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웃고 있어도 어딘지 슬퍼 보여.” <비와 당신의 이야기>의 영호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아니 오히려 조금 모자라고 답답해 보이는 친구다. 꿈이 뭔지도 아직 모르는 삼수생 영호에게 남다른 면모를 발견한 누군가는 그에게 끌린 이유가 그가 가진 묘한 우울 때문이라고 말한다.
곧 비가 내릴 것처럼 습기가 가득한데 묘하게 맑게 갠 하늘. 선하고 순박한 영혼이 외투처럼 두르고 있는 우울. 그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청춘의 또 다른 이름이자 배우 강하늘의 기운이기도 하다. <스물>(2014), <쎄시봉>(2014), <동주>(2015), <청년경찰>(2017)까지 숱한 청춘의 얼굴을 대변해온 그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비슷한 듯 미묘하게 다른 청춘의 새로운 면모를 선보인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의 어떤 면에 끌렸나. 영호가 어떤 인물인지 설명해준다면.
=최근 시나리오를 보면 기승전결이 확실한 영화들이 많다. 물론 그런 선명한 영화들도 좋아한다. 다만 가끔은 잔잔하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품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찬찬히 내면을 되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 말이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의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영화는 무미건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삼수생 영호가 우연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기도 몰랐던 설렘을 발견하고 변화해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호라는 캐릭터의 많은 부분이 비워져 있었다. 감독님과 함께 영호를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고 캐릭터에 살을 붙여나갔다. 그 과정이 마치 영호와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었다.
-<스물> <쎄시봉> <동주> <청년경찰>까지 크고 작은 고민에 흔들리는 우리 시대의 청춘을 연기해왔다.
=감사하다. 청춘이라. 솔직히 말하면 청춘이 뭔지 잘 모르겠다. 덜 컸다는 이야기일까. (웃음) 아직 미숙하지만 뭔가 해보려는 열정이 있는 인물들을 그릴 때 날 떠올리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느낌을 보고 ‘강하늘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특정 나이대에 걸맞은 이미지를 정해놓고 거기에 맞춘 적은 없다. 영화마다 이야기가 요구하는 캐릭터에 적합한 것들을 찾아내려 노력했을 뿐이다. 다만 이번 작업이 조금 특별했던 것은, 자연인 강하늘의 모습에서 많은 부분들을 끌어왔다는 거다. 준비된 캐릭터에 나를 맞춘 게 아니라 평소 내가 할 법한 행동에서 디테일을 만들어나갔다. 뭐랄까, 칠렐레팔렐레 많이 웃고, 허당기도 많고, 공부도 못하고. (웃음) 꿈을 찾아 방황하고 고민하는 무거운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영호의 해맑은, 밝은 모습에는 확실히 내가 묻어 있다.
-생각해보면 배우 강하늘이 연기하는 청춘은 비슷한 듯 보이는 가운데 늘 미묘하게 달랐다.
=개인적으로 청춘을 정의한다면 나이나 시절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까지 했던 작품들에서 청춘의 초상을 발견한다면 그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발버둥치는 캐릭터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연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배우로서의 마음가짐도 비슷하다. 장기적인 목표나 방향을 세워두진 않는다. 뭔가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다음’에 사로잡히면 본질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저 지금 주어진 대본에 온전히 집중하고, 내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기. 그게 전부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뭔가.
=이것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건데,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해서 앉은자리에서 다 읽으면 대개 그 작품은 하게 된다. 대본을 읽으면서 상상을 하는 편인데 그게 한 호흡에 다 읽힌다는 건 우선 재미가 있다는 말이고, 두 번째로는 내가 상상한 이미지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영호는 평범하고 순박한 인물이지만 마냥 착하고 푸근한 건 아니다. 알 수 없는 우울이 끼어 있다고 할까. 수진(강소라)의 표현을 빌리면 웃고 있어도 우는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신기하다. 감독님도 정확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연기하면 되냐고 여쭤봤을 때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더라. (웃음) 내 눈매나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슬픔이 묻어난다고. 솔직히 나는 거울을 봐도 안 보이던데. 영호라는 캐릭터는 상당 부분 자연인 강하늘의 모습들에서 끌어오다보니 그런 지점도 함께 묻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랬으면 좋겠다. 이 영화에선 밝은 가운데 우울함, 우울한 가운데 상쾌함이 섞여 있는 캐릭터여야 했기 때문에.
-편지를 주고받는 이야기인 만큼 소희 역 천우희 배우와 만나는 장면이 거의 없다.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없지만 현장에선 늘 함께했다. 얼굴을 마주보고 연기하지 않는 대신 편지를 읽는 내레이션을 통해 호흡을 맞췄다. 내레이션 파트를 먼저 한꺼번에 녹음하고 장면마다 그걸 들으면서 연기했는데 새로운 경험이었다.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 이땐 이런 표정일 거야, 이 대사는 이런 동작으로 하고 있겠지 하는 식으로 상상했다. 어떤 의미에선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깊은 교감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천우희 배우의 팬이기도 하고 그의 연기를 워낙 좋아한다. 처음엔 조용하고 진중하고 무게감 있을 거라 막연히 상상했는데 카메라 밖의 그는 워낙에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걸어다니는 긍정 에너지라고나 할까. 현장에서 해맑은 인사를 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반대로 수진 역의 강소라 배우와는 내내 호흡을 맞춘다. 바로 어제 드라마 <미생>을 찍은 것처럼 너무 편안했다고 하던데.
=<미생> 때 만나 친구가 됐다. 함께 커온 동료랄까. 오래 사귄 편안한 사람이면서도 늘 배울 점이 많다. 연기에 있어서는 항상 준비를 철저히 하고 매 장면 열정을 다하는 점이 존경스럽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함께 나이를 먹어가면서 한층 여유로워진 부분이 있다. 현장을 즐겁게 만드는 노하우들이 쌓여서 그런 건지 완급을 조절하는 강소라 배우를 보면서 왠지 나도 예전보다는 조금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시월애>나 <러브레터>처럼 편지가 중요 모티브로 등장한다.
=나 역시 좋아하는 영화들이다. 거기에 <지금 만나러 갑니다>라는 영화도 보태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요즘에는 드문 정서의, 수채화 같은 감성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어느 날 문득 생각나고 보고 싶은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사소한 계기로 떠올리는 그리움이라고 해도 좋겠다. 예고편에도 나오는 대사이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이며 영화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대사가 있다. “이건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편지가 그렇지 않나. 쓰기 위해서 들이는 시간과 정성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입으로 내뱉는 말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편지를 쓰면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표현이 정확해져 결국 오해의 폭이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편지야 말로 일방통행이 아니라 기다림을 포함한 쌍방의 대화가 아닐까.
-말 그대로 기다림과 설렘에 대한 영화다. 요즘은 SNS 등으로 기다림의 중간 시간을 생략하는 시기인데, 기다리는 걸 잘하는 편인지.
=아쉽게도 인간 강하늘은 기다리는 것과 별로 친하지 않은 것 같다. (웃음) 성격이 급하다는 게 아니고 바라는 게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기다린다는 건 바라는 게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바람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서 기다리는 시간이 금세 지나가기도 하고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당장 눈앞의 할 일에 집중을 잘하는 편이라 아직 오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감각 자체를 잘 모르겠다. 아! 군대에 있을 때 전역만큼은 정말 간절히 기다렸다. (웃음)
-편지만큼 중요한 소품이 비다. 비 내리는 날 소희와 만나기로 한 영호는 나중에 아예 우산장인이 된다. 개인적으로도 비를 정말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참 신기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그런 지점도 영호와 많이 닮은 것 같다. 비를 워낙 좋아해서 비 내리는 날엔 일부러 우산 없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비를 맞으려고 아예 갈아입을 옷을 따로 챙겨갈 정도다. 밝은 햇살은 어딘지 부담스럽다. 그런 날은 더 안 돌아다니는 것 같다. 반대로 비 올 때는 어떻게든 밖으로 나간다. 빗소리에 눈 뜰 때 행복하고 비 내리기 직전의 약간 우중충한 날씨도 사랑한다.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카모토 류이치의 <Rain>을 정말 많이 들었다.
-영화 속 영호의 물음을 그대로 다시 묻고 싶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까, 하는 일을 좋아해야 할까.
=내 경우엔 뭐가 됐든 일단 한다. 이게 좋아하는 일인지, 해야 하는 일인지를 생각할 시간에 일단 걸음을 먼저 떼는 게 중요하다. 고민 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걸 스트레스로 붙잡고 있느니 차라리 할 수 있는 일을 해버리는 편이다. 큰 맥락에선 연기도 마찬가지다. 장기적인 목표, 목적지를 세우기보다는 그냥 지금 한 걸음 한 걸음, 한 작품 한 작품이 소중하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내가 맡은 역할과 영화들이 관객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로 남았으면 좋겠다. 곰돌이 푸의 대사로 지금 이 심정을 대신 전하겠다. “매일 행복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