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부당하게 하청 업체에 파견된 정은(유다인)이 영화의 감정과 이야기를 끌고 가는 영화다. 오정세가 연기하는 막내는 정은의 하청 업체 동료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은이 서서히 의지하게 되는 대상이다. 크게 감정을 드러내는 법 없이 묵묵히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막내의 모습은 오정세의 단단한 내공 덕에 쉽게 지워지지 않을 인상을 남긴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스토브리그>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완벽한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준 그는 이번 영화에서도 왜 신뢰할 수밖에 없는 배우인지를 증명한다.
-배우 오정세의 존재감이 만개하고 있다. 지난해엔 상도 많이 받았는데,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배우상도 수상했다.
=아직도 상을 받고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럼에도 2020년은 과분한 사랑을 받은 해였고, 그 사랑을 한꺼번에 다 받으면 체할 것 같아서 조금 아껴뒀다가 언젠가 사람들에게 잊히고 혼나고 아파할 때 조금씩 꺼내 먹어야지 생각하고 있다.
-오랜만의 독립장편영화인데,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먼저 유다인 배우가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후 내게 막내라는 인물로 노크를 해주었다. 주위에 나보다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성실하게 일한 만큼 대우받지 못한 경우를 많이 봤다. 영화의 막내가 그런 느낌의 인물이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내 주위 선한 사람들에 대한 작은 응원으로 접근했고, 그런 메시지가 영화를 통해 작게나마 전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
-정은의 하청 업체 동료인 막내는 정은의 감정에 조용히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테두리 안에서 최선을 다해 착실히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막내라는 인물의 중심을 잡았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건 부수적인 거라 생각했다. 막내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주변 환경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은의 상황이 막내에게 피해를 주고 불편함을 주니까 정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던 것 같다. 조금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처음부터 정은을 도와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기보다 막내에게 내재되어 있던 선함이 차츰차츰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정은 역시 열심히 살아보려 애쓰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고, 거기서 막내는 교집합을 보지 않았을까. 막내 입장에선 또 다른 막내를 본 느낌일 수도 있다.
-막내의 대사 중에 “우리가 무서운 건 (죽음이 아니라) 해고예요”가 있다. 이 말의 의미를 곱씹어봤을 것 같다.
=송전탑 회사에서 자리를 잃으면 막내에겐 ‘아르바이트’가 하나의 직업이 된다. 그랬을 때 막내가 가지는 공포는 죽음과 비슷할 것 같았다. 해고가 죽음보다 무섭다는 말을 할 때의 막내는 이미 불안을 초월한 느낌의 정서이기도 했다. 해고의 경험이 반복적으로 쌓여서, 어딘가에서 해고를 당하면 또다시 취직하고 새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인물.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마음 한구석 깊이 깔려 있기 때문에 열심히 살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을 거다.
-이태겸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오정세 배우는 데카르트다. 데카르트가 참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동원했듯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고 토론했다.”
=데카르트는 잘 모르지만, ‘칭찬해주셨구나’ 생각하고 있다. (웃음) 어느 순간부터 내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는 게 건강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시나리오를 보고 아이디어가 10개 떠오르면 스스로 검열해서 8개는 없애고 2개 중에 1개만 용기내서 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버려지는 아이디어들이 아깝더라. 그래서 생각나는 것들은 사전에 감독님과 공유하고 의견을 좁혀나갔다.
-연기를 잘할 자신은 없었지만 오래할 자신은 있었다는 이야기도 한 적 있는데, 지금은 배우 오정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으니 롱런뿐 아니라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커지지 않았을까 싶은데.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 있는데 그런 생각에 갇히고 싶지는 않다. 관심을 받고 있으니 다음 작품에선 더 잘해야지 해서 힘을 주면 그게 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전에도 가졌던 ‘잘해야지’라는 마음, 그 정도의 마음을 잘 가져가려 한다. 계속 성장하는 배우면 지치고 힘들 것 같다. 성장도 했다가 정체도 했다가 욕도 먹었다가 그렇게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멘탈은 강한 편인가.
=멘탈은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신체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예전에 편한 마음으로 미디어데이 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토했다. 전혀 스트레스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피곤했었나보다. 한번은 한석규 선배랑 같이 담배를 피운 적 있는데 그때도 집에 와서 토했다. “네가 정세냐?” “네.” “담배 피우냐?” “네.” 너무 좋은 담배 타임이었는데…. (웃음)
-이응복 감독, 김은희 작가의 드라마 <지리산>을 촬영 중이다.
=지리산의 레인저 중 한명으로 출연한다. 이응복 감독, 김은희 작가와는 첫 작업인데, 열려 있고 깨어 있는 분들이라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