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에게서 문득 편안함을 느낄 때처럼, 배우 강길우는 아직 낯선 이름이지만 이상하리만치 미덥고 묵직하다. 박근영 감독의 데뷔작 <한강에게>(2018)로 본격적인 장편영화 활동에 시동을 건 그는, <파도를 걷는 소년>(2019), <마음 울적한 날엔>(2020)을 거쳐 올해 <정말 먼 곳>에서 그동안 집약한 내공을 펼쳐 보인다. 미술학도에서 연기로 전향해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서 연기의 태도를 다진 뒤, <명태> <시체들의 아침> <마이 리틀 텔레비전> 등의 단편영화에서 꾸준히 활약한 강길우는 자신만의 궤적을 흔들림 없이 지켜온 배우다.
<정말 먼 곳>에서 그가 연기한 진우는 연인 현민(홍경)과의 사랑을 곁눈질하는 사람들로부터 고통받고, 동생 은영(이상희)에게 오랫 동안 함께한 딸(김시하)을 내주어야 할 처지에 있다. 말 없는 동물처럼 묵묵히 자기 삶의 무게를 진 남자에게서 비극을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지만, 강길우는 그 안에 하루에도 수십번 빛과 그림자를 달리하는 풍경처럼 온갖 감정의 편린을 빼곡히 채워넣었다. 강길우만의 차분한 속도, 그리고 궁금한 깊이를 만났다.
-첫 장면에서부터 양털을 깎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강원도 화천에서 목장 운영을 생업으로 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 외양부터 완전히 변신했더라.
=공간에서 이질감이 없어 보였으면 했다. 머리도 수염도, 기를 수 있는 건 다 길렀다가 촬영 한두달 전에 방향을 바꿔서 완전히 밀어버렸다. 태닝을 했고, 소처럼 우직한 모습이 보였으면 해서 체중도 10kg 증량했다. 배우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기 모습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니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스갯소리로 주변에 나를 비주얼 배우라고 소개한다. 멋있어서가 아니라, 캐릭터에 필요한 비주얼을 철저히 맞춘다는 의미로. (웃음)
-진우는 이미 산속에서의 삶에 충분히 적응한 사람처럼 보인다. 박근영 감독과 촬영 전부터 오래 함께하면서 메소드적으로 접근한 것으로 안다.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우는 것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것을 버리는 게 더 중요했다. 영화를 찍기 5~6개월 전부터 일부러 다른 작품은 하지 않고 <정말 먼 곳>에만 몰두했다. 외양부터 태도, 극중 세계가 주는 고독함까지 다른 작업과는 섞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게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딸을 키우는 역할이라, 한달 정도 농구하러 스포츠센터에 오는 아이들을 태워주는 운전기사로 일해보기도 했다. 덕분에 배우와 달리 늘 규칙적인 노동을 하는 진우의 리듬도 알아갈 수 있었다.
-화천에 도착한 현민과 마중나온 진우가 포옹할 때 시간이 잠시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은 순간이 있다. 영화 내내 두 배우가 무척 친밀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홍경 배우와는 숙소에서 같은 방을 썼다. 촬영 기간인 한달 내내 거의 잠만 잘 수 있는 좁은 방에서 함께했는데, 매일 밤마다 장면과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레 케미스트리가 생기더라.
-과거를 설명하지 않는 영화지만 진우가 게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척받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떠나온 인물임은 알 수 있었다.
=서울이라는 큰 도시에서, 실은 매우 좁고 갑갑한 곳에 갇힌 느낌으로 살지 않았을까, 그래서 말문을 닫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영화에서 잠깐 진우와 현민이 같은 대학에 다녔다는 정보가 나오는데 진우가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자기 정체성을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헤아려보았다. 진우의 과거를 생각하면 안쓰럽고 숨이 막혔다.
-진우는 현민과 은영 외에도 목장 주인 중만(기주봉), 그의 딸 문경(기도영), 그리고 중만의 모(최금순)와 유사 가족으로서 긴밀한 관계를 이룬다.
=진우를 가운데 두고 모두가 연결된 구조라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둘이 나오면 50%씩, 셋이 나오면 33%씩 나눠 가진다는 마음으로 상대 배우를 믿고, 듣고, 바라봤더니 그제야 다가오는 게 있더라. 연기의 원론에 충실했달까. (웃음) 중만도 진우처럼 혼자 딸을 키웠고, 역시 홀로 중만을 키운 할머니는 이북을 떠나온 타향민이라는 점에서 진우와 비슷하다. (할머니 캐스팅에 고심하던 박근영 감독에게 강길우가 직접 이홍매 감독의 외할머니이자 연길 출신의 연기 베테랑인 최금순 배우를 소개했다.-편집자)
-연기를 하기 전엔 미술을 했고 뮤지컬에서 노래 실력도 증명하지 않았나. 발산할 재능이 무척 많은 배우인데 독립영화에서 오히려 비우고 절제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하하, 노래는 소싯적에…. 이런 형태로 시작하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비워야 또 채울 수 있으니까. 앞으로 보여드릴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 스스로도 기대가 된다. 다만 구태여 많은 작품을 하기보다는 한 작품을 가능한 한 더 잘하고 싶다. 배우는 맡은 작품의 수가 아니라 ‘좋은 작품’으로 기억된다.
-출연작 <더스트맨>도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소속사 없이 혼자 활동하고 있는데 고민도 많아질 시기이겠다.
=간간이 매체 출연 제의가 있는데 관련해 산업 속에 들어갈 때 배우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인 지점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체감하고 있다. 신념과 방향성을 어떻게 다듬고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할지, 그걸 믿어줄 회사와는 또 어떻게 만나면 좋을지 차근차근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