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을 눈앞에 둔 체육 교사 고현미(백현주)의 평온한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열일곱 동거인 혀크(강다현)가, 코로나19 여파로 고시원에서 쫓겨난 택배기사 쌀차비(문혜인)를 데려와 같이 살게 해달라고 졸라대면서부터다. 거절할 방도를 궁리하던 고현미는 퍼뜩 묻는다. “쟤… 이쪽이냐?” 쌀차비의 성 정체성은커녕 본명도 모르지만 혀크는 기다렸다는 듯 둘러댄다. “당연히 우리쪽이지. 보면 몰라?” 게임 끝. 레즈비언인 고현미가 ‘이쪽’, 즉 성 소수자 청년의 주거 문제를 나 몰라라 하지 못하는 바람에 셋은 금세 식구가 된다. “퀴어버전 <순풍 산부인과>”를 상상했던 이반지하(김소윤) 작가는 <으랏파파>를 완전한 퀴어 유니버스로 만들었다.
모두가 퀴어인 세계에서 정상 가족을 벗어난 ‘정통 가족 시트콤’은 새로운 관점의 웃음을 선사한다. 혀크가 여자 만나는 건 당연히 상관없지만 ‘팸인지, 부치인지’는 궁금해하던 고현미가 남자를 만난 혀크를 보고 충격받아 내뱉는 독백에는 아이러니와 진실이 공존한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남자를 만나? 팸이고 부치고 퀴어, 젠더, 다 좋다 이거야. 근데 남자는 증말 너무… 위험하잖아!” 그리고 청년 퀴어 모임 강연에서 ‘레쓰비언 부치’로서의 일생에 자부심을 드러내던 그는 “지금 말씀하시는 여성의 범주가 어떤 것이냐”는 청중의 날카로운 질문에 당당히 동문서답한다. “여자라는 건… 그야말로 책임이지!” 이어서 ‘젠더 플루이드’라는 개념을 트랜스젠더로 오인한 고현미가 아슬아슬한 발언을 이어갈 때 부끄러움은 늘 그러하듯 자식, 즉 혀크의 몫이다.
평등과 다양성의 가치를 가슴 깊이 새기려 애쓰다 못해 재킷 앞판 가득 무지개 배지를 도배하고 다녀도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기 쉽지 않은 꼰대 고현미는 고유성과 보편성, 페이소스를 동시에 지녔다는 면에서 시트콤 주인공으로 더할 나위 없는 캐릭터다. 다만 <으랏파파>의 아쉬운 점은 파일럿 3부작만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투자자의 연락을 바란다는 작가의 말에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이 얘기는 정말로 재밌는 얘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