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역할인가요?” 2년 전, 고 이춘연 씨네2000 대표의 연락을 받고 김서형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여고괴담4: 목소리>의 음악 교사는 그렇게 12년 만에 돌아온 <여고괴담> 시리즈에서 예기치 못한 부활의 기회를 맞이했다. 모교에 부임한 비밀스러운 교감 선생 은희로 재탄생한 김서형은 귀신보다 더 슬픈 사연과 광기를 끌어안은 채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드라마 <SKY캐슬> <아무도 모른다>에 이어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모교>에서도 그녀는 아이들 세계의 주변을 맴도는 범상치 않은 어른으로 남게 됐다.
한편 <도가니>의 아역으로 데뷔해 최근 드라마 <펜트하우스>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김현수는 은희의 과거와 닮은 모습을 한 재학생 하영으로 분했다.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지만 겉으로는 아픔을 내색하지 않는” 소녀의 날 선 결기를 커다란 눈동자에 새기는 동안 김현수는 자신에게서 “전에 없던 거칠고 강한 면모”를 탐색할 수 있었다.
-상담 교사를 자처한 교감 은희는 폐쇄된 창고인 ‘고스트 스폿’에서 하영을 마주친 뒤로 교내 성폭력 사건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하영의 아픔을 헤아리려 애쓴다. 비슷한 아픔의 유대를 가진 두 사람의 연결고리를 어떻게 해석했나.
김서형 은희는 과거에 발묶여 사는 인물이라 겉모습만 어른이 된 것일 뿐이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린 학생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의 일처럼 이입해 과격한 응징도 하게 되지 않았을까. 나는 은희가 그 시절에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던 어른들을 생각하며 지금의 아이들을 위해 움직이는 거라고 봤다.
-<여고괴담> 시리즈에 제작진으로 참여했고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를 제작한 이미영 감독의 감독 데뷔작이다.
김서형 제작사 씨네2000에서 <여고괴담> 시리즈를 함께했던 멤버였기에 믿음이 갔다. 여성 PD, 여성감독, 그리고 나까지 세 사람의 쿵짝이 정말 잘 맞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3개월의 촬영 기간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늘 같이 밥을 먹고, 촬영이 없어도 웬만하면 계속 그 근처에서 지냈다. 서울에서 우리 강아지를 데리고 광주에 내려와서 생활했을 정도로 서로 힘이 되는 관계였다. 나중에야 믹싱실에서 영화를 제대로 보고 감독님한테 한마디 했다. “아니, 내 역할이 이렇게 힘든 거였어요? (웃음)”
-호러 장르와 결합해 은희의 캐릭터가 복수를 하는 서사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표현 수위에 있어 고민이 되었을 법하다.
김서형 현실과 비교해 우리 영화의 소재가 그다지 이질적이거나 별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요즘의 세태를 생각하면 영화의 본질이 아닌 다른 부분으로 괜히 주목받게 될까봐 걱정은 됐다. (성폭력 사건과 관련된) 선생, 군인 캐릭터가 모두 남자니까 마치 여자들이 남자를 다 처단하는 것 같은 구도로 맥락 없이 보이려나 싶은…. 김서형과 페미니즘은 어느새 늘 같이 언급되지 않나. 사건에 대해 함구하라고 종용하는 가장 나쁜 인물인 교장이 여성인데, 작품 준비 단계에서 이 인물도 남성으로 바꿀까 고민하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또 여성의 문제인 동시에 아이들의 문제인 점도 내게는 중요했다. 현재의 아이들이 겪는 폭력을 마주하면서 어른으로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질문하며 연기했다.
-김현수 배우는 <무서운 이야기>, 김서형 배우는 <여고괴담4: 목소리>와 <검은집> 등에 출연하면서 이미 공포영화를 경험한 적 있다. 배우로서 호러 장르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느끼나.
김서형 나는 장르에 대한 심리적 장벽 자체가 없다. 이번 작품을 선택한 것도 캐릭터의 감정이 좋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꼭 <여고괴담> 타이틀을 걸고 호러 장르로 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1980년 광주의 역사가 매우 중요한 영화였기 때문에 굳이 공포 장르로 풀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그 영화처럼. 갑자기 제목이 생각이 안 나는데 미국영화 중에 와이프가….
김현수 데이비드 핀처의 <나를 찾아줘>요?
김서형 어! 그거!
-아니 어떻게 ‘와이프가…’란 말만 듣고 데이비드 핀처 영화를 떠올리나.
김현수 딱 생각났다. 고어물 빼고 장르영화는 다 좋아해서. (웃음)
김서형 <나를 찾아줘>의 로저먼드 파이크 같은 캐릭터와 스토리로 만들어보면 어떨지 제안도 했었다. 물론 씨네2000의 <여고괴담> 시리즈의 정체성이 가장 중요하긴 했지만 여러 가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이 내게는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숨가쁜 호흡과 날 선 비명, 떨리는 몸 등 호러 장르의 컨벤션에 부응하는 연기 스타일이 있는데, 이런 신체적인 표현에 대해선 어떻게 접근했나.
김현수 숨소리가 정말 중요하구나, 느꼈다. 처음에 하영이 창고에 들어가서 주위를 둘러보는 장면이 있는데 감독님이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두려움에 떠는 숨소리를 계속 들려달라고 주문했다. 내 숨소리에 따라 관객이 놀랐다가 긴장했다가 또 이완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좀더 극적으로 표현해도 괜찮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서형 공포영화라서 특별히 더 테크니컬하게 접근하진 않는다. 난 워낙에 막장 드라마에서도 이미 많이 지르지 않았나. (웃음) 다만 눈빛과 작은 몸짓에 대한 부분은 신경을 많이 썼다. 특히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손을 어떻게 써야 할까, 손의 디테일을 고민한 편이다. (김현수를 보며) 근데 숨소리는 베드신이 더 어렵다? 공포영화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
김현수 어머, 베드신은 아직 안 해봐서…. 나중에 하게 되면 선배님 말씀이 꼭 기억날 것 같네요!
-오늘 커버 현장의 분위기도 그렇고 얼마 전 ‘후아유’ 코너로 만난 드라마 <마인>의 정이서 배우도 김서형 배우에 대한 사랑을 열렬히 고백한 바있다.
김서형 그런데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챙겨주는 선배가 못 된다. 기본적으로 다들 이미 너무 잘하고 있고, 연기란 것은 특히 각자가 자기 스타일대로 알아서 하는 것이라 생각해서다. 선배, 후배 따지기보다는 그냥 현장에서 연기하다 힘들면 같이 아이스크림 사먹고 그러는 정도고 상대가 필요에 의해 내게 먼저 조언을 청하면 그땐 열심히 답해준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차라리 인생을 좀더 오래 산 사람으로서 쓸모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배우라는 특별한 일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게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다는 것 하나는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영화 후반부에 은희가 가진 트라우마가 1980년 광주를 진압한 군인들의 폭력과 얽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충격적인 전개인데 시나리오를 읽을 때 어땠나.
김서형 소름이 돋았다. 읽자마자 ‘감독님에게 답을 주고 싶다’고 했더니 우리 매니저가 그래도 하루는 있다가 하자고 할 정도였다. “아니, 지금 자존심이 문제야?”라고 내가 그랬다. (웃음) 그때가 <SKY캐슬>을 끝낸 뒤, 20년이 넘는 연기 인생 중 가장 바빴던 시절이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스케줄에 마음과 달리 몸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SKY캐슬>에서 아직 다 터뜨리지 못한 내면의 답답함이 있었고 이 작품에서 쌓여 있는 에너지를 제대로 폭발해버리고 싶었다.
김현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학교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영화도 봤지만, 이런 (성폭력) 사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읽고 그제야 ‘그래, 정말 이런 일도 있었겠구나’ 싶더라. 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온 것처럼 실제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인 동시에, 요즘 우리 곁에서도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어서 동시대적인 이슈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다.
-두 사람의 10대는 어땠나.
김현수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대체로 1년에 한두 작품은 꾸준히 해온 리듬이 몸 안에 쌓인 느낌이다. 작품이 없는 해에는 종종 초조하기도 하고. 연기를 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김서형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배우를 꿈꿨고 지금도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10대 땐 배우가 너무 되고 싶은데 기회가 있는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는 현실에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늘 학교를 걸어다녔다. 지금의 나는 조금 지칠 법도 한데 그때 그 절박했던 초심이 아직도 강렬해서 이 일을 놓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