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영화는 각자의 자리에서 반란을 도모한다. 세 영화 속 세 인물이 마구 뒤섞이는 투쟁과 화해의 장으로 당신을 소환한다.
반동의 트라이앵글
남자들이 죽었다. 여자들의 만남이라는 ‘빛’ 뒤에는 남자들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남자들은 존재하지 않거나(<아이>), 이미 죽은 상태이거나(<빛과 철>), 죽은 것과 다를바 없는 상태를 거쳐 죽임을 당한다(<고백>). 잠깐, 이러한 분석에는 수상한 데가 있다. 이미 죽었거나 죽임당하는 존재의 자리에는 주로 여성이 놓여왔다. 영화 속 여자들은 리얼리즘적 현실 반영이라는 조건 아래 이미 죽은 상태이거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를 거쳐 죽임당했다. 현실이 재현을 만드는지, 재현이 현실을 만드는지 혹은 재현이 그러한 현실을 강화하는지에 대한 반성 없이 그것은 영화를 향유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처럼 보였다.
이는 너무도 익숙해서 삭제된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읽어내지 않을 때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삭제해버린 것에 주목하는 방식은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것으로서의 ‘영화’비평이라는 명명 대신 특정 시각에 매몰되었다는 혐오적인 의미에서 ‘페미니즘’으로 ‘게토화’되었다. 페미니즘은 영화비평을 위한 기본 조건 혹은 태도로 인식되지 못한 채 편협함으로 오인되었다. 이런 방식의 분리를 통해 삭제된 것은 삭제되지 않은 것의 왕국을 굳건히 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제 몇편의 영화들에서 남성이 삭제되는 양상이 발견된다. 이것을 역전된 관계를 위한 서막(혹은 욕망)으로 불러도 될까. 혹은 영화에 드러난 여성들의 연대 양상에 주목하는 대신, 노골적으로 남성이 삭제되는 양상에 주목하는 것은 ‘반(反)페미니즘’ 혹은 남성 중심적인 비평이 되고 마는 것일까.
여자들이 삭제된 자리에서 남성은 여성을 그리워하며 스스로 망가지거나(<박하사탕>) ‘멋있게’ 싸운다(<아저씨>). 그렇다면 남자들이 삭제된 자리에서 여성은 무엇을 하는가? 노동한다. <빛과 철>의 영남(염혜란)과 희주(김시은)는 공장 노동자다. 영남은 식당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희주는 부품 검수 작업을 한다. 희주와 영남의 동료는 모두 여성이다.
영남의 남편은 그가 건강한 상태였을 때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영남의 남편을 비롯해 공장의 남성 노동자는 죽음에 가까울 때만 드러난다(피 흘리며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남성 노동자의 이미지). 영남 남편의 동료였으며, 부당해고 복직투쟁 중인 해고 노동자만이 예외다. 그의 자리는 공장 바깥이며 노동자로서 그의 가치는 정지된 상태다. 그렇기에 그는 자유롭게 영화 안팎을 오가는 유일한 남성 노동자가 된다.
잘 먹겠습니다
해고 노동자의 상태는 노동을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장은 영화의 중심 장소 중 하나지만, 그것은 노동의 장소로 조명되지 않는다.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공장의 내부도 바깥도 아닌, 그 사이 공간이라 할 구내식당이다. 구내식당은 단순히 영남의 노동 장소로 조명되는 것이 아니다. 영남은 식당 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그 공간에 존재하는 관찰자처럼 보일 정도다. 구내식당은 서로 다른 직급의 관리자와 노동자가 뒤섞이는 마주침의 장소다(물론 존재가 언급되나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사장은 예외다). 공장의 투쟁이 가능한 공간도 오직 여기다. 그릇들이 식판과 함께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방식을 요약한다.
투쟁은 곧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는 싸움이다. 쨍그랑대며 바닥에 나뒹구는 철식기의 날카로운 마찰음은 밥의 싸움이 창을 들고 싸우던 시절만큼이나 오래되었음을 들려준다. 행동하는 두 여성의 존재는 여성이 상징적인 피해자로 그려지던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동력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동력은 결국 삭제된 남성들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다 결국은 제대로 적을 찾아가는 영남과 희주의 싸움은 죽거나 거의 죽은 상태에 있는 남편들의 아바타로서, 남편들의 싸움을 연극적으로 한번 더 반복한다. 상징체계 바깥에 실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 바깥에 또 다른 상징이 있다.
<아이>에서도 영화가 사랑해 마지않던 젠더화된 노동이 등장한다.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하지 않을 때는 그림자에 불과했던 영화 속 베이비시터는 아동학과 졸업을 앞둔 학생의 그늘진 앳된 얼굴로 다가온다. 자극적인 방식으로 소비되어온 ‘술집 여자’의 이미지는 워킹맘의 피로한 표정으로 뒤덮인다. 다시 룸이다. 대기실에서 이뤄지는 치장의 고단함과 복도를 줄지어 가로지르는 화려한 여성들이라는 익숙한 전경이 속속 드러나는 가운데서도 카메라가 룸 안으로 입장하는 것만은 유독 제한된다. 영채(류현경)의 공간은 어디까지나 룸 바깥이다. 영채가 동료들과 뒤섞여 룸으로 사라진 뒤에도 카메라는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 카메라가 예견하듯 영채는 곧 룸 바깥으로 튕겨나온다. 나이 많은 영채에 대한 모욕과 이에 대한 영채의 대거리는 룸 바깥의 이 복도에서만 보이고 들린다.
룸이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은 채 젖도 떼지 않은 영채의 어린 아들이 어울리지 않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이다. 유흥을 위해 쓰여야 했을 낡은 노래방 반주기는 아이를 달래는 동요를 위해 처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술과 안주로 뒤덮여야 할 룸의 테이블에는 아기와 ‘아이’(같은 어른)들을 위한 미음이 놓인다. 룸은 어른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낡은 남자를 죽이고 새로운 남자를 키우는 탁아소로 전복된다.
<아이>는 전형화된 공간에서 남성의 배역이 여성으로 교체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사장 미자(염혜란)는 영채가 나이가 들거나, 가슴에서 젖이 흘러도 타박은 할지언정 절대 내치지는 않을 유사-어머니처럼 보인다. 영채의 입장에서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은 구원이지만, 미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제약일 수 있다. 그처럼 영화 속 여성들은 직업에서 요구되는 업무를 벗어나 다른 비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할 감정적 의무를 진다. <고백>의 오순(박하선)과 지원(하윤경)은 각각 자신의 감정과 직업적인 의식 사이에서 갈등한다.
오순은 사회복지사이며, 지원은 지구대에 근무 중인 말단 순경이다. 이들의 직업은 누군가의 사연에 깊이 접속하는 바탕이 되지만,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한다. 그들이 다른 이의 사연에 깊이 침잠하는 이유는 그들 각자가 겪은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오순은 과거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고 지원은 (아마도) 왕따를 당했던 것 같다. 오순에게 현장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장이기에 그의 노동은 사이코드라마를 찍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정서가 불안한 복지사’라는 오명을 얻고 직장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지원에게는 아예 현장이 주어지지 않는다. 지원은 제복을 입었을 때가 아니라 제복을 벗은 근무 이외의 시간에만 중요한 사건 현장에 우연한 방식으로 발을 들인다. 그에게 드물게 우호적인 선배 병훈(정은표)은 지원에게 그가 현장에서 배제되는 이유가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충고한다. 오순과 지원의 상태는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여성’이라는 혐오의 프레임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것인가, 공격의 방향을 전화해 ‘직업의식’의 맥락에서 삭제되었던 감정적인 맥락의 필요성을 설득하게 될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이 없는 건, 그 대답을 영화 바깥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란한 사람들
세 영화는 공통으로 나란히 놓일 수 없는 사람들을 나란히 놓아둔다. 이 나란함은 이야기가 시작되기 위한 전제이기도 하고, 인물들이 서로 비슷한 어려움에 부닥쳐 있음을 이미지로 강조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카메라로 촬영 중임을 고백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고백>은 첫 장면에서 오순과 지원을 그저 우연히 만나도록 둔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직업에서 떨어져나온 상태다. 이른 아침 지원은 근무 전 조깅을 하는 중이고 직장을 관둔 오순은 지금 막 자신이 마주한 상황을 곱씹으며 벤치에 앉아 있다. 물론 이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에 배치되어 있기에, 관객 역시 그들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두 여성의 만남을 바라보게 된다. 오순이 앉은 벤치 앞을 스쳐 지나가던 지원은 아무래도 찜찜한 듯 발길을 되돌려 오순의 옆자리에 앉는다. 지원은 단번에 오순에게 어떤 문제가 있음을 알아본다. 알아본 것은 오순쪽도 마찬가지다. 오순은 대뜸 지원에게 “맞죠? 경찰” 하고 먼저 말을 건다.
후반부에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이 벤치에서 만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분명 피해자처럼 보였던 오순은 용의자가 되어 그곳에 앉아 있다. 이번에도 지원은 사복 차림이다. 오순은 지금 자신을 체포할 수 있는 경찰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자신의 사연을 조곤조곤 꺼내놓는다. 이곳은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기 위한 변신의 무대이며, 영화의 서사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고백을 온전히 듣기 위해 지나야 했을 시간이다. 서은영 감독은 지나친 우연, 과도한 설정임에도 두 사람이 나란히 놓여야 한다고 고집한다.
<빛과 철> 역시 인물이 나란히 앉는 순간을 향해간다. 2년 만에 고향을 찾은 희주는 마주 오던 영남을 보고는 소스라치며 그를 피한다. 희주 남편의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면서 마주 오던 영남 남편의 차와 충돌해, 희주의 남편은 사망하고 영남의 남편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남은 빚은 없어 보인다. 희주의 남편은 사망과 보험금으로 죄를 갚았고, 영남의 남편은 어쨌든 살아 있으니 피차 다시 분배할 손해나 이득은 남아 있지 않다. 필요한 건 오직 잊는 것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친 데 이어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으로 내몰린다. 희주가 기를 쓰고 피하려 한다면, 영남은 그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은근히 다가와 말을 건다. 서로 거리를 둔 채 벤치에 나란히 앉는 것으로 서로를 피하지 않게 된 두 사람은 엔딩 시퀀스에 이르러 한 자동차에 나란히 탑승한다. 영남의 남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다. 이 비정상적인 나란함은 서로 관계 맺을 일이 거의 없는 두 사람에게 마련된 일시적이고 어색한 동거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같은 사건을 공유한다. 차 앞으로 갑자기 뛰어든 고라니가 그들이 탄 차를 멈춰 세운다. 그 순간의 비현실성은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감각의 비현실성을 보여준다. 공통의 감각을 향유하는 것은 환상의 프레임을 거치지 않으면 불가능할 만큼 힘든 일이다.
<아이>에서도 비현실적인 나란함이 존재한다. 영채가 아들 혁을 안고 밖으로 나가버리고, 아영은 그를 붙잡기 위해 뒤따라간다. 달려나가는 누군가를 붙잡는 방법은 그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다. 그 대신 아영은 영채 뒤에 그와 비스듬히 선 채 그를 설득한다. 아영과 영채는 서로 얼마간 떨어진 채 카메라를 마주 보는 어색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이 앵글은 실제적이기보다는 연극적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카메라 앞의 관객을 인식하고, 그들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노래방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세 사람은 가사가 나오는 모니터를 뒤로한 채 아무도 없는 관객석을 바라보며 노래한다. 관객석에 놓인 것은 카메라이며, 이들은 카메라 밖 미래의 관객을 바라본다. 이들이 나란히 앉아 죽을 먹어치우고 난 뒤를 보여주는 침묵 숏의 어색함은 물론 연출된 것이지만, 그것은 나란함의 어색함을 표현한 숏처럼도 느껴진다. 이들은 연대하나 그것은 카메라를 통해서만 가능한 차원의 나란함과 연대다.
유령의 임무
연약함 속에서 강인함을 연기하면서도 그 강인함이 연약함을 절대 해치지 않는 배우 김향기는 아영의 캐릭터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선한 기운을 드리운다. 얼마쯤 뒤에 서서 “나도 같이 도울게요”라고 말하는 아영의 말을 들으며 소리 없이 오열하는 영채의 눈물은 그의 곁에 지금 누군가가 있음에 흘리는 눈물이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누군가가 함께 있음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눈물처럼 보인다. 영채는 지금 자신에게 아영처럼 말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한다. 아영은 지금 영채의 눈앞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음성적 차원으로 현현한 천사처럼 그렇게 영채의 상상과 바람 속에서 존재하는 것 같다.
세명의 인물이 모이면 셋 중 하나는 일종의 매개자가 된다. 매개자는 기존에 여성이 담당했던 남은 과업을 수행한다. <빛과 철>에서 영남의 딸 은영(박지후)은 이를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기존에 여성이 수행하던 미스터리한 팜므파탈을 연기한다. 은영은 이어질 수 없는 영남과 희주를 매개하며 비밀을 폭로해 두 사람을 흔들어 놓는다. 은영은 거의 귀신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노동자들이 뒤섞이는 식당에 유일하게 출입 가능한 비노동자로 언제나 그랬고 영원히 그럴 것처럼 식당 한쪽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는다.
희주 집에 한번 발을 들인 은영은 희주가 없는 사이 집에 들어와 희주를 놀라게 하기 일쑤다. 그는 희주가 혼자 쓰는 2인실 기숙사에 등록되지 않은 다른 점유자 같다.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던 은영은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지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영화는 끝내 은영의 행방을 보여주지 않은 채 끝맺는다. 은영은 사라짐으로써만 누군가의 딸이라는 역할의 한계에서 벗어난다.
<고백>의 보라(감소현)는 학대당하는 소녀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보라를 학대당하는 희생자가 아니라 직접 보복하는 주체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주체의 자리는 연약하고 공허하다. 학대하는 부모를 향해 아이를 조심하라고 소리쳤던 오순의 경고는 보라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된다. 보라가 싸워야 할 그의 아버지는 흡사 좀비 같다. 집은 늘 어두컴컴하고 남자는 노동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내내 잠만 잔다. 잠자는 아버지가 깰까봐 보라는 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걷는다. 보라가 실수로 큰 소리를 내자 좀비아버지는 깨어나고 문 뒤에서 가차없는 폭력이 행해진다.
이미 아버지는 죽는 게 이상하지 않은 존재다. 아니 이미 죽은 존재다. 그의 죽음은 아무런 충격도 불러오지 않고, 그를 죽이는 것 역시 그저 누군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 같다. 그게 누구의 손에서 비롯되었고 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감독은 그것이 중요한 문제인 양 군다. 보라는 마침내 결심한 듯 무언가 고백하려 한다.
오순의 고백이 그랬듯 보라의 옆에도 지원이 있다. 그러나 이제 지원은 경찰복 차림이다. 영화는 보라가 고백하려는 순간, 그의 말을 멈추고 극을 닫는다. 감독은 그의 자백이 궁금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미스터리적인 여운을 남기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고백할 사람은 준비가 되었는데, 들을 사람은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영화가 ‘Go Back’ 하는 이유는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이 영화에서 가장 솔직한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