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든 다 고만고만하다. 덕분에 우리는 다른 이의 사연에서도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한편 각각의 사연은 직접 겪은 당사자나 해당 공동체가 아니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고유한 속성이 있다. 문화적 경험이란 공간과 함께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의 터전을 옮긴 이민자들의 경우는 어떨까. <미나리>는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 이민 1세대의 모습을 그린다. 이들이 낯선 땅에 정착해 뿌리내리기까지 겪었던 수많은 사연의 깊이를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이 영화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했다. 단순히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것을 넘어 개인적인 기억에서 보편적인 체험을 찾아내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다듬어내는 솜씨가 놀랍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미나리>는 1970년대 이민자의 기억에서 머무는 대신 지금 현재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민족의 역사를 되짚어 나가고, 마침내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거듭난다. 정이삭 감독은 인터뷰를 시작할 때와 마무리할 때 단 하나의 진심이 전해지길 신신당부했다. “미국에서 미국 제작사와 함께 영화를 찍었지만 우리는 한국 관객을 위해 올바른 방법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인의 디아스포라를 진정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 저희가 최선을 다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미나리>의 저력은 아마도 보는 이를 배려하고 상상하는 바로 이 마음에 깃들어 있을 것이다.
-본래 예일대학교에서 생태학을 전공했다. 어떤 계기로 전공을 바꾸고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나.
=강과 숲이 많은 곳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생태학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엔 의대에 갈 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대학교 4학년이 되기 전,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태어나 처음 보게 되었다. 비(非)할리우드영화를 많이 접하지 못했던 나는 단번에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전공을 바꾸기엔 너무 늦은 시기였다. 필수 교양과목으로 실험적인 비디오 프로덕션 수업에 참여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영화학교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지원한 거의 모든 학교에서 탈락했다. (웃음) 할 수 없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법률 보조사 일을 시작했지만 포기할 수가 없어 다시 한번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다 결국 유타대학교에 합격했고, 마침내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데뷔작 <문유랑가보>(2007)를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찍었다.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었는데 이후 바뀐 것들이 있나.
=2005년 아내와 결혼하고 1년 뒤 여름, 수년간 기독교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아내와 함께 르완다에 갔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혹시 르완다에 영화를 만드는 법을 배우길 원하는 젊은이들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수요가 정말 많았다. 영화를 가르치기 위해서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이 학생들의 학습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수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문유랑가보>를 시작했다. 우리는 르완다 관객에게 선보일 키냐르완다어로 된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동시대 주제들에 관해 탐구했다. 이 영화는 대학살 이후, 몇년 만에 복수를 위해 여행을 떠나는 두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다. 놀랍게도 영화는 2007년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프리미어 상영 이후 몇년간 나는 르완다 여행을 이어가며 르완다에 제작사를 차렸고 2006년부터 가르쳤던 학생들과 함께 활동했다. 이들이 지금은 르완다영화계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로 성장했다. 다만 나는 긴 설명이 필요한 몇몇 이유로 인해 5년 넘게 르완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미나리>의 시나리오를 썼다.
=2018년 초, 미국 소설가 윌라 캐더의 한 인용문을 읽게 되었다. “경외하길 멈추고 기억하길 시작하면서부터” 작가의 경력을 시작했다는 문구가 나를 흔들었다. 그 무렵 나는 가족 자체가 주인공인 가족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고 아칸소에서 있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길 오랫동안 원했다. 윌라 캐더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80여 가지의 기억을 써내려가면서, 나는 한 가족이 작은 농장으로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첫 부분과 가족이 길렀던 미나리를 수확하는 것으로 끝나는 엔딩을 구상했다.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모두 이야기를 가질 수 있도록 스토리의 윤곽을 잡는 가운데 그들의 포물선은 서로 교차하도록 구성했다. 절정만큼은 하나의 이미지에 맺혔는데 함께 마루에서 잠든 가족에 매료되었다. 솔직히 엄청난 의욕으로 초고를 몇주 만에 써내려갔지만 끝내고 나서 읽어 보니 너무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어 거의 포기했었다. (웃음)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지 확신이 없었다.
-시나리오 작업 중 가장 어려웠던 부분과 실제 영화와 차이가 나는 부분은 무엇인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그 전달방식은 어디까지나 픽션다워야 했다. 모든 과정을 겪으며 엄청난 자기 회의감에 시달렸는데 그 결과 두 번째 원고는 쓰는 데 몇달이 걸렸다. 돌이켜보면 괜찮은 고군분투였다. 덕분에 이것이 하나의 픽션으로서 성립할 수 있도록 거리를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 자체가 고군분투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니 쓰면서 고군분투하는 게 적절한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이야기는 좀더 어두운 톤의 에피소드들이 더 있었다. 시나리오에서 아이들은 외부 세계에서 더 많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 엔딩에서도 시간적으로 앞으로 점프하는 게 있었는데, 데이빗(앨런 김)과 앤(노엘 케이트 조)이 더 나이가 들고 실제 농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이스 오버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건 촬영 일주일 전에 바꾼 부분이다. 나는 이야기가 일종의 회고록처럼 문자 그대로 ‘읽히는’ 대신 보이는 그 자체로 존재하길 바랐고 그렇게 연출했다.
-아카데미에서 여러 부문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기생충> 이후 할리우드, 아카데미의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궁금하다.
=언급 자체가 영광이다. A24는 이 영화가 상을 탈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고 아카데미 투표권을 가진 이들이 고려할 만한 영화로 뽑힐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일들이 낯설지만 영화를 잘 전달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020년은 거친 한해였고 지난해에 비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이 불과 일년 전 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걸작이며 마땅히 받아야 할 상을 받았다. 미국인들이 한국어로 된 영화를 보는 데 두려움을 덜 느끼게 되었다는 점에서 <미나리>에도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윤여정, 한예리, 스티븐 연 모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캐스팅이다. 운명적인 무언가가 작동한 건가.
=내 에이전트가 스티븐 연을 맡게 되면서 2019년 1월 그에게 읽어보라며 시나리오를 건넸다. 정말 우연이었는데, 스티븐은 내 사촌과 결혼했지만 우리는 서로 잘 모르고 있었고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기존의 가족관계 때문에 그에게 배역을 맡아야 된다는 부담감을 줄까봐 걱정이 돼 처음부터 무척 조심스러웠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화상으로 서로 대화를 나눴는데, 우리가 훌륭한 팀이 될 것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윤여정 배우에게는 엄청나게 재능 넘치는 국제 프로듀서이자 나의 매우 친한 친구인 이인아씨를 통해 시나리오를 전달했고, 이후 서울에서 몇번 만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윤여정 배우의 영화를 모두 본, 엄청난 팬이었기에 그녀가 영화에 출연하기로 동의한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작품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 배우다.
“생각하거나 실수할 시간도 없었다”
-한예리 배우의 경우엔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한편 한예리 배우에게도 이인아씨를 통해 시나리오를 보냈다. 한예리 배우가 맡은 모니카는 침묵 속에서 많은 영혼과 깊이를 요구하고, 눈짓과 몸짓만으로도 표현되는 엄청난 범위의 연기가 필요한 캐릭터다. 한예리 배우는 모든 면에서 특별했다. 하지만 마냥 순탄하진 않았다. 좋은 느낌을 가진 첫 만남 뒤 한예리 배우가 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영화에 출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배역에 한예리 배우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완전 심란해졌다. 제작사에 촬영 날짜를 바꿀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때 한예리 배우가 우리의 일정에 맞출 수 있도록 자신의 스케줄을 적극적으로 조정해주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이 영화에 한예리 배우가 출연하는 방법을 찾았던 것이 내겐 가장 큰 기적이었다.
-두 아역배우 노엘 케이트 조와 앨런 김의 캐스팅도 궁금하다. 그야말로 보석 같은 발견이다.
=캐스팅 디렉터이자 한국계 미국인인 줄리아 김이 다양한 한국계 미국인 단체와 네트워크에 비전문 아역배우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손을 썼다. 앨런과 노엘 둘 다 비디오테이프로 오디션에 응모했고, 처음부터 돋보인 아이들이다. 그들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에도 캐릭터를 유지하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진, 아주 재능 넘치는 배우다. 솔직히 내가 어떠한 지시나 특별한 지도를 한 건 없다. 촬영장에서 배우들이 서로 최선을 다하도록 도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모든 베테랑 배우들이 아역이 잘해낼 수 있도록 돕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칸소를 무대로 하지만 실제론 털사 인근에서 6주 가량 촬영했다.
=사실 아칸소에서 촬영하고 싶었는데, 제작사가 오클라호마의 세금 인센티브와 인프라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털사에서 한 시간 반쯤 가야 하는 곳에서 자랐는데 그쪽 지형이 내가 자란 곳과 비슷해 보였다. 촬영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시간이었다. 아주 적은 설정과 테이크만으로 매우 빠르게 촬영했기 때문이다. 한국 현장은 잘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아이들은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할 수 있다. 앨런이 거의 모든 장면에 나오기 때문에 나에겐 이 부분이 어려웠다. 생각하거나 실수할 시간도 없었다. 우리가 결국 해냈다는 놀라운 사실이야말로 우리 팀이 얼마나 잘해주었는지를 대변한다.
-한예리 배우는 자신이 겪은 한국의 독립영화 현장과 차이점이 거의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과정으로 A24가 제작을 맡게 되었는지 미국 영화 현장의 프로세스가 궁금하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미국보다는 한국에서의 영화 현장이 더 감독 중심이라고 알고 있다. 플랜B와 A24는 감독이 각본까지 쓴 영화를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한국의 시스템과 비슷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A24는 대본과 제작 전략, 제작 인력, 영화 완성본에 대한 최종 승인과 자금 조달을 담당했다. 그들은 감독 중심적이며 내게 많은 자유를 제공해주었다. 시나리오와 최종 편집본에 대한 의견은 무척 건설적이었으며 우리는 그 어떠한 다툼도 하지 않았다. 공동 작업자인 플랜B 역시 마찬가지다. 크리스티나 오와 나는 대본에 대해 많은 창의적인 토론을 나누었고 그걸 바탕으로 촬영감독, 작곡가, 프로덕션 디자이너팀을 구성했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을 다루는 영화가 최근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 A24는 룰루 왕이 감독을 맡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의 경험을 다룬 <페어웰>을 배급했다. <미나리>는 A24가 제작, 투자까지 맡은 첫 번째 아시안 아메리칸 작품일 것이다.
-배우들과 함께 말투나 표현 등 언어의 뉘앙스에 대해 많은 회의를 하고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다.
=배우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에 추가한 것이 너무 많다. 배우들과 서울에서 몇번 만남을 가지며 역할과 대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멋진 아이디어들을 많이 접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윤여정 배우는 순자가 데이빗에게 밤을 입으로 뱉어서 건네주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었는데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다. 한예리 배우는 모니카가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을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모니카가 나무에 그네를 만드는 장면을 넣었다. 털사에 모두가 모이고 나서는 한국어 통역사이자 시나리오 슈퍼바이저로 활약한 스테파니 홍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리는 가족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한국어 대화의 대사들을 다듬었고 더 많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었다.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의 예전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아메리칸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온 두 사람은 대도시에서 어떤 사건을 겪고 시골로 찾아들어온 것처럼 묘사된다.
=대본에서는 캐릭터에 대한 배경을 좀더 설명했고, 정보를 전달할 만한 장면을 많이 촬영했다. 하지만 첫 번째 편집본이 2시간45분 길이가 되면서 편집 과정에서 그러한 배경은 삭제하자고 결정했다. 가끔 배경 이야기가 너무 구체적이면 아이러니하게도 관객과 거리가 더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관객은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판단하고 정신분석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각각의 캐릭터들이 이해받을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동기가 있는지, 아니면 너무 지나쳐서 관객이 거리를 두는지를 고민하고 적절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 전체는 데이빗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아버지 제이콥의 시선도 그만큼 중요하다.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제이콥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많이 묻어난다고 밝혔는데.
=시나리오를 쓸 때 이야기 속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을 상상하고 이해하려 한다. 제이콥이나 데이빗에게만 내 모습이 투영된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캐릭터에게서 나의 또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고 그들 모두와 나를 동일시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자전적 이야기란 그런 것 같다. 덧붙이자면 나는 지금 제이콥의 나이이고, 데이빗 나이 또래의 아이가 있다. 덕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는 내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했던 것만큼 노력하진 않았지만 나는 실패하는 것이 어떤지 알고 있고, 꿈을 가지면서도 가족을 위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 결혼이 얼마나 필요한지, 또한 얼마나 깨지기 쉽게 느껴지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큰딸 앤은 수줍은 성격을 지녔지만 동생을 살뜰히 돌보는 것으로 나온다. 반면 엄마 모니카와 소통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 반면 아들 데이빗은 몸이 아픈 탓에 엄마와 교감하는 장면들이 꽤 많다.
=부모의 삶은 격변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꿈을 찾아 조국을 떠난 그들은 외국 땅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아무런 지원도 본보기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기묘한 균형감을 스스로 찾는다. 앤은 종종 나이가 어린 엄마처럼 군다. 데이빗은 어리지만 가족이 직면한 어려움의 깊이를 배워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이 영화의 첫 부분에서 많은 것을 목격하고 반응하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목격한다. 반면 부모는 일을 해야 하고 더 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아이들은 이 여정의 모든 것을 목격했기에 비로소 할머니를 집으로 다시 데려오는 중요한 행동을 할 수 있다.
-마지막 대화재는 충격적이다. 감독이 겪은 실제 경험에서는 훨씬 더 큰 화재가 있었다고 들었다.
=영화 중간 지점부터 파멸의 기운을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나는 이 화재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느껴지길 바랐다. 이런 종류의 파괴로부터 구원의 방식으로 어려움을 헤쳐나오는 것이 가능할까? 이 영화를 통해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질문이다. 화재가 일어났을 당시와 그 이후에 일어나는 것들은 가족과 그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을 맞이한다. 아빠 제이콥과 아들 데이빗이 미나리를 함께 수확하기 이전에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는데 화재는 그중 하나다.
-감독이 얘기한 이 영화의 결말, 화재 이후 미나리 밭에서 미나리를 채취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마지막 장면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미나리를 수확하는 이 엔딩은 작업 초반에 결정된 부분이다. 나의 할머니가 심으셨던 미나리는 실제로 아무런 노력 없이도 우리가 심은 그 어떤 작물보다 잘 자랐다. 부모님이 일하러 가신 사이에, 나는 할머니와 함께 그곳에 가곤 했는데 마치 우리가 문명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걸 생각할 때 내 안의 무언가가 불쑥 떠올랐다. 이것이 영화의 엔딩이 되어야 하고, 이 영화의 제목이 ‘미나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관객이 감독에 대해 생각하지 않도록
-촬영 당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무엇인가. 또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장면이 있다면.
=한밤중에 순자가 데이빗을 달래는 장면이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고 가장 애착이 가기도 한다.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써내려간 장면이다. 촬영하는 와중에 순자가 데이빗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기 시작하자 나도 덩달아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후 편집실에서 한참을 보며 그 장면을 애초에 원했던 방식으로 다루지 못했단 걸 깨닫고 후회를 많이 했다.
-“할머니는 할머니 같지 않다”라는 손자의 말처럼 할머니는 독특하다. 프로레슬링을 좋아하고 손자에게 화투를 가르친다. 이에 호응하듯 할머니에게 오줌을 먹이는 등 디테일한 에피소드가 정겹다. 이것 역시 실제 경험에서 따왔나.
=많은 것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표현되거나 전달되는 방식은 다소의 각색이 있다. 오줌을 먹이는 건 상상에 맡기겠다. 아무튼 나는 정말 나쁜 손자였다. (웃음)
-커뮤니티에 속하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초원의 광활한 풍경, 대비되는 바퀴 달린 집이 주는 느낌 등 덕분에 이 영화가 마치 서부극의 일종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요소들이 이민자 커뮤니티 외에 보통의 미국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가는 측면도 있을까.
=논평에 감사드린다.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옛날 서부극들, 특히 <빅 컨츄리> <에덴의 동쪽> <분노의 포도> <자이언트>와 같은 영화들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나는 <미나리>가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개념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가슴 아픈 감정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농부들과 시골의 미국인을 상기시키길 원한다. 미국 사회에는 서로간에 너무나 많은, 부자연스러운 분열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민자와 농부는 서로 다른 이념적 개념에 속해 있다. 나는 그 두 가지 집단 모두와 함께 자랐고 그들 모두에게 큰 친밀감을 느낀다. <미나리>를 만드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제작진 중엔 오클라호마에서 온 비이민자 출신자가 있었는데, 그는 농장이나 트레일러에서 할머니와 함께 컸기 때문에 이 작품에 참여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그 밖에 현장에는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 자녀, 아메리칸 원주민도 있었다. 이처럼 다채로운 배경을 가진 이들이 프로젝트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함께 일했다. 결국 <미나리>는 보편적인 모든 인간들을 위한 영화다. 그렇게 해석되길 바란다.
-예산만 놓고 보면 작은 규모의 영화지만 화면이 좁거나 작아 보이지 않는다. 구성은 미니멀한데 화면은 탁 트인 장면들이 많아서,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도 답답하다는 느낌이 거의 없다.
=그렇게 말해줘서 감사하다. 적은 예산과 미니멀한 스토리를 감안했을 때 촬영 범위나 프로덕션이 커질 순 없었다. 하지만 주제적으로는 영화가 어떠한 서사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길 원했다. 라클란 밀른(촬영감독)과 나는 고전적인 테크니컬러의 할리우드영화를 연상시킬 수 있도록 광각과 시네마스코프 방식을 사용하길 원했다. 우리는 장엄하면서도 숨결의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모든 이미지를 열어두기 위해 노력했다. 실내촬영의 경우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도 함께 보면서 친밀한 느낌의 실내와 방대한 실외가 섞일 수 있도록 애썼다.
-미나리의 녹색과 개척 농장의 초록색, 그리고 늦은 밤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 영화이기도 하다.
=나 역시 녹음이 우거진 곳에서 자랐다. 농장 장면을 위해서는 푸르른 녹색 팔레트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곳에는 매미나 개구리 소리가 늘 함께하는데 나는 이런 소리들을 배경음악처럼 듣고 자랐기에 사운드트랙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청했다. 스프링 피퍼(spring peeper)라는 특정한 종류의 청개구리가 기억난다. 다만 이미지나 사운드가 이러한 분위기적 요소에 완전히 압도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한편으론 우화나 꿈같은 느낌을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모순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관객이 감독에 대해 생각하지 않도록 최대한 스타일리시한 선택을 절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적인 느낌만 주는 정도로만 배경에 대한 주목하고 캐릭터와 스토리에 많은 포커스가 맞춰지는 게 목표였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의 밤은 칠흑같이 어둡고 무섭지만 달빛으로 밝혀지는 장면들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좋다. 굳이 설명하자면 빛과 어둠을 감정적으로 가지고 놀고 싶었다. 햇볕이 관대하지 못하거나 밤이 미스터리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조명에는 어떤 상징이나 형식적인 이유를 따로 배치하진 않았다. 우리가 빛을 촬영한 방식은 언제나 영화의 감정적인 관점을 선사하기 위함이었다.
-<미나리>는 미국영화지만 한국 관객은 마치 한국영화인 것 같은 정서적 친밀감을 느낄 것 같다. 영화의 국경이 낮아지고 경계가 허물어지는 요즘 시대에 내셔널 시네마를 찍는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국적에 관해서라면 나는 마치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로 말하고 어려움 없이 돌아다니지만, 정신적으로는 늘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반대로 한국에서 지낼 땐 한국어로는 나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다른 한국인들과 같은 삶의 경험을 공유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 어느 정도의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그 와중에 영화는 내게 수년간 고향과 같은 감정을 주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를 볼 때는 대만에,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를 볼 땐 이탈리아에, 장 르누아르의 영화를 볼 때는 프랑스에 나의 고향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는 단순히 국가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의 자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정 영역에 도달한 영화에 대해 국적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나는 언제나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