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서 업계의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한국의 감독이나 배우, 뮤지션들이 세계 시장에 진출할 기회가 있으면, 기존에 만난 적이 없던 이들까지 추천 리스트에 올리고 미팅을 주선하곤 합니다. 그래서 ‘매치메이커’나 ‘영업사원’ 같다는 말을 듣기도 하죠.”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최근 미국에 머물고 있다. 대중에게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총괄 프로듀서로 잘 알려진 그는 CJ ENM의 주요 사업과 콘텐츠 제작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미국에서 그가 주력하고 있는 업무는 미국 시장을 통해 글로벌 관객과 시청자들이 볼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를 기획하고, 음악 프로그램을 공동 제작하는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현재 CJ가 해외에서 준비 중인 프로젝트만 해도 10편이 넘는다.
영화 <유전> <미드소마>의 아리 애스터 감독이 제작을 맡고 장준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지구를 지켜라> 영어 리메이크부터 <불한당> <수상한 그녀> <극한직업> <써니> 영어 리메이크판, 베트남 호러영화 <더 하우스메이드>를 영어로 리메이크한 <그레이브 힐>, 조엘 데이비드 무어 감독이 연출을 맡을 <숨바꼭질>, 그레크 비요크만, 제임스 배칠리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음악 판타지 로맨스 영화 <프레스 플레이>까지 소재와 장르도 다양하다. “할리우드에서는 무수한 영업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복잡한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 속에서 걸작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흥행작이 나오기도 합니다. 송강호 배우가 우연히 오디션장에서 조감독 시절의 봉준호 감독을 만났던 인연이 <살인의 추억>으로 이어졌고, <기생충>이라는 엄청난 성과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관계를 하나라도 더 발견하고 한국과 글로벌 시장 사이에 접점을 만드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미경 부회장에 따르면 최근 할리우드에서 목격되는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는 전도유망한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한국영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입을 모으며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한국 감독들의 이름과 영화를 길게 나열하곤 하는 것”이다. 이는 오래 전 한국에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나 알프레드 히치콕 같은 이름을 거론하던 것과 입장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제작자로부터 한국 감독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 늘어나고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에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로라도 참여할 수 있는 한국 감독을 소개해 달라는 등의 요청을 받곤 합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일이라 무척 고무적이고, 이 분위기가 사그라지기 전에 빨리 의미 있는 성과가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는 조급함이 생깁니다.”
그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부터 최근 아카데미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른 <미나리>까지 한국과 아시아계 창작자들에게 쏟아지는 할리우드의 관심이 유례 없이 높아진 지금의 현상을 두고 ‘아시아에 기반을 둔 사업자에 처음으로 찾아온 큰 기회’라고 말한다. “최근 약 5년 동안 영화계 내에서 기존의 메인스트림이 해체되고 다문화주의가 득세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좀더 거시적인 문화적, 정치적 배경도 있지만, 시야를 엔터테인먼트 업계 내로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할리우드 메인스트림이 이벤트 무비와 프랜차이즈 영화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관객 사이에서 이러한 블록버스터에서 채워지지 않는 다른 갈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또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플랫폼이 10년 전부터 미국 시장의 중심에 등장하여 다양한 문화적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당연히 아시아에 기반을 둔 사업자 입장에서 보면 이는 거의 처음으로 찾아온 큰 기회입니다.”
그는 최근 눈여겨보는 감독으로 <승리호>의 조성희 감독과 <메기>의 이옥섭 감독, <청년경찰>의 김주환 감독을 꼽았다. “<승리호>는 아시아도 우주를 컨셉으로 한 블록버스터를 만들 수 있고, 오히려 더 독특하게 잘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글로벌 시장에 보여준 멋진 시도 같아 좋았고, 이옥섭 감독의 <메기>는 색감을 활용한 영화 특유의 분위기와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 연출이 돋보였던 것 같습니다. <청년경찰> <사자>를 만든 김주환 감독은 장르와 무관하게 탁월한 연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몇년 전부터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신선한 소재, 독특한 스토리, 뛰어난 감각으로 중무장한 한국의 신진감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거라 저는 확신합니다.”
한편 지난 3월 23일 LA에 개관한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의 부의장을 맡고 있는 이미경 부회장은 “부의장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영화의 위상이 글로벌 영화계에서 그만큼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 계기라고 생각한다며 “지난 100년간 한국영화를 위해 힘써준 감독님들과 제작자, 배우, 스탭 모든 분들의 덕분”이며, “그들의 목소리를 영화 박물관에 담아낼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개관과 영화주간지 <씨네21> 창간 26주년을 맞아 단독으로 진행된 이번 인터뷰에서는 미국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개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여성,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영화산업 리더로서의 고민, 지난 1995년 당시 제일제당이 드림웍스에 거액을 투자하며 문화사업을 시작한 계기, <기생충>의 상세한 오스카 레이스 전략, 향후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전망까지 이미경 부회장에 관한 다채로운 스토리가 최초로 공개된다. 특히 이미경 부회장이 직접 제공한 다양한 영화인들과의 만남을 담은 사진은 오직 4월 3일 발행되는 <씨네21> 창간26주년 기념 특대호(1300호)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