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심장이다.” 배우 한예리에 대한 리 아이작 정 감독의 한마디에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묻어난다. <미나리>에서 배우 한예리가 맡은 모니카는 우리 모두의 기억 어딘가에서 마주한 어머니다. 가족을 보듬는 따뜻함, 가족을 지키는 강인함, 가족이 가족일 수 있게 해주는 울타리 같은 존재. 하지만 모니카 역시 누군가의 딸이며 세상 모든 것이 처음이고 서툰 평범한 사람이다. 배우 한예리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어머니와 풍파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한 인간 사이의 간극을 쉼 없이 오가며 진동한다.
<미나리>의 촬영 과정 역시 크고 작은 역경을 딛고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는 이야기를 닮았다. “촬영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식사했다는 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일과를 마치면 모두 식탁에 모여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 촬영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어려움에 공감하면서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 함께 밥을 먹는 식구가 된다는 것에 대해 배우 한예리가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올해 부산영화제는 여러모로 남달랐다. <미나리>가 야외 상영을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드린다.
=영화의전당 야외 스크린에서 보니까 느낌이 다르더라.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봤을 땐 내가 나를 보는 게 어색하기도 했고 정신이 없었다. 이번엔 관객 입장에서 내려놓고 봐서 그런지 선댄스 때보다 기분 좋고 감동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일부러 부산까지 와서 봐주신 것 같아 감사했다. 영화제의 규모가 줄어든 것은 아쉽지만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예전처럼 떠들썩한 분위기는 없었지만 영화에 오롯이 집중하는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껏 부산을 가도 바쁜 일정 탓에 해운대 앞바다 한번 제대로 보고 온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야외 행사 등이 없어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일정 덕에 바다도 볼 수 있었다.
-기자회견도 유난히 재미있었다. 예정보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윤여정 선생님이 기분 좋게 모두를 이끌어주셨다. 기자 분들도 얼굴이 안 보이니 좀더 편하게 질문할 수 있었던 것 같고.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기분 좋은 흐름, 서로를 위하는 마음, 그게 우리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영화를 직접 보신 분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거다. 이번 야외 상영 때 옆에서 지켜본 관객 반응이 무척 흥미로웠다. 재미있었다는 말씀도 많았지만 엔딩에서 갑자기 끝나는 것 같다며 당황스러워하는 분도 꽤 있었다. 미나리 팔아서 행복해져야 하는데 하시면서. (웃음) 어떤 심정인지 너무 이해가 간다. 여느 영화들처럼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다’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론 전형적인 해피엔딩이나 상업적인 마무리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나리>에 출연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처음엔 영어 시나리오를 먼저 봤기 때문에 그렇게 감이 오진 않았다. 급한 마음에 구글 번역을 돌려보기도 했는데. (웃음) 모니카라는 캐릭터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이 나와 있진 않아 막연했다. 감독님을 만나봐야 어떤 영화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미팅을 했는데, 너무 좋았다. 이분이라면 감독님이 원하는 모니카, 내가 원하는 모니카를 합쳐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해외 촬영이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크게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독립·단편영화 다 찍어봤는데 영화 현장이 다 비슷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더라. 마트까지의 거리만 달랐다. (웃음) 감독님이 너무 좋은 분이라 그를 도우려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달려와주었다.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미국영화 현장은 한국과 다르던가.
=기자회견 때 윤여정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할리우드는커녕 여기가 미국인지도 모를 시골 벽지였다. 영화의 배경은 아칸소였지만 실은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촬영했다. 시내에서 30분 정도 들어가면 초원이 펼쳐지는 곳이다. 해외 촬영이지만 숙소와 촬영장 트레일러만 오갔기 때문에 해외에 있다는 생각이 거의 안 들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온전히 <미나리>만 생각하며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6주 정도 촬영했는데 아주 밀도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도 있었다. 무엇보다 더운 날씨에 다들 체력이 바닥을 쳤다. 기온이 너무 높아 윤여정 선생님이나 아역배우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해결이 안되는 일들 때문에 화가 나는 날도 있었지만 그러고 나서 밤에 숙소에 옹기종기 모이면 내일도 열심히 하자며 서로 다독이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으로 충만한 현장이었다. 그때그때 자잘하게 힘은 들었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마무리되어 감사하다.
-모니카는 전형적인 내유외강의 인물이다. 감독님과 함께 만들어갔다고 했는데 그 과정이 궁금하다.
=찍으면서 계속 생각한 건 모니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녀는 왜 가족을 놓지 못할까, 왜 이렇게까지 가족에게 헌신하는 걸까 하는 질문들이었다. 서로를 구원해주자는 말에 기대어 제이콥과 미국으로 왔지만 스무살 초반에 건너올 땐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몰랐을 거다. 제이콥의 꿈이 곧 모니카의 꿈은 아니다. 하지만 제이콥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지옥이라도 함께 가겠다는 심정으로 미국에 온 거라 생각한다. 말도 통하지 않고 기댈 곳도 없는 모니카는 늘 외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제이콥과 함께하는 것이 가족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고, 모니카 자신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런 사랑에 대해 감독님과 긴 이야기를 나눴고 ‘사랑이 바탕이 되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감독님이 모니카를 두고 ‘영화의 심장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해주신 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모니카와 제이콥, 두 사람 모두 한국이나 미국 대도시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영화에선 거의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캐릭터들의 전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모니카는 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는 없다. 엄마 순자는 오랫동안 일을 하며 집안을 먹여살린 분이라 가사 노동에는 서툴다. 미국으로 떠나오며 엄마랑 연락이 뜸해지자 모니카는 어떻게든 엄마를 미국으로 모셔오고 싶어 한다, 이 정도다. 그보다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눈 건 싸움에 대한 거였다. 내가 아는 이모들의 부부 싸움, 엄마의 부부 싸움, 가부장적인 한국 남성들에게 상처받았던 기억들. 우리 집도 남동생 하나에 딸들이 있는 보통의 가정이었기에 어떤 상황, 감정인지 윤곽이 잡혔다. 이런 정서를 예리가 잘 알고 있으니 걱정되지 않는다고. 내가 무엇을 하든지 ‘노’를 한 법이 없다. 일단 다 지켜봐주시고 디테일을 조율해나갔다.
-덕분에 매 장면 세심한 표정과 디테일이 돋보인다. 엄마 순자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아이고, 우리 엄마” 하면서 등을 쓰다듬는 장면에서 순식간에 설득된다. 등이 살짝 굽은 채 움츠린 두 사람 몸의 실루엣이 무척 닮았다.
=나도 그 장면을 보면서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웃음) 순자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는데 친정엄마가 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한번에 전달되는 장면이다. 당시에 미국에 온다는 건 거의 평생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헤어지는 거였다. 딸과 엄마 사이 놓인 긴 시간과 사연이 쓰다듬는 동작 안에 응축되어 있다. 모니카와 엄마의 친밀함과 애착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고춧가루 등 식재료를 전달하는 장면은 시나리오상에 다 있었다. 다만 딸에게 돈봉투를 건넬 때 한번에 받는 걸로 되어 있었는데 절대 이렇지 않다고.(웃음) 어른이 주는 걸 덥석 받지 않고 실랑이를 하는 걸로 수정했다. 장면마다 딸과 손주에 대한 사랑,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들이 넘쳐 흐른다. 실제로 촬영할 때도 한국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미국 스탭들도 어떤 마음인지 알겠다며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미들버그영화제에서 배우조합상인 앙상블 어워드를 받은 만큼 배우들간의 연기 호흡이 탁월하다.
=남편 역의 스티브 연과는 더할 나위 없었다. 매 순간 교감이 되는 배우다. 그야말로 주고받는 무언가가 있다. 영민하게 기교적으로 반응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미묘한 감정 표현까지 능수능란하다. 한국에 살았던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한국어 연기도 능숙하고.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넘어 그가 주는 것을 통해 연기할 수 있는 영역들이 생기는 게 재미있었다. 한편 윤여정 선생님과는 시나리오를 고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눠서 늘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선생님 나이에 이런 시나리오를 선택해서 미국까지 촬영하러 온다는 용기가 존경스러웠다. 이분은 어떻게 이렇게 두려움이 없을까, 나도 이렇게 무섭고 걱정이 많은데. 선생님을 통해 절대 미리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말고 일단 시작하자는 걸 배웠다. 그리고 유머가 얼마나 중요한지도실감했다. 선생님의 유머 감각은 축복이다. 아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유머 감각을 배울 수 없겠지만. (웃음)
-딸 앤 역의 노엘 케이트 조와 아들 데이비드 역의 앨런 킴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연기도 놀랍고 보는 내내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둘 다 기가 막힌다. 데이비드가 촬영은 제일 많았을 거다. 사진이 왔을 때 나와 스티브 연과 너무 닮아서 놀랐다. 진짜 가족인가. 아직 어리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틀에 박힌 연기 없이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친구들이다. 둘 다 상처받지 않고,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즐기면서 이 일을 오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배우 계속할 거야, 라고 물어봤더니 너무 덥고 배고파서 안 할거라고 하더라. 배우 너무 힘들다고. (웃음) 이번에 코로나19로 한국에 오지 못해서 너무 아쉽다.
-초청작 배우로서 경험해본 선댄스영화제는 어떤 곳이었나.
=선댄스는 젊은 영화제인 만큼 편안하고 캐주얼한 분위기였다. 내 경험에 근거해서 비교하면 전주국제영화제와 비슷했다. 토론토국제영화제보다 친근했고 팀이 함께해서 즐거웠다. 해외 진출, 미국영화라는 것 때문에 무엇이 달랐는지 질문을 많이 받는데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스탭이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한 시간이었다. 나는 배우로서 내 역할에만 집중하면 되는.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내가 겪었던 현장이 유독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현장은 전세계 어디나 비슷하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한국 배우, 한국계 감독님, 스탭과 함께해서인지 다른 나라 영화를 찍었다는 생각이 안 든다. 다만 관객의 반응이 차이가 있을 수 있기에 한국 관객, 미국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그동안 출연작 중엔 가족 소재의 영화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올해는 영화 <미나리>와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이하 <가족입니다>)에 출연하면서 ‘가족’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긴다는 의미다. <미나리>의 모니카와 <가족입니다>의 은희 모두 가족 안에서 스스로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자리를 설정하기 위해 애를 쓰는 인물들이다. 때론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자기를 바꿔야 할 일도 생긴다. 집에 갈 때 딸이라는, 엄마라는, 아내라는 옷을 착장하고 들어가는, 어떻게 보면 관계에 의해 역할을 강요받는 셈이다. <가족입니다>의 권영일 감독님이 한번은 이런 농담을 하셨다. “내가 현장에서 이렇게 말이 많잖아? 우리 가족들은 내가 벙어린 줄 알아.” 가족 안에서의 자신은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더라. 어쩌면 가장 많은 편견과 차별이 생기는 곳이 가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고 가족이 된다는 걸 선택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그 용기와 선택의 무게를 느끼는 중이다.
-벌써부터 내년 아카데미 수상에 대한 기대가 이어지고 있다.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카데미는 잊어달라. (웃음) 그저 영화를 즐겨주셨으면 좋겠다. <미나리>는 너무 아름다운 영화다.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없는, 평범한 우리의 이야기다. 굉장히 보편적인 이야기지만 그 안에 감동, 사랑, 특별함이 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그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