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이면 오손도손 그리운 것들 모아서 노랠 지어 부르겠지’, ‘잊혀질까 두려워 곁을 맴도는 십이월의 아름다운 이 밤을 기억해주세요.’ 장우진 감독은 지난 11월 발표된 잔나비의 신곡 <가을밤에 한 생각> 가사 중 ‘밤’을 ‘겨울밤’으로, ‘시월’을 ‘십이월’로 개사해 영화제 공개 후 2년 만에 개봉을 앞둔 <겨울밤에>를 소개하는 편지를 대신했다. 한달 전 우연히 이 노래를 듣고 “영화처럼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과거 감성”을 느꼈다는 그와 2년 전 <겨울밤에> 만든 영화를 꺼내보며 긴 대화를 나눴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겨울이라는 키워드가 영화의 제목뿐 아니라 이야기의 시공을 지배한다. 왜 겨울을 택했나.
=춘천의 사계절 시리즈를 만들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이 있는데, 촬영을 할 수 있는 시기로 겨울이 먼저 찾아왔다. 겨울엔 여행을 가도 바깥을 돌아다니기보다 실내에서 쉬는 식이지 않나. 나도 겨울에 청평사를 가본 경험이 많지 않은데, 촬영 전에 끝까지 올라가보니 폭포가 얼어붙어 있고 밤에는 칠흑 같더라. 이 인상적인 풍경 속에 둘 사이가 얼어붙은 것만 같은 중년 부부를 두면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더불어 사람들은 평소에 안 하던 생각을 밤에, 그것도 미래보다 과거에 대해 더 많이 한다. 부부가 30년만에 찾은 숙소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을 때, 그게 겨울밤이어야 가장 잘 어울릴 거라고 봤다.
-연출 의도에 적혀 있듯, 부부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는 여행”을 한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내게 무척 영화같다. 스토리가 시작되는 소재 같다고나 할까. <겨울밤에>에서는 그 단초가 휴대폰이지만 <심우도>(잃어버린 소를 찾는 동자의 여정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10단계로 표현한 선화(禪畵).-편집자)에선 그것이 소다. 그렇게 시작은 되지만 그것들은 결국 어떤 관념적인 분실물로 가닿는다. 그 정체가 <겨울밤에>의 소재가 되었다.
-<심우도>는 단순한 레퍼런스를 넘어 플롯을 구분하는 표지처럼 쓰이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에 쓰인 네장의 그림이 매 챕터의 뒤표지이자 에필로그인 셈이다. <심우도>를 적극적으로 참고해 4부 구성을 만든건데, 그림의 단순한 스토리를 남편 흥주(양흥주)와 아내 은주(서영화)의 이야기로 작정하고 바꿨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을 하는 과정에서도 영화가 그림처럼 가고 있는지 계속해서 점검했다.
-말하자면 1부에서 부부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고, 2, 3부에서 남편과 아내가 각자 그 무언가를 찾아나서고, 4부에서 돌아와 다시 서로를 마주한다. 이때 1, 4부와 2, 3부의 질감이 많이 다르다. 1, 4부의 현실이 2, 3부의 비현실을 감싸고 있다고 느꼈다.
=2, 3부는 무의식에 가까운 상상이 맞다. 말이 안돼도 좋으니 시간과 공간 모두를 과감하게 사용하자고 결정했다. 인물마저도 현재의 환영인지 과거의 기억인지 명쾌히 드러내기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새 출발> 때부터 고수해온,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물리적인 시간순으로 찍어나가는 방식도 <겨울밤에>의 2, 3부를 찍을 때만큼은 피했다.
-그 안에서 프레임과 동선은 철저한 계산을 거쳐 찍은 것처럼 보였다.
=차이와 반복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주 다른 그림 두개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만 비슷한 그림이 두개 있으면 멈춰 서서 관찰과 사유를 할 수 있다.
-그 ‘두개의 그림’으로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이 1부에 등장하는 CCTV화면이다. 첫 화면에 젊은 커플(우지현, 이상희)이 나오는데, 이후 ‘빨리감기’와 ‘일시정지’를 거쳐 이들이 떠난 자리에 새로 온 은주와 흥주를 보여준다.
=이 영화가 시간을 가지고 놀 것이라고, 혹은 시간을 넘나들 것이라고 관객에게 선보이는 애피타이저 같은 신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묘하게 겹치고 엇갈리고 있다는 감각을 건드려줘야 할 것 같았다.
-1부 중반부에 등장하는 그림자도 이야기하고 싶다. 잠시 엇갈렸다 재회한 은주와 흥주가 부부 사이에서 꽤나 오랜만에 나눌 법한 대화를 주고받는데, 이들이 들어와 있는 천막 뒤로 다른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친다. 젊은 커플의 그림자인가.
=그렇다. 마그리트나 달리의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보였으면 했다. 삐걱대고 어색한 부부 뒤로 어쩌면 이들의 과거일지도 모를 싱그러운 젊음의 순간이 비쳤으면 했다.
-그림 같은 공간을 만나는 것도 <겨울밤에>의 재미 중 하나다. 2, 3부의 명암과 색채가 특히 눈에 띄었다.
=전작에서는 인공적인 요소를 가미하지 않고 자연광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했다면 <겨울밤에>는 기획 자체가 판타지였고, 상대적인 시간성을 따라 무의식에 닿게 되니 시각적으로도 더 가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청평사라는 공간이 밤에 하도 어둡다보니 인공적인 조명이 필요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채워넣지 않으면 검정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흑색 캔버스가 주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촬영감독과 빛의 삼원색을 써보자는 얘기를 나눴고 매 장면 조명 세팅에만 두 시간 이상이 걸렸다. 촬영 중반쯤 되니 촬영감독과 조명팀이 휴차 때도 열심히 전구를 달면서 더 욕심을 내더라. (웃음)
-분홍빛과 푸른빛이 어우러지는 게 아름답고도 오묘한데, 혹시 인물마다 색을 부여한 건가.
=그렇다. 빛의 삼원색 중 파란색은 그나마 사실적인 색이라 보고 배경색처럼 사용했고, 빨강과 초록을 각각 은주와 흥주에게 나눠주었다.
-표면적으로는 은주가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으러 가는 것이 도입이지만, 흥주도 장갑을 잃어버리고 아내를 잠시 놓친다. 그런데 ‘분실물’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무척 다르다.
=은주는 자신이 무얼 잃어버렸는지 알고 있다. 흥주는 분명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그걸 관객도, 나중엔 은주도 알게 되지만 본인만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좀더 분명히 밝히자면, 나는 이 두 사람이 2, 3부 내내 방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봤다.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누든, 잠을 설치든, 머릿속에서만 계속 떠돌아다니는 거다. 이때 흥주는 엉뚱한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거고 은주는 그런 흥주를 찾아다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2, 3부를 디자인했다.
-그래서인지 젊은 커플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도 상반된다. 은주는 직접적으로 젊은 커플을 대면해 관계를 맺은 후 정중히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반면 흥주는 젊은 커플을 보는데 다가서지 못한다.
=흥주는 창문 너머로 젊은 여자의 이미지를 보지만 조명이 꺼지는 순간 유리에 비친 자기를 보고 헛구역질을 한다. 이후 시작되는 은주의 여정에서 은주는 젊은 여자(이상희)와 대화하며 과거의 자신과 조우하는데, 그제야 자신이 진짜로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감지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은주는 이 밤을 통해서 우리 관계에서 내가 잃어버린 게 뭔지 확실히 깨닫는 여행을 했다면 흥주는 끝까지 잘 모르겠는 상태로 굳어지는 것만 같다.
-시나리오를 벗어나는 즉흥성을 연출에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편인데, 이번 영화에서 또 새롭게 시도한 것이 있나.
=시나리오를 지도 삼아 계획대로 디테일을 이뤄가는 것과 그날그날의 즉흥성을 따라 영화를 찍는 것이 각각 다른 재미를 주는 것 같다. 이번에는 그날 고른 오케이 컷을 안 바꾸고, 하루하루 가편집본을 쌓아가 보는 시도를 했다. 마지막 촬영 다음날, 스탭들에게 두 시간짜리 가편집본을 바로 보여줬다. 이후 피드백을 받고 2주 만에 바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틀었다. 최종적으로 세컷을 빼고 신의 길이를 줄이는 식의 변화는 있었지만, 이런 식의 영화 만들기도 재밌더라.
-촬영 전 한달간 서영화, 양흥주 배우와 자주 만나 영화 속 흥주, 은주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고 들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
=배우들 그리고 캐릭터들의 대학 시절 얘기를 했다. 나는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생들의 블로그를 찾아 그들의 동아리 생활이나 당시에 좋아했던 노래 등의 정보를 찾아냈다. 그 시절의 대학 생활에 대한 정보를 많이 공유했고, 이걸 토대로 젊은 커플을 연기한 이상희, 우지현 배우에게 디렉션이 들어갔다.
-양흥주 배우와 <새 출발> <춘천, 춘천>에 이어 세 번째 만남이다. 감독에게 그는 어떤 배우인가.
=<새 출발>에 비중 있는 단역으로 나오면서 관계가 시작됐는데, 연기를 너무나 유연하게 잘하는 배우다. 둘 다 춘천에 살고, 알고 보니 꽤 가까운 거리에서 살았다는 걸 알게 되어 지금은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서로의 일상과 고민에 대해 가깝게 알고 있어서 양흥주라는 사람 자체가 내게 어떤 캐릭터 같다. 그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을 때도 있다.
-서영화 배우와는 처음 작업했다. 어떤 이미지로부터 그를 은주로 데려왔나.
=대학 시절에 본 <흡연모녀>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천천히, 나긋나긋 말하는 특유의 목소리와 말투, 표정이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장편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적은 없는 것 같아 미친 척하고 연락을 드렸다. 최근에는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꾸준히 출연해오셨는데, <겨울밤에>에서는 그때와는 다른 연기적 경험을 할 수 있겠다며 함께해주셨다. 좋은 의미에서 엄청나게 치열한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며 토론했다. 많이 익숙해져버린 양흥주 배우와의 관계에서와는 또 다른 식의 소통 방법을 경험하며 많은 걸 배웠다.
-잠깐 등장하는 해란 역의 김선영 배우, 스님 역의 박명훈 배우도 좋은 연기를 펼쳤다.
=김선영 배우와 해란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선영 선배는 이것이 흥주의 욕망인 것 같다고 봤고, 나는 그것마저도 계속 엇갈리고 틀어지는 지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잘 받아주는 것 같다가도 “여자 비명이 들리지 않느냐”고 물으며 튀어나가는 지점을 살려줬으면 했다. 선영 선배가 흥주 선배를 리드해서 장면이 잘 완성됐다. 박명훈 배우는 한 장면 나오는데 머리를 다 밀고 왔다. 겨울이니 모자를 써도 됐었는데. (웃음) 그 모습으로 처음 만난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스님 톤으로 “스님이면 머리를 깎아야지요”라고 얘기하는데, 진짜 스님을 만난 것만 같은 홀리함을 느꼈다. (웃음)
-2018년에 처음 공개한 영화가 이제 개봉한다. 그간 이 영화의 의미가 어떤 식으로 자리 잡았을지 궁금하다.
=늘 다음 작품을 바로바로 생각하려는 강박이 있어서 잊은 지 좀 된 작품이었다. 영화처럼 옛날 추억을 다시 꺼내보고 재경험하는 느낌이다. <겨울밤에>를 함께한 멤버들에게 새로운 추억거리가 만들어지는 중인 것 같다. 코로나19 때문에 다 같이 모여 식사하기 어렵다는 게 너무나 아쉽다.
-강박적으로 다음 작업을 생각한다니, 어떤 차기작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으로 양흥주 배우와 춘천에서 단편을 하나 찍었는데, 그걸 장편으로 발전시켜보려고 계속 구상 중이다. 춘천의 미군기지인 ‘캠프 페이지’라는 곳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영화가 될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자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내 필모그래피에서도 독특한 위치에 놓인 영화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전에 관객이 <겨울밤에>를 어떻게 봐주면 좋겠나.
=영화가 다루는 정서는 쓸쓸할 수 있지만 이 영화가 주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체험 자체는 스펙터클한 영화와 다르지 않다. 가뜩이나 여행 가기 어려운 시기이자 계절인데, 이 영화를 통해서 대리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