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만 휘두르는데 불이 나가고 폭발을 한다고? 아니 이게 이 정도로 대단한 작품인가?” <귀멸의 칼날>(이하 <귀멸>)의 열풍을 실감할 수 있는 건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호응이 아니다. 평소엔 애니메이션을 즐겨보지 않는 이들의 볼멘소리야말로 진정한 성공의 척도다. 일본 커뮤니티의 몇몇 관람후기에는 <귀멸>을 본 뒤 악평을 남기는 이들에 대해 오랜 팬들의 성토 글이 종종 올라온다. 팬들은 이들이 <귀멸>을 제대로 모르면서 함부로 말한다고 분노한다. 평소엔 이런 종류의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을 사람들에게까지 번져나간 기세를 통해 알 수 있듯 <귀멸>은 한편의 콘텐츠를 넘어 일종의 문화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속사정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팬의 시선보다는 덩달아 유행에 동참한 이들의 불만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귀멸의 칼날>의 매력
<귀멸>은 다이쇼 시대(1912~26년)를 배경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혈귀와 이를 물리치고자 하는 검사집단 귀살대의 대결을 그린 만화다. 설정은 전형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무난하다. 어두운 밤, ‘무잔’이라 불리는 최초의 혈귀로부터 시작된 오니(鬼)가 거리를 활보한다. 인육을 먹는 오니는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들의 목을 베거나 햇빛에 쏘여야만 없앨 수 있다. 어느 날 산속에서 숯을 만들며 가족과 오붓하게 살고 있던 소년 탄지로는 혈귀의 습격으로 가족을 모두 잃는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동생 네즈코는 피에 감염되어 혈귀가 되었지만 어느 정도 의식이 남아 있다. 탄지로는 동생을 보호하며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기 위해 귀살대의 일원이 되어 혈귀를 물리치는 여정에 오른다.
뱀파이어, 좀비 등 괴기물 설정과 사무라이 활극을 결합한 <귀멸>은 소년 탄지로의 성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캐릭터와 볼거리를 펼쳐놓는다. 캐릭터는 소년 만화의 왕도를 걷고 전개 역시 교과서적이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그야말로 바르고 올바르다. 귀살대원끼리 유대를 형성하는 과정, 타인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맑고 순수하며 심지어 악역인 혈귀들마저 알고보면 단지 악이 아니라 각자의 사연이 있어 드라마를 풍성하게 만든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소년 탄지로의 곧고 맑은 눈동자처럼 인간적인 메시지와 달리 정작 쾌감의 핵심은 썰고 자르고 피가 튀는 액션에 있다는 점이다.
<귀멸>의 진짜 재미는 안정적인 전개 위에 차례로 이어지는 귀살대와 혈귀간의 대결이다. 귀살대 검사들은 ‘호흡’이라 불리는 기술로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고, 혈귀 역시 ‘혈귀술’이라는 필살기를 가지고 있다. 귀살대와 혈귀가 차례로 등장해 각자의 기술을 주고받는 방식은 일견 2D 격투게임과 유사하다. 여타 스토리는 전반적으로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시키는 대신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에 혼을 불어넣은, 클래식한 활극이야말로 <귀멸>의 본질이다.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
이 점을 극대화한 것이 유포테이블이 제작한 26부작 TV애니메이션이다. 그야말로 혼을 갈아넣은 작화는 스펙터클한 동시에 사소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액션의 진수를 보여준다. 다채로운 기술은 캐릭터의 성격과 정체성을 고스란히 반영하는데 탄지로의 물의 호흡, 젠이츠의 번개의 호흡, 이노스케의 짐승의 호흡 등 각 기술은 특색에 맞는 작화로 묘사된다. 이를테면 물의 호흡은 일본 전통화인 우키요에 스타일의 수묵 선을 차용하는 한편 3D CG 기법도 적절히 섞어 전에 없는 영상미를 창조한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하 <무한열차편>)에서는 불의 호흡을 사용하는 렌코쿠의 검술 표현을 위해 니시키에(일본 전통의 목판화)의 질감을 바탕으로 하는 등 시각적 쾌감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선을 균일하게 그리는 대개의 애니메이션과 달리 강약과 굵기를 조절한 만화풍의 외곽선은 전통과 기술을 결합한 <귀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캐릭터 그 자체를 ‘그리는’ 액션을 향한 일점돌파, 액션을 위한 전집중(全集中, 작중에 나오는 호흡의 최고경지 중 하나)인 셈이다.
23권으로 완결된 만화 <귀멸>의 스토리 중 <무한열차편>이 택한 에피소드는 혈귀 ‘하현의 1’ 엔무와 싸우는 ‘무한열차편’이다. 만화로 따지면 대략 단행본 7~8권, 분량으로는 1.5권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왜 하필 이 에피소드를 골랐는가. 아마도 <귀멸> 현상을 이해하는 답은 여기에 있을 것 같다. ‘무한열차편’은 <귀멸>에서 가장 인상적인 등장과 퇴장을 선보인 최고 인기 캐릭터 염주 렌코쿠가 활약하는 에피소드다. 동시에 주인공 탄지로에게 뚜렷한 성장 계기를 제공하고 작품 전체의 방향성을 확정지은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캐릭터 면에서나 스토리텔링 방식 면에서 모두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통과의례 혹은 세례식 같은 지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단 주인공 탄지로는 렌코쿠를 통해 귀살대원으로서의 책임감과 동료애를 각성한다. 구성적인 면에서는 탄지로의 사연을 좇아가던 만화가 본격적으로 귀살대와 혈귀의 매치업 구도로 전환되는 기점이다. 지주(住)라 불리는 귀살대의 정점에 선 9인의 검사가 등장해 혈귀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오래된 6인의 상현 혈귀들과 차례로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드래곤볼>로 치면 모험 만화를 표방했던 초기에서 천하제일무술대회의 등장을 기점으로 배틀물로 전환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에피소드를 극장판으로 골랐다는 건 <무한열차편>이 ‘액션’과 ‘캐릭터’라는 스스로의 강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걸 시사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대결 액션이 핵심인 만큼 극장판은 스토리가 평이하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영화처럼 세계관에 대해 충분히 학습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판타지에 가까운 액션을 납득하고 즐기기도 쉽지 않다.
다시 말해 이번 극장판은 원작 만화, 적어도 TV애니메이션을 즐긴 사람들을 위한 클라이맥스에 가까우며 진입 장벽이 제법 존재한다. <무한열차편>이 공전의 히트에도 불구하고 내수용에 그치는 특수한 사례로 남을가능성이 높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한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확장의 출발점이 될 만하다. 사실 만화 <귀멸>의 출발 또한 다소 마니악한 쪽에 가까웠는데 (일본 내수 한정이긴 해도) 결국 여기까지 저변을 넓혔다. 슈퍼히어로영화가 한번 익숙해진 뒤엔 캐릭터와 액션 중심으로 굴러가는 것처럼 그리 높지 않은 허들만 통과하고 나면 여러 가지 즐거움이 열리기 시작한다.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갈라파고스를 벗어날 수 있을까
<무한열차편>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나 <너의 이름은.>과 같은 오리지널 스토리의 극장판 애니메이션과는 다르다. 지브리의 침체 이후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명탐정 코난> <도라에몽> <포켓 몬스터> <원피스> 등 인기 원작 만화나 TV애니메이션의 극장판들이었다. 매 시즌 돌아오는 보장된 흥행 보증수표이자 본편과는 구분되는 일종의 특별 팬서비스에 가까운 작품들이다. 일련의 애니메이션들은 개봉 주에 쉽게 흥행 1위를 차지하지만 최종 스코어는 역대 흥행 순위에 드는 메가히트까지 도달하진 못한다. 한마디로 탄탄한 팬층이 있지만 확장성이 약하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대단했던 점은 비단 일본 자국뿐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도 통하는 확장성에 있다. 반면 일본의 여타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점점 내수용, 소위 말하는 ‘갈라파고스화’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편의적으로 구분하자면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사(史)에는 몇 차례의 단절이 있다.
2000년 이전을 지브리를 필두로 한 ‘아니메’(Anime)로 통칭한다면 이후 신카이 마코토로 대표되는 ‘세카이계’ 작품들은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무한열차편>은 이와는 또 다른 새로운 경향을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 적당한 명명은 찾지 못했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귀멸> 신드롬의 핵심은 ‘현대화된 클래식’이다. 복고 정서를 기반으로 기본에 충실하되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묘사에 집중, <드래곤볼> 이후 풀이 죽었던 소년 만화의 왕도를 젊고 빠르고 감각적이며 다소 수위 높은 방식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건 최근 <주간 소년점프> 작품 중 주목받고 있는 두편의 만화 <체인소맨> <주술회전>과 묶어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포스트 원나블(<원피스> <나루토> <블리치>)에 해당하는 이 만화들은 길게 늘어지는 장대한 서사 대신 짧은 호흡과 과감한 묘사, 빠른 전개로 모바일 미디어에 어울리는 젊은 감각의 스토리텔링을 선보인다. 둘 다 다소 하드고어한 묘사를 바탕으로 한 마니악한 작품인데 TV애니메이션이 나오며 차츰 저변을 넓혀가는 중이다. 만약 두편 모두 <귀멸>처럼 성공적으로 극장판까지 이어진다면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경향과 변화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