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계속된다.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가 힘찬 슬로건을 앞세워 4월 29일 열린다. 코로나19로 인해 장장 4개월 동안 심사 상영과 온라인 상영 그리고 장기상영회(극장)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예년처럼 열흘 동안 극장과 온라인에서 상영된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다. 전세계 48개국 186편(해외영화 109편, 한국영화 77편)이 극장 상영되며 이중 141편이 OTT 플랫폼 웨이브에서 공개된다. 영화 예매는 온라인으로만 진행되고 현장 매표소는 운영되지 않는다.
극장 좌석은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33%만 채울 계획이라 관객의 매표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씨네21>은 영화제 상영작을 미리 보고 추천작 14편과 스페셜 섹션(크레딧에 온라인으로 표기된 영화는 극장과 온라인 모두 상영한다.-편집자)을 소개한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영화제 기간 동안 온라인 데일리를 운영할 예정이니 올해도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본 기사는 <봄의 전주에서 영화가 기다립니다 ①> 에서 이어집니다.
습도다소높음 The Rain Comes Soon
고봉수/한국/77분/2020년/코리안시네마
낭만 극장에서 영화 <젊은 그대>의 시사회가 열린다. 극장의 유일한 아르바이트생 찰스(김충길)는 관객 맞이에 분주하다. 관객의 시비와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연속해서 벌어진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을 핑계로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 낭만 극장. 습기가 가득 찬 그곳에서 한편의 영화가 시작된다.
<습도다소높음>은 극장에서 펼쳐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담은 코미디영화다. 감독은 자기 자신을 희화화하여 영화에 녹여낸다. 메타영화로도 읽히는 이 영화는 웃음과 짠함, 두 가지 요소를 잘 섞어낸다. 특히 감독으로 등장하는 이희준 배우와 영화평론가로 등장하는 전찬일의 연기가 일품이다. <습도다소높음>은 <델타 보이즈>(2016), <튼튼이의 모험>(2017) 등을 연출한 고봉수 감독의 신작이다.
코리도라스 Corydoras
류형석/한국/87분/2021년/한국경쟁/온라인
메깃과 열대 관상어이자 청소용 물고기로 유명한 코리도라스. 그 물고기를 쳐다보고 있는 박동수가 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지체장애인이며 어릴 적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그는 종종 시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다. 악플에 답글을 다는 것까지도 그의 취미다. 그런 그의 고민은 요즘 시가 잘 써지지 않는 것인데, 동수는 이에 대한 돌파구로 그가 과거에 머물던 장애인 시설을 찾는다. 동수는 코리도라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코리도라스>는 물고기가 되고 싶어 하는 한명의 장애인보다는, 그저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며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한 사람을 담기 위해 노력하는 영화다. 그렇게 마침내 한편의 시가 완성되고, 다음 시상을 찾아 길을 나서는 동수를 영화는 끝까지 바라본다.
저항의 풍경 Landscapes of Resistance
마르타 포피보다/세르비아, 프랑스, 독일/95분/2021년/국제경쟁/온라인
고양이를 키우고 사는 97살 소냐는 젊은 시절 지옥에서도 저항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저항의 풍경>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끈 지도자이자 유고슬라비아 최초의 여성 빨치산(파르티잔) 중 한명이자 반파시스트 운동가인 그의 기억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그의 증언을 차례로 나열하는 단순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결혼과 동시에 빨치산이 되었고, 나치 체제의 인정 청소가 자행되던 곳으로 악명이 자자한 아유슈비츠에 들어간 뒤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인 그곳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던 생애를 그의 인터뷰 영상, 아카이브 자료,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던 장소의 현재 풍경 등 여러 이미지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오래전 벌어졌던 끔찍한 일을 담담하게 얘기하는 소냐의 목소리가 현재 풍경과 포개지면서 저항의 역사와 레지스탕스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보여준다. <저항의 풍경>은 2021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타이거 경쟁부문에서 상영됐다.
혼자 사는 사람들 Aloners
홍성은/한국/91분/2021년/한국경쟁
<혼자 사는 사람들>은 단순히 1인 가구를 지칭하지 않는다. 노동현장, 주거공간, 가족관계에 있어 타인의 개입을 꺼리고 오직 단독적 개인을 유지하는 데에 몰두한 자들. 영화는 그들 각자의 이유로 홀로 된 모두를 <혼자 사는 사람들>로 바라보며 카드사 콜센터 직원인 주인공 진아(공승연)를 따라간다. 아버지와의 대화도 이웃과의 인사도 껄끄럽기만 한 진아에게 불편한 이별과 만남이 차례로 찾아온다. 그렇게 스친 사람들을 통해 진아는 고독과 고립의 경계에 선 자신을 발견하고 봉인되었던 감정을 두드려본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미덕은 세태를 조명하기 위해 인물을 도구로 쓰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대신 이 영화는 시종 건조하던 진아의 일상에 작은 물방울이 맺히기까지의 시간을 따라가 변화의 가능성을 설득해낸다.
전장의 피아니스트 Broken Keys
지미 케이루즈/레바논/111분/2020년/국제경쟁
ISIS가 점거한 시리아의 한 마을. 피아니스트 카림은 전쟁 같은 이곳을 떠나 유럽으로 탈출하려고 한다. 탈출 자금은 그가 가장 아끼는 피아노를 팔아서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카림이 사는 아파트로 테러리스트들이 쳐들어와 피아노를 발견하고 총을 쏘아댄다. 부러진 피아노 키. 카림은 이 마을을 탈출할 수 있을까?
<전장의 피아니스트>는 피아니스트 카림이 내전 중인 시리아를 떠나 유럽으로 탈출하려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영화는 인상적인 롱테이크 숏으로 시작한다. 피아노에 앉아 있는 카림이 보이고 보이스 오버로 총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가 교차한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는 카림을 통해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외에도 영화는 탈출극 문법을 충실히 따르며 긴장감 있는 연출을 선보인다.
희수 The Train Passed by
감정원/한국/75분/2021년/한국경쟁
귤 하나를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기차에 오른 희수(공민정)의 종착지는 강원도 도경리역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영화는 희수가 대구에 위치한 공장으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공장엔 희수의 애인 학선(강길우)이 있는데, 둘은 계획했던 여행을 연기해야 하는 일로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원래 강원도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영화 초반 희수의 여행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사 없이 느리고 담백하게 진행되는 <희수>는 희수와 학선이 따로 또 같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조심스럽게 보여주는 영화다. 쉽게 짜맞춰지지 않는 영화의 장면 장면들이 색다른 감상을 자아낸다.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 몇편과 여러 독립영화에서 인상을 남긴 공민정 배우가 희수를 연기한다.
사랑 뒤에 남은 두 여자 After Love
알림 칸/영국/91분/2020년/월드시네마
배우자의 외도 상대를 만나는 스토리는 흔하다. 비밀과 거짓말 끝에 고성이 오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 뒤에 남은 두 여자>는 말수가 적다. 이야기는 죽은 남편이 또 다른 가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인 무슬림 여성이 프랑스로 향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남편의 프랑스인 애인에게 가정부로 오해 받지만 이를 풀지 않는다. 서로 속고 속여온 역사를 가진 두 사람은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 이상의, 기이하고도 하나뿐인 유대를 쌓아간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영화는 서스펜스 위에 문화, 종교, 가정 형태의 차이를 가진 두 여자를 놓고 관찰하듯 전개되다 몇번의 폭발음을 낸다. 그렇게 예상 가능한 목적지로 가는 와중에도 앞서 심어둔 요소요소를 성실히 짚어가며 인물들을 보듬을 줄 안다. 2020년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초청작.
낫아웃 NOT OUT
이정곤/한국/108분/2021년/한국경쟁/온라인
고교 유망주인 광호는 프로야구 드래프트 선발전에서 탈락하면서 프로 선수로서의 꿈이 좌절된다. 야구를 계속하고 싶은 간절함이 광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계획에 없던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면서 광호는 지망 대학이 같은 동료들과 갈등을 빚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 민철이 있는 가짜 휘발유 판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낫아웃>이 묘사하는 광호의 세계는 오직 야구로 가득하다. 그런 광호의 폭주하는 에너지를 담는 데에 집중하면서도, 영화는 제목과 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그를 다독인다. 광호 외에도 20살을 기점으로 갈라지는 고교야구팀원들의 미래와 고를 선택지조차 부재한 청춘들의 삶까지 세밀하게 담아냈다. 단편 <조문> <윤리거리규칙>으로 서울독립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됐던 이정곤 감독의 연출작이다.
스페셜포커스: 인디펜던트 우먼
<비브르 앙상블>
올해 전주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섹션 중 하나로, 영화사에서 자신의 존재를 영화로 증명해낸 여성감독 7명과 그들이 만든 작품 15편이 선보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활동했던 첫 이탈리아 여성 다큐멘터리스트인 체칠리아 맨지니 감독이 연출한 초기 단편 6편,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최초의 한국 여성 실험영화 집단인 ‘카이두 클럽’을 이끌었던 한옥희 감독의 초기 실험영화 4편, 이란 뉴시네마의 선구자인 포루그 파로흐자드 감독이 연출한 유일한 영화 <검은 집>, 뉴아메리칸 시네마 기수 중 하나인 바버라 로든 감독의 <완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얼굴인 배우 안나 카리나의 첫 장편 연출작인 <비브르 앙상블>, 뉴퀴어 시네마 최초로 레즈비언 흑인 여성인 셰릴 두녜이 감독이 만든 <워터멜론 우먼>, 뉴아르헨티나 시네마의 대표주자인 알베르티나 칼리 감독의 <금발머리 부부> 등이 상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