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이나 피부과에서 꼼짝없이 누워 장시간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 복병은 음악이다. 비틀스의 <Yesterday>를 가야금으로 연주한 버전이나,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가슴 아파도>를 피아노 솔로로 편곡한 음악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좋은 의도- 익숙한 팝이나 가요를 어렵게 느껴지던 고전 악기로 편곡하여 두 장르의 화합을 도모하고 확장된 음악적 경험을 선사하겠다- 가 아름다운 결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재차 깨닫곤 한다.
애초에 대중음악은 클래식과 박자의 강세부터 다를뿐더러 가창곡의 경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감정이나 리듬감에 의해 음의 길이나 음악적 뉘앙스가 크게 바뀌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미묘하면서도 결정적인 요소가 편곡과 연주를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기보 단계에서 제거되기 십상이다. 마치 영어 가사를 한글로 받아 적어 읽을 때 유실되는 발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악기의 특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인데, 피아노로 편곡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오로지 단선의 멜로디만 연주하게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청자 입장에서는 앙상해진 사운드에 힘이 빠지는 것은 물론 ‘이럴 거면 굳이 왜 피아노로?’라는 의문을 갖기 마련이다.
비타민 스트링 콰르텟(Vitamin String Quartet)이 참여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브리저튼>의 사운드트랙 안에 해법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 1991년 LA에서 결성된 이래 편곡가와 연주자를 바꿔가며 300장 이상의 대중음악-클래식 크로스오버 앨범을 발표한 이 악단은 능숙한 솜씨로 빌리 아일리시의 <Bad Guy>, 아리아나 그란데의 <Thank U, Next>를 1800년대 초반 영국 사교계라는 배경에 어울리게 바꾸어놓았다. 원곡의 선율에 매이지 않을 때 세련된 편곡이 가능하다는 것, 핵심이 되는 특징을 꿰뚫어 악기 고유의 주법으로 표현해야 새로운 버전으로서의 매력을 갖게 된다는 것 등이 그 힌트가 되겠다.
PLAYLIST+ +
크리스 바워스 《Bridgerton》
<브리저튼>의 또 다른 사운드트랙 앨범. <그린북>의 음악을 담당하며 이름을 알린 크리스 바워스가 영화를 위한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곡했다. 삽입곡들이 대체로 4중주 규모의 작은 편성이라면, 이 음반에는 보다 역동적이고 규모가 큰 스트링 오케스트라 음악들이 담겨 있다.
피터 그렉슨 《Bach: The Cello Suites-Recomposed by Peter Gregson》
최신 팝을 현악4중주로 편곡한 음악, 크리스 바워스의 오리지널 스코어, 하이든과 모차르트 등 당대에 연주되었던 클래식 음악과 더불어 이 드라마에는 현대에 새롭게 탄생한 바로크 음악도 비중 있게 등장한다. 막스 리히터의 《Recomposed by Max Richter: Vivaldi’s Four Seasons》와 더불어 피터 그렉슨의 이 앨범 역시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에서 신선한 자극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