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서산개척단 사건, 세월호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사회적 참사를 다뤄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무엇이었나.
이조훈 서산개척단 사건(박정희 정권이 국토개발사업을 명목으로 전국 각지에서 인력을 강제 동원해 충남 서산 개펄을 농지로 개척한 사건)에 대해서는 아예 몰랐다. 서산 출신 대학 후배인 류일용 전 KBS PD가 술자리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알아볼 수 있겠느냐고 말한 적 있다. 서산으로 내려가서 세명의 개척단 어르신을 만나 사전 인터뷰를 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꼭 알려야겠다 싶었다.
김지영 세월호 특별법 관련 홍보 영상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 세월호 참사로 동생을 잃은 누나가 앉아 있었다. 못하겠다는 말이 안 나오더라. 2개월 정도 홍보 영상을 만들 목적으로 세월호에 대해 파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인 사실을 알게 됐고 세월호 관련 다큐를 두편(<그날, 바다> <유령선>) 만들게 됐다. 햇수로만 벌써 6년째다. 세월호처럼 아직까지 진행 중인 사건은 해결이 나기 전까지 벗어나기 힘들다. 다른 일을 하더라도 스핀오프로 세 번째, 네 번째 작품을 계속 만들지 않을까 싶다.
구상모 늘 용산 참사에 대해 부채감 혹은 의무감이 있었다. 그런데 2014년 4월 KBS에 입사하자마자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그 이전부터 느꼈던 부채감이 더 큰 부채감으로 다가왔다. 두 참사가 어쩌면 비슷한 사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후 다큐 한편을 만들 계기가 생겼고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가 떠올렸다. 다들 “다 아는 사건인데 뭐 하러 다시 다큐를 만드느냐”고 말했다. 세월호도 그렇고 용산도 그렇고 다들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겹다고 한다.
김지영 100% 공감한다.
구상모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은 1995년 당시 생중계로 방송됐다. 이미 많은 것들이 나와 있는데 내가 한마디 더 보탤 게 있을까 생각하면서 아카이브를 뒤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997년쯤 되면서 삼풍과 관련된 뉴스가 사라져버렸다. ‘시간이 흐르니 삼풍도 없는 사건이 됐구나.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어쩌면 용산과 세월호를 지켜보면서 내가 힘들었던 근원이 이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들 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참사에 대해 이야기한 건 없지 않을까.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창작자로서 짊어져야 했던 책임이 있다면 무엇이었나.
이조훈 안으로는 인터뷰이들과의 관계, 밖으로는 제작비 조달이 어려웠다. 처음 서산에 내려갔을 때 어르신들이 “어디 방송국이냐”고 물었다. “방송이 아니라 영화로 만들 생각”이라고 대답했더니 “어떻게 이 사건을 주제로 영화를 완성할 수 있겠냐”고 하셨다. 60년 전 일이고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는데, 누구 하나 완성된 기사나 논문을 보내주지 않았다고 하더라. 어르신들은 이미 지쳤으니 제대로 조사할 사람이 아니라면 돌아가라고 했다. 취재 대상이 되는 분들은 감독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까 내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데 거부감이 많았다. 또 제작 당시는 박근혜 정권기였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벌어진 사건을 다룬 다큐이기 때문에 제작비 마련이 어려웠다. 전주국제영화제,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에 선발되지 못했다. 결국 사비로 제작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KBS 외주 일을 하고 있어 그 돈으로 <서산개척단>을 제작했다. 다른 데 취재 가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산에 들르면서 꼬박 4년이 걸렸다.
김지영 세월호는 지금도 진행 중인 사건이다. 최근에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 2기가 세월호 DVR(여러 대의 CCTV영상을 동시에 저장할 수 있는 디지털 영상 감시 장비. 사참위는 수장돼 있던 세월호 DVR이 미리 수거돼 조작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 편집자) 조작 혐의를 발표했는데 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 큰 뉴스인데도 불구하고 잠잠하다. 세월호 관련 어려움은 그거다. 사람들은 사참위 조사관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다 끝난 건데 뭘 조사하려고 하냐고 말한다. 나 역시 그 부분이 가장 힘들다. 사람들은 ‘불편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선입견이 얼마나 강한지 대부분 세월호 참사 직후 2~3개월간 들은 내용에 강하게 붙들려 있다. 자신들이 알았던 내용이 뒤집혔다는 걸 알고자 하지 않는다. 이 장벽이 보통이 아니다.
구상모 많은 희생자가 있는 다큐를 다룰 때 오는 어려움은 피해자를 만날 수 없다는 데 있다. 모든 피해자들을 만나서 그분들의 의견을 확인하고 모든 걸 취합한 뒤에 만들 수 있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모든 사건은 상황과 맥락이 중요하다. 삼풍백화점의 이한상 사장과 임원들이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빠져나갔다는 내용이 당시 널리 보도됐다. KBS도 그렇게 보도했다. 여태까지는 ‘삼풍 임원 도망’이 팩트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어떤 지점까지 보여주면 이한상 사장은 나쁜 놈이 되는데, 더 보여주면 이한상 사장은 억울한 사람이 된다. 또 거기서 더 보여주면 그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결국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가 난점이다. 유가족들 입장에서는 “진실 여부를 떠나서 굳이 그걸 왜 이야기하냐”고 이야기할 수 있다. “임원들을 대신해 해명하는 거냐, 임원들의 잘못이 없다는 뜻이냐”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딜레마다. 제작하는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아닌가 싶다.
김지영 보통 유가족이나 피해자를 같은 생각과 같은 목적을 가진 하나의 개체로 본다. 하지만 그 속에도 다들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정보공개청구를 계속하면서 아직까지도 의문점을 정리하는 유가족이 있는 반면, 구조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사고의 원인은 더이상 안 팠으면 하는 분도 있다. “난 사고 원인에 관심 없다, 배가 45도로 기울어졌을 때 내 아이와 아이들은 살아 있었다. 왜 안 구했느냐가 중요하지 그 앞은 관심 없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나는 사고 원인에 대한 다큐 작업에 오랫동안 집중해왔다. 그러다보니 당사자들은 원하지 않는데 기어코 사실을 밝힌다는 게 어렵다.
이조훈 <서산개척단> 피해자 역시 여러 층위가 있다. 개척을 위해 강제로 끌려온 사람과 끌려온 사람을 감시하고 때렸던 사람으로 나뉘기도 하고, 1차 사건의 피해자와 2차 사건의 피해자로 나뉜다. 서산에 끌려와서 강제 노역을 하고 강제 합동결혼을 하거나 일하다가 죽은 이들이 1차 피해자들이다. 6년 뒤 서산개척단이 해산하자 주변 농민들이 땅을 양도받는다는 국가의 가분배 약속을 믿고 개척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국가가 이들에게 땅을 나눠주지 않고 몰수해가면서 2차 피해자가 생겼다. 이들 1, 2차 피해자간에도 의견 차이가 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단장이 잘못해서 개척 사업이 망하고 국가 지원이 끊겨 해체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머지를 개간했는데 국가가 보상해주지 못해 사고가 터졌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료를 뒤져보니 이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종필이 개척 사업을 대가로 지원을 받는 근로법을 이용해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지원금을 받았고, 이런 사업장이 많을수록 지원금을 많이 받기 때문에 전국에 160개를 뒀다는 점을 알게 됐다. 법에 따르면 개척 사업에 투입된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식량도 지원해야 했으나, 선거자금으로 빼돌려 썼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취재가 길어지다 보니 자료를 많이 찾았고 피해자들 역시 단순 사고가 아니라 사회적 사건으로 인식하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그리고 ‘국가가 기획해서 우리를 이용했다’고 깨닫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분들이 늘었다. 원래 아예 이야기를 하지 않던 여성 피해자들도 입을 열었고 청와대로 가서 시위하자는 분들이 생겼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법)이 개정되면서 서산개척단 사건도 조사 목록에 포함돼 240명의 조사위원들이 조사하고 있다. 이처럼 사고를 사건으로 만드는 건 감독들의 시선인 것 같고 PD 저널리즘의 힘인 것 같다.
김지영 독립다큐는 사건을 끝까지 파면서 이전까지 봐온 걸 점검하고 그 이면을 들여다본다. 그 과정에서 영화 <라쇼몽>처럼 동일한 한 사건을 두고 증언과 자료가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당시 세월호에 탑승했던 선원들끼리도 말이 엇갈린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서 계속 파면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가 반드시 나온다. 거기까지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그날, 바다>는 국민 성금으로 제작비를 마련했다. 성금이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간이다.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번 것이다. 그 작은 성금들이 모이면 결국 엄청난 시간이 된다. 나는 사람들이 세월호에 대해 궁금해하는 걸 조사할 만큼의 시간을 성금으로 줬다고 생각한다.
-내레이션, 재연, 그래픽, 배경음악, 인터뷰 등 연출법에 있어서 각자 다양한 선택을 했다. 연출 방식에 대한 윤리적인 이유와 선택을 하기까지의 과정 등을 설명해달라.
이조훈 <서산개척단>에는 내레이션이 없다. 전작 다큐는 내레이션을 썼는데 “영화적이지 않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다큐란 뭘까 생각했고, 내레이션 없이 당사자들의 입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피해자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가해자 역시 담고 싶었으나 당사자인 박정희는 죽었고 서산개척단 단장 역시 사망했다. 김종필이 남았지만 몇번 요청해도 거절하더라. 다만 단장 밑에서 일했던 분들의 섭외가 성사됐다. 그들을 통해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영화에는 그들의 목소리와 피해자의 목소리가 충돌하는 모습까지 모두 담겼다. 예를 들면 중간 관리자 한 사람이 개척단에서 죽은 사람이 없다고 증언하다가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을 터트린다. 실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터뷰를 많이 하다 보니 증언들이 서로 교차돼 진실이 드러났다. 또 서산 사업장은 당시 잘나가는 사업장이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홍보를 많이 했고 사진 기록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대한뉴스> 푸티지도 많았다. 증언뿐 아니라 자료들을 모아서 흘러간 역사를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다. 한 가지 문제는, 관객에게 피해 장면들을 직접 보여주거나 재연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고민하던 차에 마침 서산개척단을 다룬 연극이 무대에 올려져 피해자 어르신들을 모시고 갔다. 다들 보고 싶어 하셨다. 연극을 보는 그들의 얼굴과 연극 장면을 교차하면서 스토리라인에서 있어 재연 없이도 간극을 채웠다고 생각한다.
김지영 시사다큐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가장 큰 덕목이고 궁극의 목적이다. 그래서 연출법 역시 그 전제 아래 결정했다. 나는 활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다 활용했다. 세련돼 보이든 아니든 영화 비평가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빨려 들어가서 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했다. 애니메이션, 재연, 친절한 내레이션 기법까지 다 썼다. 내레이션 이야기를 하자면, 내레이션을 통해 어려운 걸 친절하게 설명하려고 했고, 그러려면 친숙한 내레이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배우 정우성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구상모 내레이션이 있으면 촌스럽고 없으면 영화적이란 구도에 반대한다. 내레이션이 없으면 객관적이란 통념이 있다. 삼풍 다큐가 내레이션이 없어 객관적이란 얘기도 많이 듣는데 직접 연출한 입장에서 보면 그렇진 않다. 애초에 객관적인 다큐가 있을 수 있나. 없다. 내레이션은 객관성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 같다. 같은 사실을 전달하더라도 20년 전 아나운서가 “경부고속도로가 완성됐습니다”라고 얘기하는 게 더 흥미롭게 다가오기 때문에 아카이브 속 음성을 활용했다. 연출하는 입장에서는 삼풍백화점에서 시작해 한국 사회의 붕괴라는 주제까지 홀린 듯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결지점을 잘 표현하고 싶었다. 당시 상황이 담긴 아카이브 영상이 손에 있고, 취재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모든 게 보통 조각나 있었다. 둘 사이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시대정신이 무엇이었을까 고민했고, 다큐를 제작해나가면서 모든 이야기가 붕괴로 수렴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들을 이야기와 아카이브가 한국 사회 붕괴란 주제를 스스로 찾아갔다. 초반에는 기획 의도를 통해서 움직였다면 나중에 아카이브가 얘기하는, 인터뷰이가 이야기하는 기조를 따라가다 보면 연결지점이 생기고 나는 그걸 따라갔다.
-삼풍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이한상 사장을 등장시키는 것도 연출자의 선택이었다.
구상모 그를 꼭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그는 당사자다. 나는 당사자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이한상씨가 엄청나게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고 직전 빠져나갔다는 당시 보도가 오보인 줄 몰랐다. 그러나 어쨌든 참사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의 육성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에 참사가 많았는데, 가해자가 나와서 사과를 하거나 해명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한상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게 기록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가족들이 가해자를 보고 어떤 마음을 가질까, 연출자로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은 아직도 있다.
-작품을 만들면서 내적인 변화가 있었다면 이야기해달라.
김지영 사람들이 몰랐던 사실을 명명백백한 과학적 증거를 들어 보여주면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진심은 통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두편의 세월호 다큐로 생각이 바뀌었다. 진실이란 과학적 진실이 나와서 진실이 되는 게 아니다.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합의하고 받아들일 때 진실이 된다. 이 점을 깨달았다. 아무리 결정적인 걸 발견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게 가장 큰 변화다.
구상모 아카이빙 작업을 하면서 차곡차곡 모순이 쌓이는 지점들을 보게 됐다. 그리고 이 사회가 상상 이상으로 다 엮여 있고, 잘못의 경중은 있겠지만 참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나 역시 자유롭지 않다. 어떻게 보면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선명해진게 아니라 더 어려워졌다. 그만큼 참사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게 일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이조훈 이전 작업까지는 사건을 객관적이고 구조적으로 보고 싶어서 취재원들하고 거리를 많이 뒀다. 그러나 <서산개척단>을 제작하면서 어르신들을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며 더 친밀하게 다가갔다. 그들이 세월 속에서 상처받았던 마음을 어떻게 달래줄까 고민했고, 사건만 빼먹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들을 오래도록 위로하고 싶었다. 과거사법 개정으로 서산개척단 사건도 포함된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주인공 어르신한테 전화가 왔다. “내가 통과 사실을 자네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펑펑 났다. 그 뒤로 여러 개척단 어르신한테 전화가 와서 “보상 안 받아도 되고 국가가 이 사건을 조사한다는 것만으로도 명예가 회복된 거 같다”고 하시더라. 다큐를 하면서 늘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 가능성에 의문이 있었는데 <서산개척단>을 통해 영화로 세상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