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영화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사망잔데요, 사망은 안 했어요
2021-01-19
글 : 송경원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의 마지막 자막에 ‘주연: 딕 존슨 1932~’라고 쓴 이유

2021년 첫 영화로 무엇을 말할까 고심하다가 뒤늦게 이 영화를 만났다. 극장이 비어가는 가운데 변화하는 플랫폼 환경에서 발견한 작은 희망이다. <스위트홈>을 비롯한 화제의 시리즈도 재미있게 봤고 이에 대한 할 말도 많지만 아무래도 2021년의 첫 시작은 이걸로 하고 싶다. 그러니까 하고픈 말은, (어쩌면 이미) 죽었지만 (아직, 아니 영원히) 죽지 않았습니다.

사망잔데요, 사망은 안 했어요

우리는 마치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 아니다. 이 글을 읽을 당신의 상황이 어떤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니 ‘나는’이라고 수정해야겠다. 죽음은 지위 고하, 삶의 형태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찾아오는 거의 유일한 자연의 섭리이지만 동시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개인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내게 죽음은 막연한 공포였다. 죽고 난 뒤 모든 게 끝날 수도 있는데 어떻게 맨정신으로 살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한번 잠이 들면 다시 깨지 못할 것 같아 불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건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감각으로부터 멀어져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죽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건 어쩌면 그래야 오늘을 버티고 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망각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시계를 움직이게 하는 축복이다.

하지만 종종 지나치게 무뎌지는 감각에 삶이 희미해질 때가 있다. 현재를 온전히 인식하기 위해선 끝이 필요한데 영원히 죽음과 무관한 듯 도망치며 살 순 없다. 모든 시작과 끝을 마주할 때마다 죽음의 자락을 느낀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영화의 시작과 끝, 심지어 매일 아침 눈뜨고 일어날 때마다 죽었다가 부활하는 기분(물론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순 없으나)에 휩싸이곤 한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를 보고 문득 잊고 있던 숙제를 꺼내든 기분이었다. 아무도 죽음을 직접 경험한 뒤 설명하지 못한다. 허락된 것은 오직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일이다. 죽음은 여전히 빈칸의 영역이고 죽음과 관련된 대부분의 세리머니는 산 사람,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 사람, 그것도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미리 재현해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죽음과 이별을 위한 예방주사

다큐멘터리 감독 커스틴 존슨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아버지 딕 존슨에 대한 영화를 찍기로 결심한다. 시애틀에서 정신과 의사로 수십년간 일했던 아버지는 7년 전 알츠하이머로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했다. 자신이 같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딕의 가장 큰 걱정은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하는 점이었다. 아마도 아내를 통해 알츠하이머 환자의 미래를 익히 겪어봤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올 걱정이었을 것이다. 이에 커스틴 존슨 감독은 아버지에게 가상의 죽음을 재현하는 영화에 출연해줄 것을 제안한다. 이후 밝혀지지만 커스틴 존슨은 평생을 다큐멘터리 촬영감독으로 일했으나 정작 어머니에 관련된 영상은 알츠하이머를 앓았을 때의 짧은 기록밖에 없다고 아쉬워한다. 그 부분도 아버지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딕 존슨이 86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몇년간의 시간을 담은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기록과 상상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죽음을 간접 체험케 한다. 딕 존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게 정리 가능하다. “쟤가 날 몇번이나 죽여요. 나는 계속 되살아나고요. <사랑의 블랙홀>처럼.” 감독은 아버지가 죽을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재현하고 안식교도인 아버지가 천국에 머무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다. 심지어 딕 존슨은 자신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는 모습까지 가짜로 연출해 찍어본다. 이건 영화니까 뭐든 가능하다. 한편으론 아버지 친구 레이의 말처럼 이 영화를 찍는 게 완전히 가상은 아니다.

“누구나 죽으니까. 나는 이게 어느 정도는 현실이라고 생각해.” 바로 이 지점이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체험을 보편적인 통찰로 연결시키고 모두의 이야기로 번져나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실제 죽음을 앞두고 있는 남자가 가상으로 체험해보는 갖가지 죽음의 상황과 천국 이미지는 우리가 외면해왔던 죽음의 여러 얼굴을 간접 체험하는 일종의 심리 치료, 사이코 드라마에 가깝다. 딕 존슨이란 인물 특유의 긍정과 유쾌함에 힘입은 바 크지만 영화는 여러 겹으로 죽음에의 공포와 이별의 슬픔과 아픔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예정된 죽음을 미리 축복한다.

현실과 이야기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시작과 끝의 유무다. 현실을 살고 있는 도중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삶은 계속되고 시간은 자를 수 없다. 그것을 이야기로 포장하여 관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시작점과 끝점의 설정이다. 한사람의 전기는 죽음 이후, 즉 끝이 정해져야만 성립 가능하다. 커스틴 존슨 감독은 이 명제를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수행하기 위해 아버지를 미리, 다양한 방식으로 죽인다. 시간을 잘라내어 이야기의 형태를 완성하는 것이라 해도 좋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영화가 딕 존슨이 죽었다는 상황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딕 존슨의 죽음을 여러 방식으로 극화하지만 실제로 공을 들이고 보여주는 건 커튼 뒤의 풍경, 그러니까 희극의 제작 과정이다.

드라마의 순간들은 아주 짧고 유머러스하다. 딕 존슨은 길을 가다 에어컨 실외기에 맞고 쓰러진다. 그리고 함께 뜨는 타이틀, ‘Dick Johnson is Dead’. 잠시 뒤 스탭들이 달려와 바닥에 쓰러진 딕 존슨을 일으켜 세운다. 다음 장면에선 아내가 계단을 내려가다가 굴러서 엉덩이를 다쳤던 일화에 대해 딸과 이야기를 나누던 딕은 자신은 난간을 붙잡고 내려가겠다고 말한다. 그러곤 바로 계단에서 굴러 쓰러진다. 아마도 딕의 뇌리에서 진행되는 천국의 이미지가 잠깐 이어진 후 계단 밑 딕의 머리맡에 피가 흥건히 번지는가 싶더니 딸이 말한다. “한쪽 팔을 벽쪽으로 놓으세요. 벽에 가깝게 이상한 자세로.” 그러자 어색하게 팔을 움직여 보는 딕 존슨. “준비됐죠? 자, 액션!”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희극의 제작 과정이다. 준비 과정에서 오가는 딸과 아버지의 대화에는 지나간 기억들,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내레이션을 거쳐 스며들어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극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들며 진심을 전한다. 무릇 진실은 커튼 뒤, 막간에 깃드는 법이다. 소위 모던 영화들은 이야기의 중력에서 해방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환상과 현실을 겹쳐두는 방식으로 관객과의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에서는 정확히 그 역할을 다큐멘터리적인 촬영, 영화 제작 과정과 연출적 장치들을 노출시킴으로써 수행한다. 훨씬 더 강력하고 애잔한 형태로.

영화가 기록을 기억하는 방식

커스틴 존슨이 아버지와의 시간을 영화로 남기려고 했던 욕망은 어쩌면 긴 장례 절차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반드시 닥칠,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실히 찾아올 이별을 위한 예행연습이자 예방주사인 셈이다. 그렇다면 딕 존슨의 입장은 어떨까. 영화 초반 딕 존슨은 아이들과 장난치다 넘어지자 이거 찍었냐고 확인하면서 말한다. 언젠가 꼭 영화에 출연해보고 싶었다고. 일말의 진심이 있겠지만 그것만으론 자신의 죽음을 계속 확인하는, 어쩌면 제법 불편할 법도 한 이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는 이유로는 부족해 보인다.

딕 존슨은 기억이 점차 사라지며 고향인 시애틀을 떠나 뉴욕에서 딸과 함께 살기로 한다. 이때 정든 집을 떠나며 아쉬워하던 딕을 딸이 위로하자 딕은 괜찮다는 듯 말한다. “너랑 하루라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이 집이랑 바꾸겠어. 의심의 여지 없지.” 이 한마디에서 딕이 영화를 찍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집이라는 형태의 기록과 장소보다 딸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기억을 선택한 것이다. 동시에 이 장면이 의미심장한 것은 말과는 또 다른 딕의 표정과 행동이다. 딕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주변을 애잔하게 둘러본다. 괜찮다는 딕의 말도 아쉬워하는 딕의 행동도 모두 의심의 여지 없다.

우리는 여기서 기록과 기억의 관계에 대해 질문해볼 수 있다. 기록이라면 두 가지 명제는 충돌한다. 때문에 논리적인 오류를 지우기 위해서 시간의 인과관계로 정리할 것이다.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딸을 위해 선택을 했고 괜찮아졌다는 식으로. 흔히 기록은 물리적인 형태를 띠고 있어 정확하고 진실에 가까우며 기억은 주관적인 해석이 끼어 있어 불분명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 보낸 몇년간을 기록한 영화가 아니라 아버지와 딸의 시간을 기억하는 영화다. 기록이 불변하는 석판 위에 새겨진 것(혹은 새기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기억은 시간 속에서 그물망을 짜는 관계에 가깝다. 나의 상태와 감정에 따라,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형태가 고정되지 않고 상황에 반응한다. 어떤 의미에서 기억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현재 나의 상태,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한 현재적 반영에 가깝다. 영화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지만 이 영화를 보며 새삼스레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영화는 카메라의 기록을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이 영화에서 가상의 죽음, 가상 장례식 등의 극적인 장면은 결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계속 죽음을 맞이하는 딕 존슨을 통해 죽음과 삶의 위치를 뒤바꾼 것처럼 영화 역시 결과와 수단을 뒤바꾸는 셈이다. 커스틴 존슨 감독은 이를 부각하기 위해, 혹은 그럼에도 혼란스럽지 않게 구분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활용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이다. 커스틴 존슨 감독은 아버지와 보낸 몇년간의 시간을 절묘하게 뒤섞는다. 정확히는 인과를 역전시키거나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보다는 시간의 농도를 조절한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이 영화에는 세 가지 속도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천국의 속도다. 안식교도인 딕 존슨이 언젠가 가게 될 천국의 이미지는 축제처럼 신나고 화사하게 꾸며져 있다. 술과 춤, 영화를 금지하는 엄격한 교리를 가진 안식교도지만 딕은 커스틴이 11살 때 아이들과 함께 <영 프랑켄슈타인>(1974)을 보러 가기도 했다. 그런 만큼 천국의 이미지는 여러 인물들이 나와 춤을 즐기는 장면으로 묘사되는데, 죽음의 순간을 극화하기 전 종종 앞자리에 삽입되는 천국의 시간은 슬로모션으로 찍혀 있다.

한편 차츰 기억을 잃어가는 딕 존슨의 시간은 종종 빠르게 흘러간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점점 빠르게 느껴지는 것은 기억할 만한 사건, 점들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자극들이 점차 줄어들고 일상의 반복 속에 묻힐 때 삶의 압도적인 시간들은 대부분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는 존재했더라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뉴욕으로 이사 온 지 1년 뒤 딕 존슨의 기억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주변에 짐이 될까 걱정하는 딕 존슨의 심정은 뉴욕 한복판에서 자신을 두고 빠르게 지나가는 지하철의 속도로 압축된다. 딕 존슨은 핼러윈 축제에서 기억을 잃고 길을 잃기도 하는데 뉴욕에서의 커스틴 존슨은 이 부분을 통째로 지우거나 빠르게 흘려보낸다. 어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어떤 시간은 쏜살같이 나를 통과해 지나갈 때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딸과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현재를 자아낸다. 이 영화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딸과 아버지가 함께 죽음을 상상하며 놀았던 기억들의 재구성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이야기는 과거이되 과거가 아니라 끊임없는 현재로 되살아난다. 스크린에 불이 꺼지면 생을 마감했다가 다시 상영될 때마다 부활하는 영화처럼 말이다.

죽음과 부활 속에서 이어지는 영화, 그리고 인생

남겨진 사람들은 딕 존슨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 것인가. 커스틴 존슨은 두 가지 사물에 빗대어 표현한다. 하나는 초콜릿 케이크다. 딕 존슨에게 천국은 아마도 초콜릿 케이크로 기억될 것 같다. 한꺼번에 많이 먹고 심장마비까지 왔다는 에피소드를 주절거리면서도 초콜릿만 보면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손주들이 86살 생일에 직접 만들어준 초콜릿 케이크 앞에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고백한다. 다른 하나는 발이다. 이 영화는 유독 발의 클로즈업이 잦은데 발가락 모양이 이상하게 생긴 건 딕 존슨의 오랜 콤플렉스이기도 하다. 딸은 세트로 꾸며진 천국에서 직접 예쁘고 곧게 뻗은 발가락 이미지를 아버지에게 선물한다. 가장 사랑하는 것과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 두 가지 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벌어진 소소한 사건들 사이에 딕 존슨의 인생이 맺혀 있다.

물론 중요한 건 초콜릿과 발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찍느냐다. 감독은 딕 존슨의 가장 해맑고 행복한 표정을 보여주기 위해 초콜릿을 골랐을 것이다. 딕 존슨 자신은 평생 보여주려 하지 않았지만 딸은 부지런히 발의 이미지들을 담는다. 알츠하이머로 힘들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새길 때나 심장마비가 온 상황 등 감정적으로 도저히 무언가를 보여줄 수 없을 땐 항상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고 발을 찍는다. 발은 아버지의 또 다른 얼굴이자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많은 세월을 담아낸다. 딕 존슨이 그토록 사랑했던 발받침 의자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발받침 의자에 발을 올려두고 초콜릿을 먹고 싶어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영화가 담아낸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카메라를 든 딸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결과물이다. 아버지를 향한 딸의 감정은 오프닝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아버지가 건물에서 떨어진 물건을 머리에 맞고 바닥에 드러누운 장면을 연출할 때 딕 존슨이 일어나고 난 자리 머리맡엔 폭신한 옷이 깔려 있다. 사실적인 재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잠시 땅바닥에 누운 아버지가 덜 불편하길 바라는 마음.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의 카메라는 내내 그 자리를 고수한다.

같은 맥락으로 핼러윈 축제 중 잠깐 길을 잃었던 에피소드를 그려낸 장면은 현실과 환상, 기억을 서로 다른 시간의 농도로 모두 한축으로 겹쳐낸 놀라운 순간을 자아낸다. 핼러윈 분장을 하고 있는 아버지와 딸은 연극 무대 위에서 만난다. 마치 고전영화 같은 자막이 깔리고 문틈 사이로 천국의 이미지가 보이는데 막상 문을 열어보면 거기엔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가는 것으로 추측되는 병원의 풍경이 이어진다. 기억을 잃어가는 딕 존슨의 심리를 투영해 지어진 세트는 기괴하고 애잔하다. 무대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딕 존슨은 (자막으로) 묻는다. ‘이것도 영화인가?’ 기록과 기억, 삶과 영화가 겹치는 놀라운, 그래서 더없이 안타까운 순간의 재현. 감독은 “어떡하니, 우리 딸. 아빠가 만신창이가 됐구나”라고 말하는 아빠의 얼굴과 표정을 감히 정확히 잡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잠기도록 내버려둔다.

2019년 6월 23일, 영화는 심정지가 온 딕 존슨이 사망한 것처럼 그린다. 장면은 응급차에서 딕의 장례식장으로 이어지는데 당연히 사람들은 마침내 그날이 닥쳐왔다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한 차례 (유일하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트릭을 쓴다. 실은 이 장면은 전반부에서부터 준비했던 3년 전의 가상 장례식장이다. 딕 존슨은 자신의 지인들이 모인 자신의 장례식을 관찰 중이다. 그리하여 딕은 영화를 통해 부활한다. 옷장 속에서 커스틴 존슨은 영화 내내 깔리던 내레이션을 읽고 있다. “내가 아는 건 딕 존슨이 죽었다는 거다”는 말을 세 차례 반복한 감독은 이윽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꺼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원하라, 딕 존슨’이다.” 녹음을 마치고 방을 나서면 아버지가 딸을 반기고 있다.

논리적인 기록으로 따지면 이 장면 역시 아버지가 죽기 전 미리 찍어 놓은 것일 테다. 하지만 그냥 다시 아빠와 만났다, 딕 존슨은 죽지 않고 영원히 곁에 함께 있다고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왜냐하면 영화는 그럴 수 있다. 그게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환상, 다 알면서 기꺼이 속는 하얀 거짓말이다. 마치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 것 마냥 오늘을 사는 우리처럼. 삶과 영화는 그렇게 서로 뒤섞이며 오늘의 기억이 되어 당신 앞에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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