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 부산영화제 갈라프레젠테이션 <미나리>의 온라인 기자회견이 열렸다. 윤여정, 한예리 배우는 부산에서, 리 아이작 정 감독과 스티븐 연 배우는 LA에서 화상으로 참여한 기자회견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모임처럼 느껴질 만큼 친근하고 소탈한 미소 아래 진행되었다.
윤여정 배우의 솔직한 입담으로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 함께한 모두가 흉금을 털어놓는 시간이 이어졌다. 여기 리 아이작 정 감독과 스티븐 연, 윤여정 배우의 진심 어린 말들을 전한다. 서로를 향한 애정 어린 고백을 듣고 있으면 <미나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리 아이작 정 감독
미국 아칸소에서 태어났다. 예일대학교에서 생태학을 전공한 뒤 영화로 전공을 변경, 유타대학교에서 MFA를 받았다. 2007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찍은 데뷔작 <문유랑가보>로 칸국제영회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었고, 이후 <러키 라이프>(2010), <아비게일함>(2012) 등을 연출했다. 1980년대 아칸소로 이주한 한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미나리>는 2020년 선댄스영화제 자국영화 경쟁부문(U.S. Dramatic Competition)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다.
<미나리>는 내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여러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들이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윌라 캐더 작가의 책 <마이 안토니아>에서 영감을 받았다. <마이 안토니아>는 작가가 네브래스카 농장에서 살았던 시절에 대해 쓴 작품인데, 이야기 속에 삶을 얼마나, 어떻게 반영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80년대를 살았던 내 기억을 가지고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정리했다. 우리 가족이 실제 겪었던 이야기들을 투영했고 최종적으로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장편 극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자전적 경험들이 뼈대가 되긴 했지만 각각의 배우들이 그들만의 시선으로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창조해낸 보편적인 이야기다.
제목은 처음부터 <미나리>여야만 했다. 아버지의 농장에서 한국 채소를 키우던 그 시절, 실제로 할머니가 미나리 씨앗을 가져와 심으셨다. 미나리는 오직 우리 가족이 먹기 위해 키웠는데 재밌게도 농장에서 키운 어떤 식물보다도 잘 자랐다. 아마도 할머니의 사랑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영화에서 미나리가 자라는 모습은 상징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실제로 우리 농장이 겪었던 사고와 고난은 영화에서보다 상황이 더 나빴다. 어쩌면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족의 사랑이 단단해진 시기가 아닐까 한다. 어린 나이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제작비가 넉넉지 않았고 더운 날씨에 여러 가지로 힘든 현장이었지만 데뷔작 <문유랑가보>를 르완다에서 찍었던 덕분인지 웬만한 현장은 그리 고되지 않았다. 특히 이번 영화는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찍을 수 있었다. 시나리오를 다듬을 때 윤여정·한예리 배우와 한국 스탭들이 매일 밤 숙소에서 회의하며 자연스러운 한국어 대사로 다듬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미나리>는 배우들의 캐스팅이 내가 바랐던 그대로였다. 윤여정 배우는 겉으로는 고약한 말을 하지만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할머니다. 할머니이되 한 인간으로서의 개성과 면모가 뚜렷하다. 한예리 배우가 맡은 모니카는 이 영화의 목적이자 심장이라 할 만하다. 배우를 믿고 작업할 수 있었다. 남편이자 아버지인 제이콥은 내 아버지의 초상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 많이 투영됐다. 아버지로서 내가 겪고 있는 경험을 녹여내고자 했고, 그걸 정확하고 깊은 결로 이해할 사람은 스티븐 연밖에 없었다. 정말 최고의 팀이 모였다. 선댄스영화제에서의 수상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자랑스럽다. <기생충> 이후 미국 관객의 포용력이 더 넓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편으론 매우 한국적인 이야기지만 곧 미국 이민자의 이야기이자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티븐 연
꿈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 1세대 가장 제이콥 역을 맡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화면으로나마 윤여정 선생님과 동료들을 볼 수 있어 기쁘다. 보자마자 꾸짖어주시니 현장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웃음) 처음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여러 지점에서 공감했다. 우리 가족 역시 캐나다로 먼저 이주했다가 미국 서부의 한적한 시골로 이주했으며 여러 문화적 차이들 속에 살아왔다. 이건 비단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한국계 미국인이 겪은 이주민의 삶을 대변한다.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통해 우선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미국에 왔던 아버지의 마음을 좀더 이해하게 되었다.
더불어 제이콥은 내 아버지 세대이지만 도리어 내 모습이 많이 투영된 면이 있다. 제이콥의 모습을 통해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나의 고민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주민이 느끼는 제약은 단순히 언어나 문화장벽만 있는건 아니다. 부모와 자식, 세대간의 차이도 크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느낌, 사이에 끼어 있다는 기분이 이주민의 정서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럴수록 가족간의 결속이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고, <미나리>는 그런 순간에 맺어지는 관계에 대해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지역사회에서 배척받는 폴과 같은 사람과 제이콥이 가까워지는 과정에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자연스러운 한국어 말투를 위해 윤여정 선생님을 비롯한 한국 배우와 스탭들에게 큰 도움을 받은 것도 감사한 부분이다. 이런 아름다운 대본을 가지고,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이토록 훌륭한 영화 작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윤여정
모니카(한예리)의 엄마이자 아이들의 할머니 순자 역을 맡았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제 와서 영화를 고를 때 시나리오가 선택의 기준이 되진 않는다. 내겐 함께 작업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처음 리 아이작 정 감독을 만났을 때 정말 마음에 들었다. 물론 남자로서가 아니고.(웃음) 사람이 순수하고 진지하다. 요즘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한국 영화, 특히 김기영 감독 영화도 잘 알고 있고.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너무 사실적이라 이게 진짜 있었던 일인지 물었고 역시나 그렇다고 하더라. 이후 감독에게 딱 하나만 물었다. 너네 할머니랑 똑같이 해야 하냐고. 리 아이작 정 감독은 내가 마음껏 창조해도 된다고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더욱 책임감을 느끼고 캐릭터에 집중했다. 참 영리한 사람이다. 사실 전형적인 할머니나 엄마만큼은 연기하고 싶지 않다. 내가 평생 노력해온 게 그런 전형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었다.
요즘 북미 언론에서 <미나리>로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오를 것이라는 예측을 해서 곤란하다. 식당에 갔을 때 뜬금없이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오르셨다면서요’라고 축하해줘서 그때 알았는데, 분명히 말해두지만 ‘아니다’. 후보가 아니라 후보 예측이다. 다만 미들버그영화제에서 배우조합상인 앙상블 어워드를 받은 것만큼은 순수하게 기뻤다. 정말 팀워크로 만든 영화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진출이 어쩌고 하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어렵게 찍었다. 대사 다듬는 것부터 하다못해 밥짓는 것까지 현장에 찾아온 지인들이 그대로 눌러앉아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엔딩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을, 기꺼이 비료가 되어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영화다. 아마 한국인이라는 유대감 덕분에 가능했던 일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