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제를 배경으로 다룬 독립영화 두편이 1월 28일 나란히 극장 개봉한다. 하나는 송전탑에 올라간 노동자를 그려낸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이고, 또 하나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거리 투쟁, 해외 입양, 실향민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독립 영화인의 현실과 고민을 펼쳐낸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이다. 두 영화를 각각 연출한 이태겸, 이인의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나눴다.
관계에 있어서 초보라는 말일까, 아니면 관계에도 가나다 같은 순서가 있다는 뜻일까. 1월 28일 극장 개봉하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은 수수께끼 같은 제목으로 관객의 눈길을 끈다. 이인의 감독에 따르면, 관계의 가나다는 인간관계의 순서를 뜻한다. ‘가나다라마바사’처럼,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순서대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아는 사람만 아는 사회 이슈를 처음 알게 되는 사람들, 타인에 불과했던 이들이 서로를 처음 알게 되는 순간,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의 첫 순간을 담고 싶다”는 감독의 마음이 영화의 제작을 가능하게 했다.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은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의 꿈과 현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을 펼쳐내는 청춘영화다. 영화의 세 주인공은 저마다 꿈이 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 때문에 고민이 많다. 민규(은해성)는 달랑 카메라 하나 가진 채 다락방 같은 원룸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독립 영화인이다. 쌓인 고지서를 보며 영화일을 접을까 진지하게 고민하지만 상규(장준휘), 태인(김지나) 등 선배 감독들이 부를 때마다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으로 달려나간다. 한나(오하늬)는 어머니와 함께 캐나다에 피겨스케이팅 유학을 갔다가 꿈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일로 생긴 어머니와의 갈등 때문에 집을 나왔고, 해외 입양 문제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에 통역으로 참여하면서 민규를 만난다. 주희(이서윤)는 어릴 때 프랑스로 입양됐다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찾기 위해 고국인 한국을 찾는다. 태인이 연출하는 다큐멘터리에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민규, 한나의 도움을 받아 친모를 찾아나선다.
민규, 한나, 주희 등 세 사람이 서 있는 위치는 다 다르지만 셋은 해외 입양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처음 만난다. 민규는 그 다큐멘터리에서 촬영을 하고, 유학생 한나는 입양 여성 주희의 통역을 돕고, 주희는 자신이 친모를 찾는 사연을 민규의 카메라 앞에서 털어놓는다. 영화는 세 청춘이 서로를 알아가고, 가까워지며, 나아가 연대하는 과정을 공들여 보여준다. 소통조차 쉽지 않은 시대, 세 청춘이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거리 투쟁(콜트악기와 콜텍은 전세계 기타의 30%를 제작, 유통하는 회사로,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했다. 회사가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를 단행하자 노동자들이 연대해 부당해고에 대한 투쟁을 이어나간 바 있다.-편집자), 해외 입양, 실향민 같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이인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인 단편영화와 제목이 똑같다. 단편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2017)은 주인공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1·4후퇴 직후 헤어진 남편을 찾는 할머니를 인터뷰하다가 헤어진 여자 친구를 떠올린다는 이야기로, 통일부가 제작 지원한 옴니버스 장편영화 <그리다>에 포함됐다.
그렇다고 장편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이 동명의 단편을 확장한 이야기는 아니다. “원래 장편 시나리오를 2014년에 먼저 완성했는데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거리 투쟁, 해외 입양, 실향민 등 사회적으로 가볍지 않은 소재를 다룬 까닭인지 3년 동안 투자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시나리오의 일부분인 실향민 ‘앵두 할머니’ 사연을 따로 떼어내 단편으로 각색한 뒤 2017년 통일부 공모전에 지원해 <그리다> 중 한편으로 선정됐고, 이후 2017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되면서 장편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라는 게 이인의 감독의 설명이다. 지금의 영화로 탄생하기까지 꽤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셈이다.
이 영화가 청춘들의 고민을 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려내는 건 아마도 다큐멘터리 현장을 직접 겪은 이인의 감독의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된 덕분일 것이다. 주인공 민규를 포함해 상규, 태인 같은 영화 속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이인의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이 반영된 인물로 보인다.
이 감독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여러 상업영화 제작사에서 시나리오작가로 일하다가 이장혁 밴드의 뮤지션 이장혁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이장혁과 나>를 만들면서 동료 다큐멘터리 감독들을 만났다. “웨이필름에서 다큐멘터리 감독, 프로듀서들과 인력, 사무실, 촬영 장비 등을 품앗이했다. <기타(其他/Guitar) 이야기>(2009), <꿈의 공장>(2010) 등 콜트콜텍 노동자의 끝나지 않은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던 김성균 감독,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오월애(愛)>를 연출한 김태일 감독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서로 손이 필요하니 나는 <기타(其他/Guitar)이야기>에, 김성균 감독은 <이장혁과 나>에 참여해 도움을 주고받았다.” 난생처음 접한 다큐멘터리 현장은 이인의 감독에게 “신세계”나 마찬가지였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이 너무 좋았다. 이번 영화에서 여러 사회적 이슈를 어떻게 담아내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다큐멘터리를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감정과 그때 함께 시간을 보냈던 다큐멘터리 감독, 프로듀서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고 싶었다.”
이 감독이 2013년 통일부와 적십자가 진행한 사업인 ‘남북 이산가족 영상 편집 아카이빙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한 것도 이 영화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피디들이 전국 방방곡곡의 실향민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사연을 카메라에 담는 방식의 작업이었는데, 이 감독은 6개월 동안 실향민 100여명을 인터뷰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앵두 할머니 사연도 그중 하나다. 또 평소 관심을 가졌던 해외 입양 문제를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거리 투쟁, 실향민 등 여러 사회문제와 함께 엮어 지금의 시나리오로 발전시켰다. “다큐멘터리였다면 각각의 사회문제를 엮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민규는 각각의 사회문제를 한데 묶는 인물이자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첫 장편을 내놓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인의 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걱정이 많지만 완성한 지 2년여 만에 개봉하게 돼 개인적으로는 기쁘다.” 그는 다음 작품을 이미 준비 중이다. “지난해 실화를 소재로 한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썼고, 연출을 준비하고 있다.” 인간관계가 단절되다시피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 영화는 관계의 작은 출발이 어떻게 연대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과정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청춘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