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엔자>는 간호사 사회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인 태움을 소재로 한 영화다.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이다.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교육하는 명목으로 가해지는 괴롭힘을 의미한다. 신종 바이러스가 퍼진 어느 작은 마을의 한 병원, 3개월 차 간호사 다솔은 병원에서 태움을 당하고 있다. 바이러스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다솔은 신입 간호사 은비를 교육하게 된다. 자신도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해 아는 게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은비만큼은 잘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이 영화는 간호사 세계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폭력의 대물림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황준하 감독은 “영화제에 초청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뻤지만 예매가 열리자마자 2시간 만에 매진돼 긴장도 많이 되고 부담감도 크다"며 첫 장편 영화를 연출한 소감을 밝혔다.
-신종 바이러스가 작은 시골 마을에 전파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인데 언제 쓴 시나리오인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2015년에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다. 대학 입시를 치르기 위해 고향인 광주와 서울을 오가곤 했는데 메르스 환자가 거의 없었던 광주와 달리 서울은 많은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다녔었다. 그 풍경의 잔상이 오래 남았고,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구조가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그 다음 해 입학한 서울예대 시나리오 워크숍에서 10분짜리 단편 시놉시스를 썼는데 제목이 인플루엔자였다. 영화로 찍지는 않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복학해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그 시놉시스를 발견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전염병의 어떤 점에서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나.
=코로나 19 이전에도 메르스나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전염병이 있지 않았나. 그때 베스트셀러 <총, 균, 쇠>를 읽고 있었는데 전염병은 인류와 계속 갈 것 같았고,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과정이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과 연관성이 깊었다. 시나리오를 작업하던 중 코로나 19가 발생했었다. 그저 스쳐 지나갈 줄 알았는데 장기화하는 걸 보면서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다.
-전염병이 발생하는 시기에 한 병원에서 벌어지는 태움 문제를 다루는데.
=어릴 때부터 학생들에게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모르는 걸 물어보면 알려주지 않고 되려 혼을 내지 않나. 서울예대에 입학하자마자 시놉시스를 썼던 2016년, 간호사 사회의 태움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조직의 상명하복 문화가 태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태움에 대해 공부도 따로 했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도서관에서 간호학 개론을 포함한 간호사와 간호학과 관련된 자료를 열심히 보며 공부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태움의 실상을 고발하는 계정인 ‘간호학과 대나무숲’에 글을 쓴 분들을 수소문해서 인터뷰하기도 했고, 인스타그램에서 간호사들의 생활과 일을 주제로 한 ‘인스타툰’인 ‘간호툰’을 1년 동안 스크랩하기도 했다.
-영화는 간호사가 아니더라도 태움이 얼마나 불합리한 관행이자 문제인지 쉽게 공감할 수 있더라.
=태움을 다룬 이야기지만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우리 사회의 계급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크거나 작은 회사에서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한 적 있는데 조직 규모를 떠나 조직 안에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욕망이 많이 보였다. 촬영 전 배우들과 리딩할 때도 계급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계급 차이에서 발생하는 상명하복 문화나 부조리함을 보편적으로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했던 것도 그런 경험에서 나온 고민이다.
-신입 간호사가 실수하거나 업무를 잘 모르면 사수가 혼나고, 사수가 실수하면 그 위의 선배 간호사가 혼나는 등 폭력이 악순환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됐는데 연출하면서 참고했던 영화가 있나.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4개월, 3주…그리고 2일>(2007), 윤종빈 감독의 <비스티 보이즈>(2008) 같은 사실주의적으로 상황과 인물을 묘사하되 지루하지 않게 서사를 끌고 가려고 고민했다. 롱테이크라도 지루하지 않도록 작은 플롯들을 촘촘하게 배치한 것도 그래서다.
-서사가 전개될수록 카메라와 피사체(간호사들) 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던데.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감에 변주를 주는 게 중요했다. 이야기 초반에는 태움이 병원 밖에서 벌어지고, 관객도 멀리서 태움을 바라본다. 서사가 전개되면서 태움이 환자들이 있는 병원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관객들이 태움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느낌이 들도록 카메라가 인물을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담아낸다.
-과거와 현재의 화면 비율이 다르던데 이유가 뭔가.
=화면비가 총 세 개다. 시나리오를 처음 썼을 때 단편 분량이었는데 이야기에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을 채워 넣다 보니 지금의 길이로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구조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시골 마을에 위치한 작은 병원에서 벌어지는 과거를 4:3으로, 많은 인파가 등장하는 도시가 배경인 현재를 2.35:1로 설정해 촬영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뉴스 푸티지 영상은 16:9다.
-어쩌다가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나.
=어릴 때부터 반항심이 있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광주 지역의 한 극단에 들어가 공연도 올리고 스탭도 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찰리 채플린 감독의 <모던 타임즈>(1936)를 보고 연극은 일회성인 만큼 영화는 물질성이 있구나 싶어 광주시청 미디어센터에서 영화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영화가 뭔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과 윤종빈 감독의 <용서 받지 못한 자>(2005).
-앞으로 어떤 감독이 되고 싶나.
=<인플루엔자>를 만들고 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 질문을 많이 받았다. 힙합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앨범을 낸 뒤 다음 앨범도 낼 수 있지 않나. 음악을 만드는 건 돈이 많이 안 드니까. 하지만 영화는 감독이 된다고 해서 그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지 않으니까. 요즘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그럼에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장르영화 감독이 되고 싶다. 다음 영화도 장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