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인터뷰]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 이제훈
2021-06-02
글 : 김현수
사진 : 최성열
표현의 자유 연기의 재미

이제훈의 얼굴 근육은 쉴 틈이 없다. 그가 연기한 인물들이 생각에 잠길 때나 누군가를 비웃거나 화를 낼 때나 박장대소할 때도 그는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보다 몇배는 더 자주 눈썹을 들썩이고 입꼬리를 달싹거린다. 드라마 <시그널>(2016)의 박해영 경위를 연기할 때는 이런 그의 부지런한 표정이 인물의 감정보다 종종 앞설 때가 있었다. 하나 <박열>(2017)의 아나키스트 박열을 연기할 때 그의 얼굴은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한결 가벼워 보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이하 <무브 투 헤븐>)에서 그가 연기하는 전직 복서 상구는 이제 막 출소한 전과자로, 더럽고 우중충하고 비관적이기까지 해서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상구의 얼굴에선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를 꿈꾸며 절박하고 괴로운 마음을 쏟아내던 <파수꾼>(2010)의 기태, <사냥의 시간>(2020)의 준석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슬픈 사연을 지닌 전직 육군 대위 김도기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는 <모범택시>에서 학생들에게 돈 뺏기는 소심한 기간제 교사, 가짜 조선족 왕 사장 등 변장 캐릭터를 능청스럽게 소화하며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이제훈의 연기가 달라진 것일까. <사냥의 시간> 공개 이후 다시 만난 그는 배우의 쓰임새, 연기에 대한 자신의 달라진 생각을 들려줬다. 조금씩 진화해가고 있는 배우 이제훈의 새로운 모습을 <무브 투 헤븐>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초 <씨네21>과 만났을 때 <무브 투 헤븐> 출연 소식을 전하면서 “유품정리사에 관한 이야기다. 몸을 좀 쓰게 될 작품인데 배우 이제훈의 혈기 왕성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다. 유품정리사라는 직업과 액션의 접점을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드라마를 보고 나니 알겠더라.

=지금껏 참여했던 작품 중 가장 빨리 출연을 결정했다. 촬영 전에 몸을 만드는 기간은 정말 고됐지만 열과 성을 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작품이 너무 좋아서였다.

-처음 대본을 읽은 시기가 언제인가.

=지지난해 추석 연휴 즈음, <도굴>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 대본을 받았다. 그동안 읽은 작품 중 나를 가장 많이 울게 한 작품이었다. 이 북받치는 감정을 나만 느끼는 건가, 함께 만들어갈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너무 궁금해 바로 찾아갔다. 감독님과 제작자 모두 너무 좋은 사람들이어서 확신을 갖게 됐다. 정재연, 김미나 대표님께 매우 감사드린다.

-<무브 투 헤븐>의 어떤 점이 마음을 울렸나.

=에피소드 형식을 띤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 유품정리사가 고인의 유품을 고인의 가족 등 남겨진 사람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전해지는 사연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가슴을 후벼파듯 전해진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왜 이렇게 이들의 사연에 심취하게 됐고 또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것을 시청자들과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전직 복서인 상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했는지, 상구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이 작품의 중요한 화자는 유품정리사 그루(탕준상)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지닌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하고 정직하고 깨끗한 시각,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먼저 마음에 들었다. 상구는 그루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다. 감옥에서 막 출소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부정적이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안하무인 격의 인물이다. 그런데 또 그 성격이 매력적이더라. 그에 대한 외적인 설정도 그루와 반대되도록 표현하고 싶었다. 굉장히 더럽고 비호감인 외형으로 형상화시키고 싶었다. 그루와는 여러모로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인데 서로를 경계하던 두 사람이 유품 정리를 하면서 변화하고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각적으로 <레인맨> 같은 영화가 떠올랐고 일종의 버디무비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새롭게 또 나만의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됐다.

-상구의 외형적인 특징을 만들어나갈 때는 무엇을 고민했나. 김성호 감독은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영화적인 캐릭터가 필요했”고 그가 바로 상구라고 이야기하더라. 10개의 에피소드가 반복되듯 펼쳐지면서 상구의 내면이나 상황 변화가 긴장과 위기를 불러일으키는데, 윤지련 작가 역시 상구에 대해서는 배우를 믿고 맡겼다고 이야기했다.

=감독님을 비롯해 제작진이 내 의견을 믿고 따라줬다. 드라마의 주축이 되는 화자는 그루라서 상구는 어떤 변주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상구는 애초 유품 정리에 대해 편견과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고 또 융화되기 힘든 사람이지만 점점 변화하는 인물이길 바랐다. 나라면 절대 입지 않을(웃음) 색이 강렬하고 프린트가 과하게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모습, 과거의 복싱영화들 속 캐릭터를 생각하며 맥가이버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을 떠올렸다. 그래서 상구의 과거 이력도 이종격투기보다는 복서였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냈다.

-상구는 장르적 상황에 놓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마냥 무겁지만은 않은 상황과 감정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거친 외모를 앞세워 망가진 모습들을 종종 보여주는데 어두운 내면과 장난기 가득한 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이제훈 배우가 지닌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됐다. 최근작인 드라마 <모범택시>나 영화 <도굴> <박열> 등에서도 같은 면을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의 연기색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여도 될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예전에는 캐릭터의 표현 방식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단순히 대사나 상황에 집착해서 그것을 똑바로 해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물의 상황을 온전히 느끼면서 표현하자는 쪽으로 나 자신을 조금씩 확장해나가고 있다. 대사는 하나의 가이드이고 그 상황이 주어졌을 때 맥락만 달라지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경험하기 시작했다. 캐릭터란 도화지 위에 있는 밑그림일 뿐이고 배우는 더 자유롭게 색을 채워나가도 되겠더라. 그것이 내가 연기를 하면서 발견해낸 가장 큰 재미다.

-공교롭게도 <무브 투 헤븐>의 전직 복서 상구에 이어서 <모범택시>에서도 전직 육군 대위 김도기 역을 맡아 상당한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평소에도 운동을 꾸준히 하긴 했으나 이번에는 상구의 몸에서 어떤 사연이 읽히기를 바랐다. 촬영 4개월 전부터 하드 트레이닝을 했는데 일주일에 6일, 하루 2시간 이상씩 운동했고 ‘코리안 좀비 MMA’에서 코치들에게 복싱을 배웠다. 몸을 만드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지만 캐릭터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이를 악물고 했다. 이렇게 액션에 몰두한 작품은 처음이었는데 확실히 큰 자양분이 될 것 같다. 스스로 공부도 됐고 앞으로 더 화끈한 장면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도 생겼다.

-드라마 <모범택시>의 김도기 역을 맡으면서 극중 다양한 변장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최근에는 가짜 조선족 왕 사장을 연기하며 목소리를 이상하게 변주했는데 느끼하지도 과하지도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연기를 능청스럽게 하는 것도 변화하는 배우 이제훈의 모습일까.

=그런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웃음) 나 나름으로 언젠가 이런 상황을 연기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공부하고 연구해온 것들이 있다. 많은 영화를 보면서 마음먹고 메모해두고 기억했던 것들을 즉각적으로 꺼내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내 역량이 조금씩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연기 라이브러리를 채워나가는 시도를 꾸준히 할 생각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겪게 된 촬영 현장의 변화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배우 입장에서는 무엇이 달라졌나.

=현장에서 모두가 마스크를 쓰는 풍경이 낯설고 두렵다. 촬영장 통제가 더 엄격해져서 지나다니는 행인들이나 혹은 현장에 응원하러 오는 사람들도 철저하게 차단해야 하는 상황을 보게 됐다. 나로서는 작품이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졌는데 그걸 공개하는 과정이 더 어려워졌다는 게 안타깝다. 그래서 내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작품의 소중함을 더 느낀다. 과거에는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면서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더 진솔해지고 또 함께 만드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됐다.

-김유경 대표, 양경모 감독과 공동 설립한 제작사 하드컷의 라인업이 공개되고 있다. 우선 왓챠와 공동 기획하는, 4명의 배우들이 각각 단편을 연출하는 <언프레임드>는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나.

=나를 포함해 박정민, 최희서, 손석구 배우가 각각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맡는다. 박정민 배우의 작품은 최근 촬영이 마무리되었고 이어서 손석구, 최희서 배우가 만들 예정이다. 나는 그 이후에 연출하게 될 것 같다. 지금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하드컷에서는 시리즈 드라마나 독립영화 등 다양하게 열어둘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내가 혹시라도 연기를 더이상 못하게 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나를 가장 살아 숨 쉬게 할 것 같다. 물론 역량은 부족하지만 많이 공부하면서 사람들과 협업해나갈 생각이다. 하드컷이란 회사가 창작자들의 허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언젠가부터 <씨네21> 기자들이 이제훈 배우를 만나면 꼭 묻는 질문이다.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작품은 무엇인가.

=<모범택시> 촬영을 끝내고 다음날 오랜만에 본 영화가 <우먼 인 윈도>였다. <이창>을 모티브 삼아서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직접적으로 차용한 장면들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오마 샤이 주연의 <뤼팽> 시즌2도 기다리고 있고 <F1 본능의 질주> 시즌3는 안 보고 아껴두고 있다. 추천작을 이야기하기엔 최근에 본 작품이 너무 없다. 그래도 <미나리>는 챙겨 봤다. 한예리 배우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너무 대견하고 또 훌륭한 작품에 출연한 것이 부럽기도 했다. 언젠가는 나도 할리우드 작품에 출연할 수 있기를 꿈꿔보았다.

-최근작들을 보면서, 배우 이제훈은 어떤 배우의 모습을 지향하고 생각이 과거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해졌다. 거칠게 비교 대상을 두고 질문해보자면, 당신은 알 파치노를 꿈꾸는가, 해리슨 포드를 꿈꾸는가.

=(박장대소하며) 너무 어렵다. 알 파치노나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를 보면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좀더 유연해지고 나를 확장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이제는 해리슨 포드처럼 능청스럽고 여유롭게 임하는 모습이 중요해졌다. 넘나든다, 라는 표현이 감히 어려울지 몰라도 두 가지 면을 아우를 수 있는 배우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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