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전주영화제는 지난해부터 지속된 코로나19로 변화하는 세계의 단면들을 되짚으며 특별전을 기획했다. 11편의 작품을 담은 ‘스페셜 포커스: 코로나, 뉴노멀’ 기획전이 그것이다. 갑작스레 도래한 팬데믹 사태에서도 여전히 적지 않은 작품들이 제자리에 꼿꼿이 버티고 서서 인류가 새로이 맞닥뜨린 세계를 치열하게 탐색했다.
많은 영화들이 코로나19가 가져온 필연적인 단절에 대해 이야기했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자들을 찾아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기도 했다. 또 시대의 우울을 체화한 사건 앞에서 가족, 이웃들과 연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라진 시스템에 분노하며, 새로이 삶의 의미를 되짚기도 했다. 무수한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촬영한 영상들이 하나의 영화로 탄생하기도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재앙 앞에서 현실을 목도하고 이면을 들여다보며, 동시대를 포착하려는 부지런한 시도들이 영화로 완성되어 전주를, 그리고 우리를 찾아왔다.
영화 <방주>가 시작되면 노령의 여인이 코에 호스를 꽂고 병상에 누워 신음하고 있다. 그녀의 가족들은 마치 인력에 이끌리듯 환자의 곁을 맴돌며 서성인다. 여인의 앙상한 육신이 내뿜는 강렬한 존재감이 주변 이들을 진동시키고, 그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과 고백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베이징의 독립영화감독 웨이단이 그의 할머니의 마지막을 촬영한 <방주>는 흑백의 화면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영화는 자주 여인의 몸과 얼굴을 회면 가득 클로즈업하는데, 그녀의 피부가 흑백으로 표현된 탓에 이것은 육신이라기보다 하나의 자연 현상을 기록한 영상과 같은 감상을 전달한다. 전염병과 함께 공포와 우울이 사람들 사이로 전파되는 코로나19 시대. 영화는 질병이 관통하고 지나가는 한 가정의 모습을 통해 병과 죽음, 그것이 촉발하는 정서적 파동을 묵묵히 응시한다.
<코로네이션>은 중국 출신의 실험 예술가이자 인권 운동가인 아이웨이웨이가 연출했다. 다큐멘터리 작가와 일반인들이 2020년 초 우한의 모습을 찍은 영상을 편집해 완성한 작품이다. 이 때문에 영화 속 이미지들은 옅게 분절된 채로 제각기 우한의 단면들을 드러내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유기성을 유지한 채로, 스크린에서 저마다의 생명력과 활기를 뿜어내고 있다. 동분서주하는 의료인들, 식당과 마트를 오가며 물건을 챙기는 사람들,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 영화는 코로나19의 진원지라 불리는 곳의 현실을 들여다본다. 정부의 대응과 시민들의 각개전투. 이곳을 감도는 폐쇄적이고도 폭력적인 공기까지. ‘코로나19’라는 단어 하나로 포착할 수 없는 다층적인 사태에 관한 부지런한 탐색과 생생한 기록이 여기에 있다.
봉쇄에 대처하는 세계의 자세
밀라노에 체류하는 영화인 57명이 함께 연출한 <코로나의 밀라노>는 팬데믹 사태를 온몸으로 관통한 도시의 일상을 담았다. 이 아름다운 도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 앞에서 서서히 변화한다. 이것은 붕괴일까, 적응일까. 아이들은 천진하게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어른들은 달라진 생활을 따라잡느라 분주하다. 코로나19는 익숙하지 않았던 것들을 익숙하게 느끼게 하며 서서히 밀라노 속으로 녹아든다. 이다지도 평화로우며 기묘한 풍경. <코로나의 밀라노>는 전염병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는 일상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코로나19의 흔적을 탐색하고,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거듭 질문하는 작품이다.
<자비로운 밤>은 코로나19로 봉쇄 조치가 내려진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한다. 술집에 모인 세 남자가 와인의 힘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놓는다. 삭막한 시대에 한산한 바(bar)에 모여 인생의 한순간을 공유하는 세 남자. 영화는 이들 사이를 오가는 말들을 들여다보며 동시대 핀란드 사회의 단면을 포착한다. <세 남자>(2008)에서 밤, 바, 세 중년 남성의 조합에서 이야기를 풀어낸 바 있는 미카 카우리스마키가 연출을 맡았다.
<토탈리 언더 컨트롤>은 제목 그대로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미국 정부의 무능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위 스틸 시크릿: 더 스토리 오브 위키리크스>(2013), <고잉 클리어: 사이언톨로지 앤 더 프리즌 오브 비리프>(2015) 등을 통해 호평받은 알렉스 기브니가 연출을 맡았다. 과학자, 의료 전문가, 보건당국 관계자 등에 대한 인터뷰와 열정적인 취재를 거쳐 탄생한 작품이다.
영화는 “괜찮다”거나 “완벽히 준비되어 있다”는 말을 반복하는 트럼프 정부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팬데믹 상황을 통솔했어야 할 리더십이 부재하다고 말한다. 전대미문의 전염병을 막기 위해 미 정부는 무엇을 해야 했고, 시민들은 무엇을 놓쳤나. 영화는 코로나19 사태 이면에 놓인 진실을 좇는 한편, 터져나오는 고백을 통해 미국 시민들이 공유하는 차가운 분노를 이곳에 풀어놓는다.
우리는 모두 방구석에서
<지혜로운 방구석 생활>은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이윤지·박재범 감독의 단편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이다. 5년간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상경한 노지혜는 작은 방 안에서 온라인을 통해 면접을 보고 쇼핑, 식사, 운동까지 모두 척척 해결한다. 그러나 과연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쥐 인형이 보여주는 현실감 가득한 일상이 코로나19 시대를 가까스로 견디는 우리의 단면을 포착한다.
김규진 감독의 <새 가족>이 시작되면 세 가족이 각자 무표정하게 모니터를 보며 식사를 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시작된 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 어느 날. 상황이 얼마나 악화됐는지 알 수 없으나 이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심상치 않다. 디스토피아를 담아내는 한편 블랙코미디의 정서도 묻어 있는 작품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한 촬영 방식의 변화는 나름의 응원과 희망을 은밀히 말하는 것만 같다. 전제민 감독의 <배달하는 삶>에서 어느 날 배달원 성준은 현지에게 음식을 배달하고, 그녀의 제안으로 점심을 함께하게 된다. 만남이 반복되며 성준은 현지의 비밀을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조각나고 반복되는 영상으로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한 청춘의 일상을 그려낸다. 격변하는 세상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보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해조류가 에너지원이 된 시대. 예멘 난민 출신의 연구원 소하일라는 바다 속 연구소에서 연구하던 중 우연히 사고를 당한다. 그녀는 무의식중에서 코로나19에 대응해 발버둥치던 인류에 관한 기억들을 떠올린다. 김아영의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는 근미래적인 SF에서 시작해 코로나19를 소재 삼아 환경과 인종, 자본의 문제를 경유한다. 코로나19 시대의 혼란과 불안을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영상으로 표현해낸다.
제환규의 <정말, 정말로 축하합니다>는 코로나19 시대가 유발하는 분리의 감각을 재기발랄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생일을 맞이한 철훈은 함께 축하할 친구를 찾지만 상황은 그의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고민하던 그의 눈에 하나의 기계가 들어온다. 기술은 자꾸 발전하는데 관계는 단절되어가는 모순적인 시대. 그 이중성이 빚어낸 격차 사이에서 한 남자가 흔들거린다.
고선영의 <미주>에서 택시 운전사 희영은 우연히 미주를 차에 태운다. 차의 앞뒤 자리에 앉아 마스크를 쓴 채로 서로의 인생사를 나누는 두 여자. 그러다 희영은 미주가 자가격리 이탈자임을 알게 된다. 밤부터 아침까지 이어지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도로와 산길을 동행하며 중대한 순간을 나눈다. <미주>는 두 여자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코로나19 시대에서 ‘동행’의 의미를 반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