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계속된다.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가 힘찬 슬로건을 앞세워 4월 29일 열린다. 코로나19로 인해 장장 4개월 동안 심사 상영과 온라인 상영 그리고 장기상영회(극장)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예년처럼 열흘 동안 극장과 온라인에서 상영된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다. 전세계 48개국 186편(해외영화 109편, 한국영화 77편)이 극장 상영되며 이중 141편이 OTT 플랫폼 웨이브에서 공개된다. 영화 예매는 온라인으로만 진행되고 현장 매표소는 운영되지 않는다.
극장 좌석은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33%만 채울 계획이라 관객의 매표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씨네21>은 영화제 상영작을 미리 보고 추천작 14편과 스페셜 섹션(크레딧에 온라인으로 표기된 영화는 극장과 온라인 모두 상영한다.-편집자)을 소개한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영화제 기간 동안 온라인 데일리를 운영할 예정이니 올해도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멋진 세계 Under the Open Sky
니시카와 미와/일본/126분/2020년/월드시네마
살인죄로 13년간 수감되었던 전직 야쿠자 미카미(야쿠쇼 코지)가 출소한다. 그는 자신이 쓴 수감 기록을 방송국에 보낸다. 이유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다. 방송 제작진은 그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큐멘터리 제작을 의뢰한다. 미카미는 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출소 후 그의 삶은 녹록지 않게 흘러간다. 일자리 구하기의 어려움, 사람들의 선입견 등 미카미를 옥죄는 것들은 그를 더욱더 고립시킨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미카미의 진심을 알아가면서 그를 돕기 시작한다.
<멋진 세계>는 국내외 평단에서 찬사를 받았던 <아주 긴 변명>을 연출한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여덟 번째 작품이다. 전작과 동일하게 감독은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그를 이해하는 과정을 영화로 담아낸다. 이를 통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과 연결되는 삶, ‘콘택트’의 가치다. 영화는 이러한 내용을 형식적으로도 잘 풀어낸다.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다. 하나만 예로 들자면 초반부에 등장하는 미카미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시퀀스는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이다.
여파 Aftermath
김진혁/한국/174분/2021년/코리안시네마/온라인
영화는 김진혁 감독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다시 카메라에 담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10년 전 EBS PD 시절 김 감독은 <다큐프라임-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를 제작하다가 돌연 다른 부서로 발령받는다. 그로 인해 반민특위 프로젝트는 중단된다. 반민특위는 해방 직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지속적인 방해 때문에 조사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의 대표적인 와해 공작이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다. 반민특위에 소속된 국회의원 13명을 ‘빨갱이’로 몬 사건으로, 정부는 국회의원들을 형무소에 가둔 채 고문했다.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들이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하면서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이 사건은 반민특위 후손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반민특위의 주축이었던 국회의원들이 월북 혹은 납북됐고, 그 때문에 후손들은 ‘빨갱이의 후손’으로 낙인 찍힌 채 연좌제 고통을 받았다. 그들은 반민특위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재, 유학 등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건 물론이고 평생 이념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파>는 반민특위 후손들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이자 김진혁 감독이 10년 만에 반민특위를 카메라에 담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동양의 마녀들 The Witches of the Orient
쥘리앵 파로/프랑스/100분/2021년/월드시네마/온라인
137개 세계 대회 전승, 당대 최강이었던 구소련팀을 누르고 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따낸 방직공장의 직원들. 이 소년 만화 같은 서사는 니치보 방직공장 여자 배구팀의 실화다.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존 매켄로, 완벽의 제국>을 선보였던 쥘리앵 파로 감독의 신작 <동양의 마녀들>은 세계를 무대로 활약한 일본 여자 배구팀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제는 노인이 된 팀원들의 인터뷰와 자료 영상을 바탕으로 1950~60년대 배구팀의 여정을 따라간다. 승리의 행렬에는 아침 6시부터 새벽까지 공장 업무와 배구 연습을 병행한 강행군이 뒷받침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시 일본에서 배구 소재의 만화가 인기였다는 사회적 배경까지 흥미롭게 묘사했다. 1964년 일본에서 개최된 올림픽에서 자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치른 결승전을 보노라면 덩달아 마음이 끓어오른다.
첫번째 아이 First Child
허정재/한국/93분/2021년/한국경쟁
최근 드라마 <며느라기> <산후조리원>, 영화 <고백> 등을 거치며 인상적인 행보를 걷고 있는 배우 박하선이 또 한번 분투하는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그가 <첫번째 아이>에서 연기하는 정아(박하선)는 출산 후 복직한 지 얼마 안된 초보 워킹맘.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는 그의 앞에 매일같이 산 넘어 산이 펼쳐진다. 언덕을 넘는 정아에게 조선족 보모, 비혼주의자 후배, 야근을 일삼는 남편은 불안과 신경과민을 선사한다.
정아에게 집중하던 카메라가 다른 인물을 비출 때 일어나는 찰나의 소통과 어긋남은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여러 층위를 더한다. 서늘한 분위기 속에서 인물의 심경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안을 섣불리 내놓기보다 그럴 수 없는 맥락을 신중히 서술해가며 현실을 스캔한다.
너에게 가는 길 Coming to You
변규리/한국/93분/2021년/한국경쟁
‘아이 러브 마이 게이 선’(I LOVE MY GAY SON) 굵은 펜으로 손수 적은 문구를 들고, 엄마 비비안은 아들 예준과 캐나다의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걷는다. 그들은 무지개 빛깔의 사람들 안에서 벅찬 맘으로 환호한다. 한편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선 아주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동성애 반대’라는 글자가 인쇄된 종이를 흔드는 이들은 비비안을 향해 “집에 가”라는 구호를 연호한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FTM 트랜스젠더 한결의 엄마 나비는 말한다. “그런 혐오의 시선을 대하면 무서워서 다시는 애들 그런 데 나가지 말라고 할 것 같은데 사람은 그게 아니에요. 그걸 보고 나면 진짜 그때부터는 또 투사가 되더라고.”
<종로의 기적> <두 개의 문> 등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열 번째 작품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 자녀를 둔 이들의 성장기다. 그 중심에 비비안과 나비가 있다. 영화는 두 엄마의 사랑이 인식과 배움을 거쳐 공감과 실천의 길로 나아가는 여정에 동행한다. 그 노력을 이해하는 아이들은 더 넓은 세상으로 가족을 초대한다. 그들을 감싼 법과 사회는 아직 그 자리에 있지만, 오직 ‘너’에게 닿기 위해 걷는 어른들의 발자국이 여기에 찍혀 있다.
해변의 금붕어 The Goldfish: Dreaming of the Sea
오가와 사라/일본/77분/2020년/국제경쟁/온라인
하나(오가와 미유)는 부모와 함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모여 지내고 있는 위탁가정에서 부모 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 자신 역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과거가 있는 하나는 이제 곧 시설을 떠나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때 시설에 새로 들어온 8살 소녀 하루미가 하나의 눈에 들어온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 하루미. 하나는 하루미의 작은 몸에 생각보다 큰 상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하루미를 특별히 보살피기 시작한다. 그렇게 둘은 밝지만은 않은 상황에서 조그마한 우정을 쌓아가지만, 하나 또한 아직 불쑥불쑥 떠오르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미가 본래 가족에게 돌아가게 되는 일이 발생하자 하나가 사태 수습에 나선다.
배우 출신인 1996년생 오가와 사라의 장편 데뷔작 <해변의 금붕어>는 담백하지만 단호한 시선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을 보여주는 영화다. 답답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는 하나는 종종 어항 속의 금붕어를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곧 감독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금붕어는 해변에 닿을 수 있을지. 해변이 금붕어에게 너무 위험한 곳은 아닐지. 조마조마한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영화.
전주 시네마프로젝트
<노회찬, 6411>
올해 전주시네마프로젝트는 총 3편이다. <위로공간>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을 연출한 임흥순 감독의 신작 <포옹>은 팬데믹 상황에서 전세계 영화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다. 전세계 영화인들이 보내온 일상, 개인적인 사연, 그들의 바람 등을 재구성한 작품으로 코로나19 상황을 겪고 있는 영화인들의 현실과 꿈을 엿볼 수 있다.
테드 펜트 감독의 <아웃사이드 노이즈>는 디지털 시대에 도시를 떠돌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우연한 만남을 그려낸 작품이다. 16mm 카메라와 필름을 사용해 작업 대부분을 손으로 완성한, 독특한 실험영화다. 민환기 감독의 <노회찬, 6411>은 평생 진보 정치를 실현해온 고 노회찬 의원의 삶과 철학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전주 시민을 위해 지난해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중 한편이었던 <세자매>(감독 이승원)도 특별 상영된다.
*본 기사는 <봄의 전주에서 영화가 기다립니다 ②> 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