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정말 먼 곳' 홍경 - 고정 관념을 깨고
2021-03-11
글 : 조현나
사진 : 백종헌

맑게 웃는 해사한 청년. 배우 홍경의 첫인상은 곧바로 <정말 먼 곳>의 현민을 떠오르게 한다. 홍경이 연기한 현민은 진우(강길우)의 오랜 연인으로, 그를 따라 강원도 화천으로 이주한 인물이다. 현민은 성당에서 시를 가르치며 마을 주민들과 허물없이 어울린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정돈된 웃음 아래로 감정을 꾹꾹 눌러담은 현민의 이면이 드러난다.

배우 홍경은 ‘현민은 이 또한 이해할 사람’이라는 박근영 감독의 조언을 바탕으로, 차별적인 시선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현민의 감정을 가만히 헤아렸다. 지난해 <결백>에서 자폐 장애를 가진 정수 역으로 관객과 마주했던 홍경은 시인 현민으로 분한 채 다시 스크린 앞에 섰다. 현민이 차분히 시를 읊듯, 홍경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정말 먼 곳>에 합류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독립영화를 하고 싶어서 2018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열린 ‘배우 프로젝트-60초 독백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그때 운 좋게 입상했고, 해당 영상을 본 박근영 감독님이 연락을 주셨다. 그렇게 현민을 만났다.

-현민이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했나.

=초중반까진 현민의 행동이 이해가 안돼 “여기서도 가만히 있어요? 여기서도 감정 표현을 하지 않나요?” 하고 감독님에게 질문을 많이 했다. 그만큼 현민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친구다. 그래서 시인으로서의 자세, 이런 것보다 한 개인으로서의 현민의 속내를 파악하는 걸 우선시했다.

-확실히 현민은 진우에 비해 많이 누르는 느낌이 든다. 식당에서 둘을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에게 진우는 화를 참지 못하고 대적하는데, 현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처음 카메라가 내 뒷모습만 잡는다고 했을 땐 괜찮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고선 현민의 성격이 잘 드러난 신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상대하지 않고 우리가 넘겨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현민의 자세는 그랬던 것 같다. 성소수자로서 마주해온 편견에 지쳐서 현민은 이미 사람들에게 벽을 친 상태다. 직접적으로 싸우기보다는 최대한 부딪히는 걸 피하고, 양보하는 걸 택한다. 그게 진우와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진우를 연기한 강길우 배우와의 합은 어땠나.

=길우 형은 올곧이 서 있는 오래된 나무 같다. 그만큼 여유가 있고 내가 어떤 걸 던져도 열린 자세로 받아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항상 의지가 됐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이들의 끈끈함을 보여줄 수 있을지 대화를 많이 나눴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깨고 성별이 같아도 사랑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현민 역을 준비하면서 참고한 영화나 인물이 있다면.

=음, 영화는 없다. <결백> 때도 그랬지만 다른 배우들의 작품을 참고하지 않는 게 내 원칙이다. 대신 실제 시인들의 강연 영상을 많이 봤다. 감독님이 추천해주신 영상을 보면서 어떤 톤으로 낭독하고,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참고했다.

-촬영이긴 했지만 강단에 선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다.

=맞다. 사실 소설 위주로 읽는 편이라 시 자체도 낯설었다. 하지만 시 강의를 하려면 시를 잘 알아야 했다. 시뿐만 아니라 시인들의 사고도 배우고자 했다. 강연 영상을 보면서 느낀 건 무엇을 가르치기보다 눈을 마주치며 교감을 시도한다는 거였다. 내가 강의할 때에도 그런 태도를 많이 참고했다.

-박근영 감독과 시인, 그리고 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시인은 우울하고 잘 웃지도 않고, 삶과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할 것이란 고정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감독님이 시인이라고 항상 어둡고 진지하지만은 않다고, 이들도 한명의 개인이고 시를 쓰는 건 또 다른 영역이라고 말씀해주셨다. 현민도 표면적으론 밝은 면을 가진 친구였고. 그런 것들이 시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에 도움이 됐다.

-극중 현민이 읊는 시 <정말 먼 곳>은 영화의 메시지가 담긴 중요한 작품이다. 때문에 낭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것 같다.

=어떤 템포로, 또 어떤 톤으로 읽어야 할지 사전에 상의를 많이 했다. 감독님은 느끼고 받아들이는 건 사람들의 몫이고,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너무 차갑지도 너무 감정적이지도 않게 읽는다는 게 참 어렵더라. 시에서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문단은 특히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그곳에 있을 수 없어서 떠나왔는데, 먼 곳에서조차 힘들어지는 진우와 현민의 상황이 잘 드러난 구절이라 생각했다.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는 부분도, 우리의 관계를 의심하고 나 자신을 의심하는 일이란 의미로 와닿아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현민은 “학창 시절 인싸였다”고 농담하며 웃는다. 실제 홍경 배우의 학창 시절은 어땠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영화 보는 걸 정말 좋아했다. 본 거 또 보고, 학교 끝나면 곧바로 영화관에 가는 게 일이었다. (웃음)

-배우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해 연기에 매력을 느꼈다던데, 배우가 된 현재는 어떤 마음으로 연기에 임하나.

=연기에 대한 마음가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인물의 내면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됐다. 시나리오를 읽고 내가 직접 연기를 해야 하니까 맡은 인물이 처한 상황, 배경, 상대와의 관계 등을 그려보게 된다. 배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연기의 매력인 것 같다. 그래서 영화도 인물 중심의 영화를 좋아한다.

-SNS를 보면 직접 찍은 사진과 그린 그림들이 많다. 연기 외에 사진과 그림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그림도 정물화보다는 인물화를 주로 그리고, 사진도 사람들을 찍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 그런 게 궁금하다. 물론 연기할 때만큼 깊게 생각하진 않지만. (웃음) 확실히 내가 인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특정 역할보다는 20대가 겪는 성장통을 잘 그려내고 싶다. 20대는 주로 밝고 천진하게 그려질 때가 많은데, 그보다는 그 안에 담긴 무게를 남은 20대 동안 잘 드러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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