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는 무수한 거리들이 있다. 의도된 것과 인식되는 것 사이의 거리.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의 거리.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거리. 느껴야 하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거리. 그 모든 거리의 거리의 거리에 관해.
아이, 게이 그리고 양
한국 멜로영화가 실종되었다는 표현은 분명 과장이다. 그렇다 해도 멜로영화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멜로의 위기는 장르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승리호>에 대해 ‘그래도 멜로로 빠지지는 않았다’며 긍정하는 반응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서사의 흐름 속 멜로는 피해야 할 클리셰로 인식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애 멜로에 한정된 이야기다.
논의의 초점을 퀴어 멜로에 맞추면 사정은 달라진다. 2016년은 한국 멜로영화를 이야기할 때 기억해야 할 해다. <아가씨> <연애담> 등 레즈비언 멜로와 함께 <아수라> 등 동성 군집 영화가 퀴어의 맥락에서 해석되며 퀴어 멜로의 폭을 넓혔다. 이들은 두드러진 팬덤을 형성하며 멜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듯 보였다. 이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벌새> <아워 바디> 등 복합장르 속 퀴어 멜로 실험과 정통 퀴어 멜로 <윤희에게> 등 주목할 만한 작품이 연이어 발표되며 흐름을 이어갔다. 바야흐로 ‘멜로는 퀴어다’라고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다.
오늘날 멜로영화에서 공통으로 감지되는 특징은 신파와의 거리감이다. <신과 함께> 시리즈, <반도>와 같은 블록버스터가 세대를 아우르는 고유한 파토스의 요소로 신파를 끝내 버리지 못할 때조차, 멜로는 우직하게 신파를 외면했다. 멀리는 70~80년대. 가깝게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멜로영화가 곧 신파영화로 인식되던 상황과는 확연히 대조된다.
<윤희에게>에서 윤희(김희애)와 준(나카무라 유코)이 재회하는 순간, 눈물과 울음의 감정적 파토스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윤희와 준의 일렁이는 얼굴, 그것으로 충분하다. 카메라는 이들의 거리를 갑작스레 좁히는 대신 밤거리에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 여전히 유지되는 거리감을 보여준다. 거리감의 매개인 편지 형식도 주효했다. <아가씨>의 케이퍼 무비, <벌새>의 성장 영화, <불한당> <아수라>의 범죄 누아르 등 이들 작품이 취한 장르적 성격은 은연중에 멜로가 확보해야 할 거리감을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거리감의 몇 가지 차원
박근영 감독은 <정말 먼 곳>을 만드는 데 있어 거리감이 중요했음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그러나 거리감이 중요한 이유나 그것의 실체에 관해서는 말을 아꼈다. 여기에서는 거리감을 가능하게 한 요소들을 꼼꼼히 짚어보는 데서 출발하려 한다. 거리감은 먼저 한국영화에서 주로 재현되었던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실행되었다. 강원도 화천을 배경으로 한 로케이션 영화인 이 작품은 그림 같은 풍광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숏이 포함되어 있다. 풍경숏은 장소의 실제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보다는 영화적인 장소를 발견하는 통로로 보인다. 양을 방목하는 초원과 소 축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농장의 삶 역시 주류에서 벗어난 특수한 형태로, 영화가 필요로 하는 진귀함의 기운을 불러온다. 영화가 향수를 작동시키는 방식은 이렇듯 동시대성에서 탈각되었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것들을 그러모으는 것으로 시작된다.
<남매의 여름밤>과 <소리도 없이> 등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단언하자면 우리는 공간에 새겨진 낯선 시간대와 그것이 불러오는 향수가 감정의 신파를 빠르게 대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멜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장소, 인간과 기억처럼 비인간을 대상으로 한 감정으로 대체되었다. 어떤 시간과 장소에 대한 향수는 상실한 것을 되찾기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긍정하며 상실하기를 선택하려는 감정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은 데서 만족하는 것만큼이나 상실을 인지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다. 그러므로 향수의 정서에는 얼마간 기만적인 데가 있다.
아름다운 전원 풍경 덕에 영화는 <브로크백 마운틴>과 같은 퀴어 멜로영화와 종종 비교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원일기>와 같은 농촌 배경 가족 드라마를 소구하는 측면이 있다. 대가족의 식사 장면에서 특히 그렇다. 카메라는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식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채 관조한다. 식사 장면에서 드러나는 거리감은 카메라의 이동이 제한적이던 과거의 촬영방식, 특히 세트를 활용하던 TV드라마의 촬영방식을 연상시킨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누군가는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인물의 행방은 식사 장면의 변화를 통해 보고된다. 처음에는 5명이 단란하게 꾸려가던 가족공동체는 현민(홍경)과 은영(이상희)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6인, 7인의 식탁으로 변형된다. 네모난 좌식 테이블 식탁은 인물 수에 따라 자유자재로 늘었다 줄어드는 마술이라도 부리듯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유지된다. 7인의 식탁은 명순(최금순)이 죽고, 현민이 사라지면서 다시 5인의 식탁으로 복귀한다. 식탁이 지닌 유동성은 고정불변의 가족공동체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동시에 넉넉히 대가족을 품을 가능성을 기억하게 한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은 관객에게 직접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속에 갇힌 채 간접적으로 목격된다. 외출 후 돌아온 진우(강길우)와 현민이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다정한 스킨십을 나누는 모습은 블라인드가 반쯤 열린 사무실의 넓은 창을 통해 내다보인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하던 중만(기주봉)의 가까이에 선 채, 마치 이 장면을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군다. 간밤에 술에 취해 잠든 진우와 현민이 서로를 껴안고 누운 모습을 들키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설(김시하)을 찾던 문경(기도영)의 동선을 따르다 열린 방문 사이로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척한다.
거리감은 특히 명순의 죽음을 알리는 숏에서 두드러진다. 우시장 시퀀스 말미에 카메라는 인물들이 모는 트럭에 설치된 채 건너편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진우와 현민, 중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카메라와 인물의 위치는 멀고, 인물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잠시 후 현민이 그곳에서 가만히 걸어나와 카메라 옆 조수석에 앉는다. 이때 문경이 원경에서 두 사람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보인다. 그는 어딘가 불길한 몸짓으로 중만에게 전화기를 넘기더니 끝내 오열하며 주저앉는다.
영화는 명순의 부고 소식을 굳이 현민을 소외시킨 상황에서 보여준다. 멜로영화의 거리감이 인물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필연적인 거리를 보여주는 것에 의해 정념을 작동시켰다면, <정말 먼 곳>에서 거리감은 감정에 앞서 존재하며, 오히려 거리 그 자체를 또렷이 인식시키는 데가 있다.
영화의 거리감은 리얼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리얼함을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농촌을 표현하기 위한 분장 같은 것이다. 설과 문경, 진우는 짙은 갈색 피부를 지니고 있다. 특히 설과 문경의 피부색은 일부러 통일감을 준 것처럼 흡사하다. 같은 지역에 살았다 해도 생활습관, 행동반경, 타고난 성질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의 통일된 낯빛은 어딘가 어색하다.
매끈하게 그을린 배우들의 구릿빛 피부는 이들을 현민과 은영 같은 외지인과 분명히 구분시키는 요소일 뿐 아니라 다른 마을 주민과도 구분하는 특수한 표식이다. 강길우 배우는 인터뷰를 통해 피부색과 헤어스타일을 비롯해 외적으로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애를 썼다고 털어놨으며(<씨네21> 1296호 씨네인터뷰 ‘편안함의 내공’) 기도영 배우 역시 현지인처럼 보이기 위해 선탠은 물론 추가로 분장을 해야 했다고 밝힌 바 있다(<씨네21> 1297호 후아유 ‘또 다른 시작’).
리얼리티를 위해 수행되었을 이러한 노력은 실제로는 정반대의 효과를 불러온다. 그을린 얼굴은 배역과 배우를 밀착시키기보다는 떨어뜨리는 기능을 한다. 분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배우가 그 배역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거꾸로 증명한다. 이는 흠결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배우 김혜자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발언이 그것의 의미를 일러준다. 당시 <전원일기> 리부트 프로젝트를 기획하던 <무한도전>은 캐스팅을 위해 원작 출연진을 찾는다. 김혜자는 이들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인상적인 이유를 밝혔다. 자신이 배역을 연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그보다 턱없이 어렸기 때문이었으며, 실제 인물과 비슷한 나이가 된 뒤에 하는 연기는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캐릭터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필연적인 거리감에 대해 말한다. 분장한 배우들은 그들과 배역의 거리감을 고백하는 동시에 관객에게 이야기로부터의 거리두기를 허용한다.
나아가 카메라는 상황의 연극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거리감을 새긴다. 장례식장 장면에서 카메라는 영정사진이나 유족의 슬픔, 식사하는 문상객을 보여주는 대신 이들과 떨어져 한쪽 구석에서 설이 다른 아이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풍경에 붙들려 있다. 설이 다른 아이의 장난감을 억지로 빼앗고, 빼앗긴 아이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들은 단번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주의를 끈다.
진우는 설을 나무라며 바깥으로 데려가려 하는데, 은영은 진우의 훈육을 제지한다. 말다툼을 하던 두 사람에 의해 진우가 설의 친부가 아니며 현민과 연인 관계라는 사실이 은연중에 폭로된다. 이 소동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카메라는 차분히 줌아웃하며 아이들의 작은 다툼이 어른들의 과거를 헤집은 뒤, 마을의 사건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효율적으로 짚는다. 사건이 벌어진 공간은 일종의 무대다. 이 우발적 폭로극이 필요했던 이유에 관해서는 더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 물론 이 장면은 동성애자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편견이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 진우가 현민과 설 중 한쪽을 선택하게 된다는 점이다. 진우의 선택은 일단 사랑보다 가족이다.
멜로를 우회하여 가족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가족의 형태에는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 명순, 중만, 문경으로 이뤄진 가족은 3대가 함께 살지만, 누구도 짝을 이루며 살진 못한다. 명순은 남편을 잃었고, 중만은 40살이 되던 해부터 문경을 홀로 키웠으며, 문경에겐 아직 애인이 없다. 문경과 진우는 잘 어울리는 한쌍처럼 보이지만, 현민의 등장으로 그 가능성은 소거된다. 진우와 현민은 쌍을 이루지 못하는 가족공동체에서 유일한 짝이 된다.
한쪽에는 대를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쌍을 이룰 수는 없는 반쪽 이성애의 종적 세상이 존재하며, 반대편에는 쌍을 이룬 동성애의 횡적 세상이 존재한다. 진우가 설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종횡으로 분리된 두개의 세계를 교접하는 역할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떠맡았기 때문이다. 진우의 설에 대한 감정은 선명하게 설득되지 않는다. 은영이 헤어진 전 부인이고, 설이 실제 딸이라면 진우가 설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더 설득력을 지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은영과 진우를 쌍둥이 남매로 만들면서 진우의 인생 역사에 이성애의 존재를 삭제한다.
표면적으로 진우는 사랑 대신 가족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다시 사랑을 선택하거나 모두를 잃을 가능성도 있다. 설에 대한 진우의 감정 역시 모성으로 정리하기는 애매한 지점이 있다. 진우가 설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가족 같은 이웃, 그리고 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우가 처한 상황이 던지는 질문은 게이의 사랑이 마을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가 아니라 게이가 아이와 함께 가족을 형성하며 살 수 있을까의 문제에 가깝다. 가족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에 관해 사람들의 편견이라고 정리하고 싶을 테지만, 그에 앞서 영화는 게이의 사랑과 아이가 공존하는 이미지를 그리는 데 주저한다.
해질녘 신비로운 색을 드러내는 물가에서 펼쳐지는 진우와 현민의 사랑은 그 사이에 아이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진우와 현민, 설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도 설은 종종 눈치 빠른 어른처럼 프레임아웃하며 두 사람의 애정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두 사람의 사랑은 중만과 문경의 시선을 통해 목격되지만, 설이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미지의 것으로 남겨둔다. 설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그려진다. 편견 어린 마을 사람들만 삭제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질 것 같은 기분은 상상이거나 바람일 뿐이다.
마지막 시퀀스는 진우와 은영, 설이 차를 타고 화천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때 문경이 급박하게 이들을 불러 세운다. 이들이 불려간 자리는 양이 분만 중인 헛간이다. 사람들 곁에서 다른 양들도 분만 중인 양을 에워싼 채 가만히 지켜본다. 양의 분만이 특별히 드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장면은 마치 성스러운 계시처럼 공들여 묘사된다. 태어난 양을 보여주는 숏 직전에는 진우의 얼굴 정면 클로즈업숏이 붙는다. 관객은 새끼 양의 탄생을 진우의 시점숏으로 마주한다.
혹은 반대로 곧 태어날 것의 시점에서 진우의 얼굴을 본다. ‘내가 설을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진우의 절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지만, 출산 장면을 바라보는 진우의 시선을 통해 진우의 설에 대한 감정을 짐작해볼 수는 있다. 이 장면이 진우의 출산일 수 있다면 출산은 신체를 경유한 경험 전에 시각에 의한 출산이다. 시각을 통한 경험이 실제와 같을 리는 없지만, 출산이 불가능한 몸에 있어서는 누군가가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을 성실히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이 출산에 값하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이 영화가 제시하는 출산과 양육에 필요한 거리감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먼 곳>이 게이의 양육이 지속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때, 영화와 비교할 만한 작품은 게이의 생로병사에 관한 신랄한 로드 무비인 알랭 기로디의 <스테잉 버티컬>(2016)이 아닐까 싶다. <스테잉 버티컬>에도 게이와 아이, 그리고 양이 등장하며 거리감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거리를 두어야 할 순간과 가까이 따라붙어야 할 순간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조절한다. <정말 먼 곳>의 진우가 능숙하게 양털을 깎으며 현지인으로서 그 공간에 밀착됨을 보여주었다면, <스테잉 버티컬>의 리오(다미앵 보나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곳에 이방인으로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런데도 애무와 출산 장면에서의 성기만은 고정 클로즈업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 주저함이 없다. 진우가 동생이 두고 간 아이를 맡아 기르는 것처럼 리오는 마리(인디아 헤어)가 두고 간 자신의 갓난아이를 기른다. 두 영화는 분명 모성의 인식에 대한 변형을 시도한다. 모성은 신체적 경험에 내재한 것이기보다는 시각에 의한 간접 경험이며, 진우를 ‘엄마’라고 부르는 설의 존재가 보여주듯 모성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외재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먼 곳의 먼 곳
다시 멜로로 돌아가보자. 앞서 이성애적 멜로의 실종과 퀴어 멜로의 부상에 관해 말했다. 이성애적 멜로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한 퀴어 멜로는 이제 퀴어 남성과 다가올 세대간의 관계를 보여주며, 그것만이 다른 성과 공존할 어쩌면 유일한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나의 흐름으로 말해본다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다른 이의 아이를 구하는 MTF 트랜스젠더가 있고, <승리호>에서는 홀로 남은 아이를 아버지처럼 보살피는 이성애자 남성이 있으며, <정말 먼 곳>에서는 엄마가 된 게이 삼촌이 있다.
이들은 멜로나 사랑의 흔적을 삭제한 채 다른 세대의 아이들을 품어내려 한다. 어쩌면 이것이 이성애적 멜로가 환영받지 못하는 사태 속에서 선택된 하나의 길일 수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더 정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으나 여기에서는 일단 퀴어 멜로가 아이와 함께 다음 단계를 모색하는 현상과 이성애적 멜로의 삭제가 모종의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언급해두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