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 코로나19 확산 이후 극장가에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개봉영화가 사라졌고 OTT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상반기에 주목할 만한 사건을 두 가지 꼽는다면 <사냥의 시간>의 넷플릭스행을 두고 벌어진 분쟁과 최근 수입배급사협회의 OTT 서비스 중단이있었다. 위기 상황을 겪으며 시장이 강제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진통들이다. 또 하나 지표로 삼을 만한 건 코로나19로 당장 시험대에 오른 것이 영화제라는 점이다. 전주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영화들이 온라인 개최를 진행 중인데, 이것이 과연 얼마나 유효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시환 지자체에서 영화제를 지원하는 첫 번째 이유는 지역 홍보다. 지역 경제와 문화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명분이 한국 영화제들의 존립 기반이다. 물론 그것이 허수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꾸준히 있어왔지만 중요한 건 코로나19로 인해 근거 자체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당장 내년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제가 왜 필요한지를 설득해야 한다. 따라서 영화제의 형태와 성격도 바뀔 수밖에 없다.
김소희 관객이 지방에서 열리는 영화제를 갈 땐 지역 축제에 참여한다는 체험, 현장성이 중요하다. 영화제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면 영화제의 의미와 인식 자체가 바뀔 수 있다. 좋은 의미에선 접근성이 올라가는 거지만 아쉬운 건 현장성이 떨어지는 거다. 개인적으로 서울 지역의 영화제는 시네마테크 기획전을 가는 기분인데, 그런 상시성이 확장될 수도 있다.
김병규 구체적인 장소를 담보해야 하는 것들이 조심스럽게 해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낙관적으로 보면 기존 영화제 모델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가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정한 날짜나 상영 요건에 구애받지 않고 독립적인 프로그램을 꾸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기존 모델들로 유지될 수 없는 부분들이 치고 들어올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송경원 한편으론 그렇게 바뀐 것들을 여전히 영화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있다. 온라인으로 열린 위아원(We Are One)영화제 등을 보면 영화제라는 형태로 지속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 그냥 온라인 서비스의 확장이란 느낌이 들었다. 영화제에 가서 탈출 불가능한 상황에서 강제로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주는 쾌감도 있는데, 온라인으로 보니 한 편을 끝까지 보기 힘들었다. 실제로 위아원영화제의 통계를 봐도 단편이나 애니메이션 관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안시환 상시적으로 예술영화를 소개하는 시네마테크의 연장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접근성을 높이는 효율 면에서는 온라인이 더 유리하다. 중요한 건 물리적 공간의 제공보다는 커뮤니티의 제공이라고 본다. 장소 이상의 의미로 관객을 얼마나 묶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시험대에 올랐다고 해도 좋겠다. 한국에서 시네마테크가 커뮤니티로서의 역할을 거의 상실해가는 상황에서 이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송경원 여기서 논의를 확장해보면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고 느낀다. 영화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 장소가 주는 의미를 무시하기 어렵다. 나는 스스로 한번도 시네필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거꾸로 이런 상황 때문에 극장이 주는 제의적인 성격을 새삼 자각했다. 일부러 극장까지 가서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보는 이상한 소속감 같은 것 말이다. 업무 때문에 극장에 가지 못하고 작은 화면으로 영화를 볼 때도 많다. 매번 관성처럼 볼 땐 몰랐는데 막상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영화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적으로 <사냥의 시간>을 극장에서 봤다면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김병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시네필적인 것들의 해체가 나쁘지 않다고 본다. 시네필리아라는 알 수 없는 정체성, 장소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 제의 같은 것들이 진정 영화적인 경험일까. 극장이라는 체험이 영화의 근본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건 어쩌면 그저 언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런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정체가 모호한 시네필이란 개념에 대한 대안까진 아니더라도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안시환 동의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 영화의 일부인 것처럼 여겨지는데 진짜 그런가. 여러 관람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을 시네마의 조건이라고 착각한 것은 아닌가. 나는 비디오 세대인데 한때 비디오로 영화를 처음 접하고 나면 반드시 극장에서 다시 봐야 한다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걸 당연하게 따랐던 입장에선 혼란스러운 면도 있지만 한편으론 통쾌하기도 하다.
김병규 사실 영화의 역사와 극장의 역사가 정확하게 겹치진 않는다. 영화가 만들어진 뒤 얼마 후 극장이란 시스템이 하나의 표준으로 정착했을 뿐이다. 초기 영화들은 오히려 필름을 들고 다니며 펼치는 곳을 극장으로 만드는 이동성이 있었다. 관점에 따라선 극장이란 안전지대에서 보수적인 체계가 견고하게 굳어지면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할 수 있는 시도들이 배제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요컨대 지금의 상황은 극장 바깥으로 밀려났던 여러 잠재적인 상상력이 폭발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기다.
송경원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한편으론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 정보의 평등, 디지털 민주주의가 구현될 거라고 했던 낭만적인 상상처럼 들린다.
김소희 개인적인 체험으로 말하자면 좋은 영화는 작은 화면에서 봐도 여전히 좋았다. 상영 환경과 체험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필수조건은 아닐지도 모른다. 도리어 극장이란 공간이 부각되면서 영화가 규모와 체험을 강조하는 스펙터클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형태가 달라지면 그에 맞는 언어들이 또 나올 것이다. 동시에 관람한다는 행위의 동질감이 중요하다면 그건 온라인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사실 극장에서 함께 본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엔 철저히 분리된 공간이기도 하다.
안시환 관점을 달리해서 극장이냐 스트리밍이냐를 판가름하는 건 결국 산업이다. 늘 그래왔듯 어느 쪽이 더 돈이 될 것이냐가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지금의 위기는 사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위기가 아니다. 산업 주체, 특히 극장 위주의 시스템 안에 안착한 이들의 위기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각자의 집에서 기술적으로 극장에 육박하는 수준의 관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극장이 기존 개념을 고수할 것인지는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적인 선택의 문제다.
김병규 동의한다. 자본이 지나치게 집약되었을 때 나타나는 폐해도 적지 않다. 스크린 수가 많다고 극장에 다양한 영화가 걸리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극장이 영화의 면적을 꼭 넓혔다고만 보긴 어렵다. 자본이 견고해질 때 거기서 누락되는 목록들이 늘어가기도 한다.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지금처럼 극장과 자본의 견고한 고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영화 관람 방식의 다양성, 잊혀졌던 가능성이 폭발할 수도 있다.
안시환 마찬가지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극장의 해체가 곧 영화의, 가능성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건 또 아니라는 거다. 방금 했던 말을 고스란히 가져와, OTT의 전망이 밝은 게 아니라 시장을 선점해 거대 공룡이 되어가는 넷플릭스의 전망이 밝은 거다. 인터넷 초기에 등장한 낙관론이 결국 현실에선 구현되지 못한 것처럼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OTT가 틈새 영화들을 지원하는 롱테일의 경제학을 구현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현재 상황만 보면 플랫폼만 갈아타고 다시 자본 집약적인 형태의 또 다른 모델이 들어설 수도 있다.
김병규 ‘영화는 어디에 위치하는가’라는 질문은 새삼스럽지만 필요하다. 예컨대 하룬 파로키의 영화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면 공간은 상관없다. 극장에서는 2명이 영화를 보고 국립현대미술관 갤러리에서는 30명이 볼 수 있다면 갤러리를 택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플랫폼이 뒤섞이는 상황에서 극장이 정점에서 최상위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대신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