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제를 배경으로 다룬 독립영화 두편이 1월 28일 나란히 극장 개봉한다. 하나는 송전탑에 올라간 노동자를 그려낸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이고, 또 하나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거리 투쟁, 해외 입양, 실향민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독립 영화인의 현실과 고민을 펼쳐낸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이다. 두 영화를 각각 연출한 이태겸, 이인의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나눴다.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에서 주인공 리키는 살기 위해 살인적인 노동의 조건을 감수한다. 굳이 해외영화의 사례를 빌리지 않더라도 고용 불안과 위험의 외주화와 각종 차별에 시달리며 부당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이태겸 감독의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도 한국 사회의 부당하고 기이한 노동 현실을 압축하듯 담아낸다. 애초 제목은 <파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였다. ‘파견’ 두 글자를 빼고 개봉하는 이 영화는 부당하게 파견 발령을 받은 한 여성 노동자가 꿋꿋이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과정을 좇는다.
이야기는 어느 기사에서 시작됐다. 사무직 여성 노동자가 지방 현장직으로 파견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힘든 시간을 버텨냈다는 내용의 기사다. 이태겸 감독은 단번에 이 기사에 “감정이입”했다. 첫 영화 <소년감독>(2007)을 만든 뒤 오랫동안 차기작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던 참이었다(당시 감독의 이름은 이우열이었는데 이후 개명했다). “영화가 될 뻔하다 엎어지는 상황을 두세번 경험하고 나니 ‘이제 영화를 그만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힘든 시간을 보내던 때 그 기사를 봤고, 파견 발령을 받은 여성 노동자가 힘든 상황을 버텨냈다는 이야기에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 이 이야기를 써보자. 되든 안되든 글을 쓰며 나도 다시 시작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7년간 근무했던 회사에서 하청업체로 파견 명령을 받은 정은(유다인)은 어떻게든 1년을 버텨 본사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정은의 자리는 없다. 본사에선 파견이 퇴사로 이어지길 바라고, 하청에선 현장 경험 없는 본사 직원에게 마땅히 내줄 업무가 없다. 매일을 팩소주에 의지할지언정 정은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난생처음 작업복을 입고 송전철탑에 오르기로 한다. 그러나 거대한 철탑 앞에서 정은은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다.
이태겸 감독은 “실화의 진정성”을 살리기 위해 주인공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며, 사건이 아닌 인물의 정서에 오롯이 포커스를 맞춘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 내내 정은의 시야와 행동반경 안에 머물며 그녀가 이 힘든 시간을 어떻게 버텨낼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응원했다가 한숨 쉬었다가 또 응원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여기서 정은이 여성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정은이 받는 정서적 압박과 사회적 차별은 “여성이자 파견 노동자”이기 때문에 가중된다.
KTX 해고 승무원들이 10년의 싸움 끝에 전원 복직을 이룬 뉴스를 보고 “이 작품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유다인 배우는 여성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마음으로 정은을 연기했다고 한다. 유다인 배우뿐 아니라 김자언 작가도 정은의 캐릭터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곤란했던 건 여성 캐릭터에 대한 감성이었다. 보편적인 파견 노동에 대한 이해는 나 역시 회사를 다녀봐서 알 수 있었지만, 남자들뿐인 하청 회사에서 정은이 겪는 곤란한 감정 같은건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이었다. 철탑에 오를 때 쇠 재질의 부속품 때문에 속옷을 벗고 올라간다든지 하는 디테일은 김자언 작가의 생각이었다.”
정은이 철탑을 오를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인물은 하청업체의 동료인 막내(오정세)다. 송전철탑 수리업체 직원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심야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는 막내는 세딸을 둔 가장이다. 이태겸 감독은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선한 인간성을 드러낼 여유조차 없는 인물”로 막내를 그렸고, 오정세 배우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마음으로 막내를 연기했다고 한다.
사실 정은과 막내는 회사라는 조직의 룰에 의해 우위를 다퉈야 하는 관계다. ‘원청 사무직 노동자이자 여성 파견 노동자’인 정은과 ‘하청 현장직 노동자이자 경력이 제일 낮은 남자’인 막내는 겹겹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서로를 인사평가의 경쟁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서로의 인간적 면모를 본다. “고용 불안 사회에선 서로가 서로를 막연한 경쟁 관계로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조금만 걷어내고 보면 동료가 될 수 있다. 그런 휴머니즘이 살아 있는 관계로 두 사람을 그렸다.”
섬세하게 축조한 리얼리티와 미장센은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영화적 힘에 탄력을 부여한다. 가령 송전철탑 수리에 나가기 전 직원들이 손을 모으고 “우리는 빛, 우리는 생명”이란 구호를 읊조리고 봉고차에 탑승하거나, 철탑에 오르기 전 신발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내는 장면이나, “도시락은 챙겼냐?”와 같은 대사들이 무심하게 두어번 반복될 때,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원경에서 근경으로 가까이 훅 들어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인물들을 멀리 세워두고 관찰하지 않고, 일상의 루틴을 담백하게 담아내는 카메라는 핏대 세워 외치는 구호보다 더 많은 것을 설명한다.
거대한 송전탑의 기하학적 구조나 수직적 앵글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경우도 많은데, 선들의 교차 이미지는 미니멀하지만 그 느낌만큼은 압도적이다. “송전탑을 가까이서 봤을 때 생각보다 거대했다. 기하학적인 구조에 쇠로 된 차가운 질감이 뭔가 극복하기 힘든 거대함으로 다가왔고, 그것이 마치 우리의 삶과 닮아 보였다. 그리고 영화 자료 조사를 통해 실제로 그 송전탑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힘겹게 삶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말이다.” 거대한 송전탑 앞에서 정은이 심리적 압박을 느끼는 장면에선 특히 연출의 묘가 발휘된다. 마치 고공에서 떨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발이 땅에 꼭 붙어 있는 상황이 드러날 때 관객 또한 감정적으로 긴장했다 이완하게 되는데, 철탑 장면들에선 이런 묘한 스릴이 동반된다.
인물의 감정을 증폭시키거나 여운을 불어넣는 데는 음악의 몫도 크다. 이태겸 감독은 촬영 전부터 음악 작업을 시작했고, 광주에서 활동하는 음악팀 탱글과 함께 “전기흐르는 소리, 수공구가 철탑에 부딪히는 소리” 등을 따서 음악에 녹였다. “음악이 없으면 성립되기 힘든 장면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감독님이 촬영 10개월 전에 테마곡을 미리 만들어놓았는데, 빛이 명멸하는 듯한 깜박거림, 즉 플리커(flicker)에서 이름을 따와 테마곡 <플리커 테마>를 만들었다. 이 곡은 정은의 존재와 송전탑을 상징하는데, 송전탑 앞에 선 정은의 긴장감, 기어이 한발한발 송전탑에 올랐을 때의 벅참, 이런 감정들이 음악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송전철탑에서 촬영을 할 때도 여러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예산이 적다 보니 마음껏 철탑 장면을 찍을 수 없었고, 어디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촬영할 것인가를 두고 이태겸 감독은 고민이 많았다. “송전탑과 관련해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송전 노동자들을 만났고, 그들이 영화의 최종 촬영지가 된 교육기관을 소개해줬다. 송전 노동자인 이충구 지회장님과 한국전력에서 촬영 가능한 추천지로 소개한 곳 중 공통분모가 대원전기교육원이었다. 마침 대원전기교육원에서도 흔쾌히 촬영에 협조해줬다. 장소제공과 안전교육, 안전장비 렌트까지, 교육원의 도움 덕에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태겸 감독은 영화에 도움을 준 분들을 위해서라도 영화가 최대한 많은 관객에게 소개되길 바랐다.
“외다리 지옥길을 걷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엔딩에서의 정은의 고백처럼, 제목이 주는 단단한 힘처럼,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주인공의 꼭 쥔 두손에서 용기와 희망을 앗아가지 않는다. “직업이 생존인 동시에 존엄인 동시에 그 사람 자체를 규정하는 사회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인간다움을 지켰으면 좋겠다.”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은 이태겸 감독이 창작자로서 놓치고 싶지 않은 태도다. 대학에서 탈춤반을 하다 마당극을 접하고, 그러면서 연기와 연출을 맛본 감독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1년6개월 만에 직장이 본인에게 “맞지 않는 옷”이란 생각이 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를 시작한다.
그때부터 고생길은 시작되었다. “영화를 하겠다 결심하고부터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 여러 사람들도 만났다. 그러면서 깨달은 건 진실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거였다.” 악덕 업주에게 복수하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복수의 길>과 산골 마을의 소년이 세상을 경험하는 장편 <소년감독> 그리고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까지, 그의 영화는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담고 있다. 앞으로도 이태겸 감독의 관심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진실과 인간적인 것을 향한 관심은 이태겸 감독이 계속해서 탐구하고픈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