지루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아귀를 맞추려고 많이 보여줄수록 도리어 많이 공격당한다.
송경원 고전 할리우드영화들을 보면 철저하게 설정숏과 숏, 역숏 공식을 지킨다. 그걸 안 보여주면 이해를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걸 다 빼고 가도 관객은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걸, 아니 도리어 스타일리시하다고 느낀다는 걸 알게 됐다. 코끼리를 생각하지마, 라고 할수록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 올해 한국영화에서 개연성이란건 그런 것 같다. 설명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시선이 더 쏠리고 거슬린다. 한때 <리얼>(2016)과 <자전차왕 엄복동>(2018)이 그랬던 것처럼 개연성이란 단어가 일종의 밈이 되어가는 모양새다. 반대로 그래서 아예 서사적으로는 더 퇴행적이고 생략해버리는 영화에 호의적인 평이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병규 평론가가 언급한 ‘소년들의 유희’라는 코드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를 통해 언급된 ‘한국영화의 소년성’이 퇴행적인 방식으로 다시 돌아온 건 아닌지, 기회가 되면 좀더 길게 이야기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