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를 말할 때 형식이나 스타일에 집착하다보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지난해에 본 <바쿠라우>부터 올해 아카데미의 화제작 <미나리>와 <노매드랜드>까지 내겐 모두 변형된 서부극으로 다가왔다. 이민자와 이방인들이 이제 와서 서부극의 정서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늘 외로움에서 탈출하고 싶은 나에게, 고독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은 또 다른 내가 말을 건다.
순수로의 회귀, 초기 서부극에 대한 매혹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달리는 차가 있다. 아무도 없는, 얼어붙은 풀밭에서 한 여성이 초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소변을 보던 여성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신의 차로 돌아가기까지, 대략 25초가 넘는 시간 동안 카메라는 멀리서 이를 지켜본다. 이윽고 짧고 건조하게 지나가는 타이틀.
<노매드랜드>의 오프닝 시퀀스를 보는 순간 몇 가지 생각들이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길은 물리적으로 갈라지지 않고 곧게 뻗어 있지만 길 위에 선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에겐 목적지가 없다. 때문에 어떤 바람에 몸을 맡겨 흘러갈지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상한 나라의 서부극으로 입장하기
<노매드랜드>를 ‘길 위의 영화’ 내지 ‘로드무비’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엄밀히 말해 여기에 길은 없다. 길은 개별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결과물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어딘가를 향해 걷는 사람이 있어야 성립한다. <노매드랜드>에 제시되는 건 아직 누군가와 관계 맺기 이전 단계의 텅 빈 공간들이다. 어쩌면 길이 되기 전 상태, 지도 위에 안착한 길이 되길 거부하는 공간들의 노래라고 해도 좋겠다.
로드무비의 최소 요건은 A에서 B로 이동한다는 목적지와 방향의 설정이다. 하지만 <노매드랜드>는 어디론가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유하는 상태들의 목격, 부스러기 같은 시간들을 모아 뭉치는 구성을 취한다. 유목민처럼 떠도는 이야기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건 관객이 선 자리, 다시 말해 해석의 욕망이다. 무엇을 보여주느냐보다 어떻게 읽고 싶은지에 따라 영화는 각기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우선 보이는 그대로의 해설 혹은 서부극의 외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의 문제. <노매드랜드>는 차 안에서 주거를 해결하는 미국 노매드들의 삶을 그린다. 동명의 논픽션에 등장하는 사례를 다큐멘터리 시점에서 재현한 이 영화에는 단 두명의 배우 펀과 데이브(데이비드 스트러세언)가 있다. 이들이 최소한의 자리를 마련하면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실제 자신의 사연을 카메라 앞에서 고백한다.
이때 듣는 존재로 세팅된 것이 바로 펀이라는 캐릭터다. 펀은 노매드에 관한 다큐멘터리 속 카메라와 같은 존재다. 다만 이 카메라에는 의지와 표정과 서사가 있다. 오프닝에서 펀이 도로 옆 철조망에 쭈그려 앉아 오줌을 싸는 건 이제 영화의 공간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 혹은 들어가기 직전에 남기는 표식이나 다름없다. 내겐 오프닝의 곧게 뻗은 길이 서부극이라는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노상 방뇨를 하는 펀의 표정은 어딘지 초조하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보인다. 물론 그저 추워서 빨리 차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무언가에 쫓겨 떠나는 행위라는 본질에는 변화가 없다(그게 얼마나 의미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매드랜드>에서 펀의 서사만 따로 분리한다면 이건 한 인간이 자연과 일대일로 소통하기까지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도시와 가족, 삶의 터를 모두 상실한 펀은 자발적으로 차를 집 삼아 생활하기로 결심한다. 그럼에도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노출에 대한 공포를 여전히 드러내는 오프닝은 후반부 전라로 수영하는 상태로 변화한다.
이윽고 펀은 자연을 매개로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익힌다. 영화 말미 단체의 리더 밥 웰스에게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털어놓는 펀의 고백은, 듣는 존재이자 카메라의 일부였던 펀이 마침내 길 위의 시간에 편입되었다는 증거다. 이후 펀이 엠파이어의 집으로 돌아가 텅 빈 집을 가로질러 뒷마당으로 이어진 평야로 넘어가는 모습은 이 영화의 태도이자 들려주고자 하는 사연 그 자체다.
숏과 컷, 역전된 서부극 아래 지워지는 것들
이제 또 다른 해석의 욕망으로 필터를 갈아 끼워보자. <노매드랜드>는 낭만화된 시선으로 구조적인 취약점을 은폐시키는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다. 노매드들의 삶을 단순히 개인적인 선택이나 자연을 향한 해방으로 볼 순 없다. 오히려 초반에 눈길을 끄는 건 이들이 왜 현대의 유목민이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다. 영화는 이에 응답하듯 펀의 여정에 동참해 사람들의 사연을 수집한다. <노매드랜드>의 한축이 노매드의 삶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면, 다른 한축은 이들을 내몬 압력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작업이다. 관심은 자연스레 당대 미국 사회의 모순, 빈부 격차를 보완할 시스템의 부재, 부동산이나 주식 등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모호해진 자본의 집착 등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노매드랜드>가 독특한 점은 이 영화의 서사적 외피가 서부극의 가죽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쓴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부극이 금광 개발을 목적으로 한 서부 개척시대에 대한 산물이라면 그런 의미에서의 서부극은 이미 멸종했다. 대신 서부극의 껍질은 모뉴먼트 밸리로 상징되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반복, 변주되어왔는데, <노매드랜드>도 마찬가지다. 서부극이 땅에 정착하여 집을 짓는 서사라면 <노매드랜드>는 금으로 상징되는 물질적 풍요가 사라진 시대, 다른 것을 찾아 유랑하는 이들의 흔적을 모은다. 아메리칸드림을 찾아 서부로 향하던 개척의 걸음은, 서부 지역의 주택가격 상승으로 인해 거꾸로 중부로 밀려나는 이들의 탈출(혹은 유랑)로 방향이 역전된 셈이다.
사실 실제 역사 속 서부와 재현된 서부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서부극이 쌓아올린 이미지, 영화의 역사라는 외부에서 삽입된 리얼리티다. 그곳에는 진짜 미국의 역사나 진실 대신 미국영화가 쌓아올린 기억들이 놓여 있다. 예컨대 <바쿠라우>(2019)를 통해 디스토피아적 서부극을 선보였던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처럼 적지 않은 창작자들이 이러한 서부극의 아이콘을 활용해 지금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공간을 노래한다. 2000년대 생존 중인 서부극이 캐내고자 하는 건 금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은폐된 진실인 셈이다.
북미 평단에서 나온 <노매드랜드>에 대한 아쉬운 평들은 이 부분을 강조한다. 개인적인 사연에서 출발해 은폐됐던 구조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여타 영화들과 달리 <노매드랜드>는 정반대의 구성을 취한다. ‘네바다주의 도시 엠파이어가 망했다’는 사회구조적인 결과를 시작부터 박아놓고, 이후 각각 노매드들의 사연을 긁어모은 뒤 펀의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으로 연결 짓는다. 관점에 따라선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갈 때 드러나는 것들이 반대 방향으로 선회할 때, 다시 가려지거나 낭만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노매드랜드>에서 밴을 타고 유목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의 첫 계기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등 사회적인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황야의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는 결국 자존과 선택의 문제다. 이들은 사회안전망이라는 필터 대신 자연과의 직거래를 택한 사람들이고, 노동이란 실존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현재를 유지하며 증명한다.
물론 클로이 자오 감독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노매드랜드>가 미국 자본주의를 논평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미국의 정체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영화라는 것을. <내 형제가 가르쳐준 노래>(2015), <로데오 카우보이>(2017) 등 감독의 전작을 살펴보아도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그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에 좀더 호기심을 느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목적과 무관하게 지워지는 것들이 있다. 가령 노상 방뇨를 하던 펀은 결국 노매드 단체를 통해 길 위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차 안에 커다란 요강을 마련한다. 유랑하는 삶이 안락하고 풍족할 리 없다. 차 안에는 분뇨의 냄새가 떠돌 것이고 개미 같은 벌레가 들끓을 수도 있다. <노매드랜드>는 이 사실 자체를 외면하지 않는다. 광활하고 탁 트인 풍광을 제시하는 만큼 비좁은 밴에서의 일상도 놓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정보의 차원에서 제시될 뿐 실감되는지는 모르겠다. 단적으로 실내 변소에 볼일을 보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후각으로 머물진 못하고 경이로운 다른 시간들로 금방 지워진다. 물리적인 양, 사건의 빈도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밀도 차에 의해 착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노매드랜드> 속 시간은 펀의 감각에 따라 다르게 흘러간다. 매우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순간과 마치 정지한 듯 느려지는 시간이 공존한다. 나쁜 기억도 있지만 좋은 순간을 좀더 많이 기억한다고 할까. 영화는 질적으로 컷과 숏을 번갈아가며 사용한다. 이것은 장면의 최종 목적지에 따른 차이다. 컷은 잘린 사건들을 연결시키고, 쇼은 주어진 상황을 지속시킨다.
<노매드랜드>는 의외로 컷과 편집이 현란하다. 카메라는 쉬지 않고 전후 사방을 오가며 편집도 상당히 빨라 대상을 가만히 응시하는 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 아마도 낭만성에 대한 지적은 이 부분에서 기인한지도 모른다. 반면 펀이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느끼는지 묘사하기 위해 클로이 자오 감독은 종종 숏을 제시한다. 가령 오프닝에서 우리는 펀이 철책 안쪽에 기대어 노상 방뇨를 하고 차 안으로 복귀하기까지의 (어색한) 시간을 목격한다. 이후 긴 사연을 방랑한 끝에 펀이 자신의 집 뒷마당의 철책을 열어 평원으로 가로질러 사라지는 시간을 목격한다. 클로이 자오가 이해한, 공유하고 싶었던 미국·미국인의 정체성은 어쩌면 저 지속되는 시간 아래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2020년, 그들은 왜 서부극에 매료되는가
이제 마지막 필터를 씌워야 할 시간이 왔다.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 등 최근 서부극의 뼈대 위에서 여러 요소를 차용해오는 작품들이 잇따라 눈에 띈다. 물론 이걸 미국영화의 새로운 경향 내지 뉴 웨스턴의 신호라고 말하기엔 아직 섣부르다. 하지만 이민자, 외국인, 그러니까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이 유독 미국영화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좋을 서부극의 형태에 차례로 매료되는 현상을 단지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이 그들을 서부극으로 초대했는가. 혹은 2020년 이들이 재현하는 서부극은 무엇이 다른가.
<노매드랜드>의 오프닝을 보는 순간 켈리 라이카트의 <어떤 여자들>(2016) 중 한 장면이 떠올랐다. 몬태나 도심에서 떨어진 목장에서 말을 돌보는 제이미(릴리 글래드스톤)는 파트타임 강사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짧은 교감을 나누고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베스가 다시 도시로 돌아가자 먼 길을 좇아 그녀를 찾아가고, 거절당한다. 이제 제이미에게 허락된 건 압도적인 고독의 시간이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제이미가 농장으로 돌아가는 과정, 그 지리멸렬한 시간을 롱숏의 시퀀스를 통해 모두 긁어모아 담아낸다.
그러다 불현듯 제이미의 차는 도로를 벗어나 황량한 초원으로 돌진하고 철조망의 앙상한 벽을 돌파해 화면 중앙까지 치고 들어간다. 나는 이 장면에서 초원을 종으로 가로지르는 움직임이야말로 서부극의 요체라고 느낀다. 압도적인 공간(혹은 자연) 앞에 노출된 왜소한 인간.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은 듯 또는 탈출하고 싶은 것 같은 움직임. 그럼에도 탈출은커녕 오히려 화면 정중앙까지 몰고 간 뒤 멈춰버리는 잔인한 프레임.
반면 <노매드랜드>에서 펀이 황야 한가운데 서 있을 때의 장면들은 전혀 다른 공기로 감싸여 있다. 펀은 낯설고 쑥스러운 듯 일종의 기둥과 벽이라고 할 수 있는 철책에 기대어 볼일을 본다. 엠파이어 집의 뒷마당에 쳐진 철조망 담장은 활짝 문이 열려 있고 그곳으로 휘적 휘적 걸어가는 펀의 뒷모습은 차라리 홀가분해 보인다. 바로 앞 장면에서 해안가 앞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세계와 저항하는 움직임이 아니다. 오히려 고향, 원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궤적에 가깝다.
이는 펀의 행동들도 마찬가지다. 펀에게 있어 노동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고역이 아니다. 그녀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흔적을 증명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오늘을 영위한다. 펀은 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이들이 내뱉는 말에 적극적으로 항변하지만 그들의 삶을 교정하려 들진 않는다. 펀에게 있어 이것은 공존하는 가치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다만 수많은 삶을 집어삼켜온 자본의 속성이 또다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려 할 때 이에 굴복하지 않고 노동을 통해 자존을 지켜나갈 따름이다. 아마존 매장을 떠돌아다니는 펀의 모습을 거대 시스템과 자본의 부품이 된 걸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이 없다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펀은 거기에 묶이지 않고 다른 노동을 찾아 떠날 수 있다. 모든 노동의 현장이 아마존으로 상징되는 자본에 잠식당한 세상 자체는 지옥일지 몰라도, 우리는 지옥 같은 곳에서도 여전히 노동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날 수 있다.
요컨대 <노매드랜드>가 재현하는 서부극의 요소들은 하나같이 초기 서부극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순수로의 회귀처럼 보인다. 이것은 <미나리>도 마찬가지다. 개척시대 미국인들의 가치, 이른바 프런티어 정신이 이 영화들의 기반이다. 트럼프가 외친 “Make America Great Again”의 복귀 시점이 1970, 80년대 가부장의 권위가 무너지지 않았던 산업화 막바지의 미국이었다면 주변부에서 미국을 탐색하는 이들이 되돌아가고자 하는 시기는 훨씬 이전 초기 서부극의 이미지들이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고, 자연에 대해 일대일로 마주보고, 사람들을 향한 선의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세상. <노매드랜드>가 낭만적으로 보인다면 바로 이러한 초기 서부극의 이미지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클로이 자오 감독이 초기 서부극의 가치들을 복원시키고자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들이 매혹된 건 스토리, 주제, 메시지가 배제된 (서부극의) 순수한 이미지들이다. 모뉴먼트 밸리의 압도적인 황량함. 비어 있어서 거꾸로 가득 찬 공간에 내던져졌을 때 오늘날의 영화는 어떻게 화답할 수 있는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미나리>는 마치 1800년대처럼 농장을 개척하면서 가족의 역사, 연대의 기억을 쌓아나간다. <노매드랜드> 역시 미국 중서부의 풍광 속에서 개인과 개인 사이의 거리를 실감시킨다. 자연 앞에서 선 단독자들은 사람 대 사람끼리 직접 마주 소통하는 대신 자연을 매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먼저 떠나간 이들의 기억과 함께 사막의 밤을 새워본 사람이라야 공감할 수 있는 세계가 스크린 너머에, 있다.
얼핏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낙관적, 낭만적 시선은 단 한장의 이미지에서 출발한 장면들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펼쳐진 지평선 위에 홀로 서 있는 한 사람. 세계가 압도적인 빈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는 진실. 대중교통을 자주 타는 사람들은 노선표 위에 그려진 지도로 상상할 뿐, 차를 탔을 때 허락되는 길을 실감하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차도로만 다녀본 사람은 길 저 너머에서 피는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서사와 사건의 영역에 귀속된 이들은 이야기라는 지도 바깥에 있는 세계를 좀처럼 인지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 기억 속의 서부는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초기 서부극이 광활한 지평선 한가운데 인물을 던져두었을 때, 비로소 서부라는 공간이 탄생했다. 반쯤 농담으로 말하자면 서부극만큼 지구의 인구밀도, 빈 공간의 경이로움을 확인할 수 있는 장르도 없다. 그리고 지금, 이방인들이 다시금 미국영화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그 압도적으로 광활하고 고독하면서도 빛나는 이미지들을 캐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