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비와 당신의 이야기' 천우희 - 소소한 시간의 힘
2021-05-06
글 : 송경원
사진제공 키다리이엔티

보슬비처럼 내려 어느새 스며든다. 엄마와 헌책방을 운영하는 소희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호기심, 그리고 상상력이다. 소희가 귀 기울여 영호(강하늘)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 우리는 어느새 소희의 마음속으로 촉촉이 젖어든다.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천우희 배우는 소희라는 캐릭터가 이제껏 자신이 맡았던 역할 중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많이 담긴, 편안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한공주>(2013), <곡성>(2016)에서 강렬한 캐릭터를 소화했던 천우희는 어느새 여유로운 걸음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따뜻한 온기를 벗 삼아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좋은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의 어떤 지점이 매력적이었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영화들에서 본 감성을 느껴보고 싶었다. 잔잔하고 약간은 색채가 여린 수채화 같은 느낌의 영화들 말이다. 최근 영화들을 보면 갈수록 자극적이고 호흡이 짧아지고 있는데, 관객은 잔잔하고 느린 호흡에도 향수가 있을 것 같다. 나처럼.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해지는 부분이 있고, 한편으론 더 늦기 전에 청춘영화를 해볼 수 있을 때 하자라는 마음도 있었다. (웃음)

-소희가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나오진 않는다. 많은 에피소드들이 가려 있는 느낌이다.

=영호의 경우 인물의 감정은 물론 사연까지 서사적으로 표현된다. 반면 소희는 영호의 시선에서 보면 궁금증을 유발하는, 가려져야 하는 캐릭터였다. 소희의 응축된 부분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뭔가를 의도적으로 표현하려고 의식하면 엇박자가 날 것 같아 행동을 최대한 단순하고 담백하게 가져가면서, 이를 지켜보는 관객이 상상하고 찾아올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소희는 입 밖으로 뭐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는데도 어딘지 간절함이 느껴진다.

=소희는 가족을 우선시하는 친구다. 병을 앓고 있는 언니, 힘들게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자신을 낮춘다. 어떻게 보면 꿈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희망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다. 생활력도 강하고 밝음을 잃지 않는다. 가족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처지를 잊지 않고 배려하는, 기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큰 사람이다. 헌책방에 LP판을 팔러온 사람에게 단순히 상인으로 거래하는 게 아니라 “1천원짜리 취급을 받으면 안될 것 같아서”라는 이유로 마음을 더 얻어주는 사람이다. 그런 디테일한 부분에서 주변을 배려하는 태도가 중요했다.

-속이 깊지만 겉으론 쾌활한 외유내강형 캐릭터다. 배우로서 영화에서는 조금 무겁고 사연 있는 캐릭터를 주로 맡아왔지만 드라마에서는 경쾌하고 코믹한 연기도 많이 했다.

=아까 늦기 전에 청춘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처럼 영화에서도 20대가 가진 유쾌한 생기를 표현하고 싶었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은 내 나이 또래의 현실적인 생기를 표현할 수 있어 즐거웠다. 이번에는 9년간의 시간을 다루는 만큼 20대의 에너지부터 30대의 차분함까지 골고루 결을 보여주고자 했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선 인물의 표현방식에 대해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현장에선 감독님이 천우희의 새로운 얼굴을 담고 싶다고 하시더라. 청춘영화의 전형 같은 상큼한 장면들과 로맨스영화에 어울릴 예쁜 얼굴로. (웃음) 나도 내가 어떤 모습으로 담길지 궁금했다. 영화는 감독의 것인 만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갔다.

-청춘영화 같은 비주얼이라고 하니 재밌다. 확실히 이 영화에는 그런 면이 있다. 촌스러워도 뻔뻔하게 밀어붙이는. 나중에 실제로 스크린을 통해 확인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

=내가 워낙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어서 내심 큰 화면으로 보면 되게 어색하고 오글거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막상 보니 의외로 부끄럽지 않더라. (웃음) 예쁘게 나왔다기보다는 지금의 내가 20대의 나를 다시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운데,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심 기대된다.

사진제공 키다리이엔티

-기억과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헌책방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전부 세트를 지었다고 들었다.

=세트임에도 헌책 특유의 냄새와 푸근한 느낌이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헌책방을 운영한다는 건 사람들의 추억을 모으는 일 같다. 초반에 소희가 매입한 책들을 체크하는 장면에서 낙서를 보고 엄마에게 “잘 좀 보고 매입해”라고 하는데, 표정을 보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다른 사람의 기억과 역사를 상상하고 보물찾기처럼 발견하는 곳에서 일하는 소희이기 때문에 영호와 소통이 가능했을 것이다.

-설명이 많지 않은 만큼 장면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소희의 바쁜 일상과 씩씩함을 보여주는 장면 중에 헌책방 전용 승합차 안에서 빵 먹는 장면이 좋았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도로에서 잠시 멈춘 채 노을 지는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이 무척 예쁘다.

=나도 그 장면을 좋아한다. 소희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바빠서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데 그 와중에 주변 배경은 또 무척 아름답다. 소희는 자신을 동정하지 않고 그 와중에 차를 세우고 주변 경치를 즐기면서 식사할 줄 아는 친구다. 장면 자체가 예쁘게 찍힌 것도 좋고. (웃음) 그 밖에도 언니 소연(이설)의 병실에서 그려지는 장면들도 마음에 든다. 가족 중에 오랫동안 환자가 있으면 주변 사람들까지 지치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걸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너무 무겁거나 가볍지 않게 일상을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리고 싶었다. 어느 날 언니 소연이 “나 살고 싶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눈물을 쏟을 수도 있는 심각한 순간이다. 그때 소희는 아무렇지 않게 “아이고, 우리 언니 나쁜 꿈 꿨나 보네. 책 읽어줄까?”라며 다독인다. 소희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반응하면 버틸 수 없다. 드러내지 않는 슬픔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일상적인 거리감이 좋았다.

-강하늘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둘 다 직접 마주치는 장면 없이 내레이션 혹은 편지만으로 소통한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목소리를 받아서 상대를 상상하며 연기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표현의 영역이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 감정을 생각할 시간이 있다고 해야 할까. 강하늘 배우에 대한 신뢰가 항상 있었다. 사적으로는 소위 미담 제조기이지 않나. 실제론 어떤 사람일지 늘 궁금했다. 마냥 흐물흐물 사람 좋은 것과는 다르다. 분명한 기준과 선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흔들리지 않은 채 주변에 상냥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거다. 자기만의 영역이 있는, 바탕이 단단한 사람이다.

-20대 천우희와 30대 천우희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자연인 천우희와 배우 천우희를 가능한 한 분리하려고 했다. 사생활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고, 배우로서 내가 보여주는 건 화면을 통해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내겐 충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를 통해 에너지를 소진하면 다른 방식으로 그 에너지를 채워넣어야 한다는 걸 실감한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인 취미 활동에서 작은 목표를 세우고 이뤄내는 시간들 말이다. 소소한 시간 속에서 활력을 얻고 배움을 발견한다. 이번 영화에서 맡은 소희는 내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출발한 부분이 가장 많은 캐릭터였다. 나는 너무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연기를 할 땐 나와 닮지 않은, 내가 모르는 부분을 탐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나도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을 충분히 지나왔고, 인간 천우희 모습이 녹아든 편안한 연기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10년 뒤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말 감사하게도 20대의 내가 바랐던 막연한 꿈들은 실현된 게 많다. 영화의 주연을 맡고, 상을 받고, 해외영화제도 가고. 꿈을 꾸다보면 현실에 가까워진다는 걸 믿는다. 물론 그만큼 치열했던 것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결과들이 내가 열심히 했다고 이뤄지는 건 아니다. 때론 행운과 우연이 필요하고 내 통제 바깥의 것들이 작동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 그 순간 삶에서 목표나 꿈, 성장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일 자체의 소중함이라든지 과정의 즐거움 같은.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해지지 않고 나를 위로하고 싶다. 바라는 건 하나다. 매번 진심을 다해 연기하고 계속해서 나아가자. 10년 뒤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금과 같은 열정과 호기심, 순수함 마음을 잃지 않고 계속 즐겁게 일하고 있길 바란다.

사진제공 키다리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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