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도 1등, 성질도 1등’인 해녀 진옥은 매일같이 깊은 바닷속에서 보물처럼 반짝거리는 해산물들을 건져올린다. 제주의 바다가 삶의 전부였던 진옥 앞에 어느 날, 다큐멘터리 PD 경훈이 나타난다. 그가 매니저를 자처하며 주변을 맴돈 뒤로 진옥의 얼굴엔 맑은 웃음이 피어난다. 일찍이 소중한 이를 잃고 혼자 외롭게 아픈 남편을 돌봐온 진옥에게 경훈의 따뜻함이 스며든 덕이다. 그렇게 <빛나는 순간>은 상실의 아픔을 겪은 진옥과 경훈이 서로의 위로가 되어주는 과정을 그린다.
해녀의 삶과 제주의 아픈 역사까지 고루 조명한 <빛나는 순간>은 배우 고두심에게 “제주 출신인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나”라는 각오를 다지게 만든 작품이었다. 올해로 데뷔 49년차. 드라마 <전원일기> <사랑의 굴레> <목욕탕집 남자들> <꽃보다 아름다워> <디어 마이 프렌즈> <동백꽃 필 무렵>,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인어공주> <엑시트> 등 수십편에 출연하며 7개의 연기 대상을 수상한 고두심은, 현재에 만족하는 대신 인생 처음으로 물 공포증을 이겨내고 “파도의 리듬을 즐기는” 해녀 진옥이 되었다. 새롭게 깨달은 수영의 즐거움부터 제주의 풍광, 진옥의 심정까지, 그는 그림을 그리듯 설명을 이어갔다.
-인터뷰 직전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해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시죠?
=감사합니다. 예전에 영화 <질투>로 해외에서 여우조연상을 탄 적은 있는데 주연상은 처음이에요.
-며칠 전 시사회에서 <빛나는 순간> 완성본을 처음 보셨는데 영화는 어떠셨어요?
=예쁘게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후반작업하느라 감독님이 고생 많으셨을 것 같아서 짠하고 감사하고. 좀더 날씨 운이 따라줬으면 하는 신들도 있었는데 제주도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하다보니 어쩔 수 없었죠.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큰 스크린에 얼굴이 비치는 게 두렵다”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여전히 그러신가요?
=그런 마음은 지금도 있어요.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커다란 스크린에 드러나는 게 두려워요. 그런 두려움 때문에 그동안 영화에 쉽게 도전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빛나는 순간> 시나리오는 어떻게 보셨나요? 감독님께서 처음부터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쓰셨다던데요.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어떤 배우가 거절할 수 있겠어요. 고두심 얼굴이 제주도 풍광이라는데. (웃음) 4·3사건의 아픈 상처가 담겼고 제주도의 혼이 깃든 해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주도 출신인 제가 제일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다 싶었죠.
-제주 방언도 따로 연습할 필요가 없으셨겠어요.
=제주도에서 십수년을 살았고 지금도 집에선 항상 제주 사투리로 말하니까요. 어느 누구보다 자연스러울 거예요.
-촬영 때 제주도에는 얼마나 계셨어요?
=두달 정도. 정말 좋았어요. 19살에 고향을 떠난 뒤로 그렇게 오래 머물러본 적이 없거든요. 촬영 없을 땐 스탭들이랑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곳도 다니고. 내 고향이라 편한데 그만큼 걱정도 됐어요. 혹시나 사고가 나진 않을까 하고.
-수중촬영 신이 특히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원래 물 공포증이 있어서 <인어공주> 때도 바다에서 촬영하지 못하셨는데 이번엔 전부 직접 하셨죠.
=<인어공주>도 처음엔 바다에 들어가는 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대본 리딩 끝나고 감독님이 물어보시더라고요. (제가 맡은) 연순이 젊을 때 해녀였으니, 자맥질하러 들어갔다가 쏙 나오는 것만 촬영할 수 있겠냐고. 한컷이니 괜찮겠다 싶었는데 막상 들어가니 너무 무서운 거예요. 결국 못했죠. 이번엔 해녀 삼춘들이 같이 있으니 나 하나 못 건져주겠나 싶었고, 거기서 오는 안도감이 컸어요. 재밌는 게 몸이 물에 익숙해지니까 자연스레 파도 따라 리듬을 타게 되더라고요. 기분 좋아서 “감독님, 한번만 더 찍을게요” 한 적도 있어요. (웃음)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도 “감독님, 오케이 신 없잖아요. 나 고두심이야, 나 믿고 가요”라며 촬영을 이어가셨다면서요.
=그날은 파도가 굉장히 셌어요. 감독이 저 멀리서 오케이하는데 소리가 영 아닌 거예요. 49년을 했는데 그 사람이 진짜 흡족해서 오케이했는지 아닌지 그 감정을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 믿고 더 가자”고 했더니 감독님이 웃으시더라고요. 그러면서도 고마워했던 것 같아요.
-처음 물에 들어가실 때 꼭 풀로 수경을 비비고 들어가시던데, 그런 디테일은 실제 해녀들의 행동에서 차용하신 건가요?
=맞아요, 그게 쑥이거든요. 쑥을 물에 적셔서 수경을 닦으면 거짓말처럼 시야가 밝아져요. 제가 며칠 가만히 해녀 삼춘들을 보니까 꼭 그렇게 쑥을 허리나 머리에 꽂아뒀다가 닦고 들어가더라고요. 잘 봐뒀다 촬영 때 똑같이 했죠. 잠수할 때도 “삼춘, 잠수는 어떻게 해? 한번 해봐~” 하고 폼을 유심히 보고 배웠어요.
-타인의 몸짓을 디테일하게 잡아내고, 곧바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건 학창 시절 고전무용을 오래하신 영향이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엄청 도움이 됐죠. 춤을 배운 사람들은 민첩하고 움직임을 잡아내는 눈썰미도 날카롭거든요. 그 점이 연기할 때 정말 도움이 많이 돼요. 무용 하니까 <춤추는 가얏고>라는 드라마가 생각나는데, 그때 버선발로 무당처럼 칼 위에 오르는 춤을 춰야 하는 신이 있었어요. 유명한 무당이 딱 한번 시범을 보여주셨는데 제가 그걸 보고 단번에 칼 위에 올라섰어요. 현장에 있던 모두가 놀랐고 나중에 무당에게 자기 수제자로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도 받았죠. 그래서 “선생님, 저는 그냥 배우 하겠습니다”라고 정중히 말씀드렸어요. (웃음)
-촬영 때마다 잠수복으로 갈아입고 피부 톤을 어둡게 해야 했는데 그 과정이 힘들진 않으셨어요?
=힘들었죠. 그래도 계속 반복하다보니 잠수복을 입고 벗는 게 처음보단 수월해졌어요. 분장 같은 경우는, 제가 진옥이보다는 곱잖아요. (웃음) 진옥이는 매일 바닷가에 나가느라 피부가 그을렸을 테니 손, 목 이런 부분까지 어둡게 분장하고 주근깨도 그려넣었어요. 그런데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다 지워지니까 계속 새로 덧입혀야 했고요. 한번은 동백숲에서 촬영이 있었는데, 그때 동백충이 올라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거예요. 그 위에 고무옷을 입으려니 정말 힘들고 괴로웠어요. 신기한 게 그때 딱 얼굴만 멀쩡했거든요. 그래서 다행히 촬영은 계속할 수 있었어요.
-숲에선 진옥의 인터뷰 신을 촬영하셨죠?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어떻게 부모를 잃었는지 설명하는 신이었는데, 감독님에게 “나한테 맡겨달라”며 대본에 빽빽하게 적어와 10분간 독백을 이어가셨다고요.
=4·3사건은 내가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많이 듣고 자랐어요. 일례로 어릴 때 친척집 제사에 갔는데, 분명 우리 집 제사인데 다른 집들도 다 우는 거예요. 아버지에게 왜 그러냐고 물으니 한날 한시에 다 같이 돌아가셨다고 하셨어요. 어린 나이에도 들으면서 얼마나 무섭던지. 촬영 때 그런 순간들이 전부 떠오르면서 정말 내가 본 것처럼, 신들린 것처럼 쏟아냈어요. 감독님도 컷 소리를 못하고 보는 스탭들도 울먹거리고. 해놓고는 나도 먹먹하니, 정말 내가 한 게 맞나 싶을 정도였죠.
-평소에도 대사를 따로 추가하거나 애드리브를 많이 넣는 편이신가요?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내 시대, 내 정서와 맞아떨어질 때 주로 그렇죠. 잘해야겠다 싶은 신은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집에서 쉬는 날에도 거기에 꽂혀 있어요. 이걸 어떻게 잘게 짓이겨서 내 것으로 만들까, 그때의 날씨는 어떨 것이고 그럼 난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소품을 준비하면 좋을까. 그 상상을 현실로 이뤄냈을 때의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지현우 배우와의 호흡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어요. 자기관리가 철저하다고 여러 차례 칭찬하셨던데요.
=속이 아주 강해요. 첫인상은 여리여리했는데 촬영을 같이할수록 극중 경훈이처럼 아주 단단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휴차 날에도 “어제 뭐했어?” 하면 혼자 한라산 다녀왔다고. 제가 제주에서 아무리 맛있는 걸 공수해와도 “선생님, 괴롭게 하지 마세요” 하면서 두달 내내 다이어트를 하더라고요. 알수록 굉장히 강하고 매력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옥도 상군 해녀로서 평소엔 굉장히 단단한 사람인데, 한번씩 쑥스러운 웃음이 스며들 때가 있었어요. 경훈이 진옥을 자기 무릎 위에 뉘이고 귀에 들어간 물을 빼줄 때 특히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표정 연기에 신경을 쓰기도 했지만, 진옥이 그렇게 소녀처럼 부끄러워하고 좋아하면서 올려다보는 모습을 감독님이 참 예쁘게 잡아주셨더라고요. 평생 아파서 누워 있는 진옥의 남편이 그런 걸 해줬겠어요. 경훈의 따뜻함이 진옥이 잊고 살던 무언가를 건드린 거지.
-또 서로의 상실을 이해하고 다독여줄 수 있는 관계라 애정이 더 깊어졌던 것 같아요.
=그렇죠. 상실의 아픔을 잘 끌어안고 “살다보면 살아진다”고 진옥이가 이끌어주니 경훈이도 거기서 마음이 생겨난 거라 생각해요.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잖아요. 진옥과 경훈의 사이가 흔한 관계나 감정은 아니지만, 단순히 30여년이란 나이 차에만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조금 특별한 사랑 이야기일 뿐이죠.
-다른 작품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얼마 전 <다큐 플렉스-전원일기 2021>이 방영됐는데요. 종영 20년 만에 드라마 <전원일기>의 출연자들을 만나고, 함께 22년간 출연했던 작품을 되짚는 자리라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제가 연기한 영상을 다시 보는 게 엄청 재밌었어요. 제가 맡았던 은영이가 맏며느리였잖아요. 며느리가 보면서 “어머니, 저는 안 그럴게요”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도 괜찮다”라고 하면서 웃었어요. (웃음) 김혜자 선배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전원일기>는 정말 특별한 드라마였어요. 그 작품이 있었기에 지금의 고두심이 있다는 생각도 들고. 요즘 드라마는 뭐랄까, 감각적이잖아요. 어떻게든 세분화해 보여주려 하고, 상대의 잘못을 정확히 재서 잔인하게 복수하죠. 지금 와서 보면 <전원일기>는 남의 허물도 덮어줘가며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마음을 치유해주는 드라마였다고 생각해요. 그 덕에 이렇게 오랜 시간 회자되는 게 아닐까요.
-작품은 어떤 기준으로 고르세요?
=특별한 건 없어요. 운 좋게 제가 참여한 작품들 중에 좋은 게 많았죠. 굳이 꼽자면 감독님과의 첫 미팅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시나리오 읽기 전부터 감독님과 대화가 잘 통하면 마음이 잘 맞겠다, 현장에서도 편하게 임할 수 있겠다는 감이 오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요.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 <부탁해요, 엄마> <디어 마이 프렌즈> <동백꽃 필 무렵>, 영화 <인어공주> <채비> <엑시트> 등 필모그래피의 절반 이상에서 엄마 역을 맡아오셨습니다. 단 한 작품만 빼고 전부 시어머니가 아닌 친정엄마를 연기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 혹시 그 이유를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보니 더 잘 알겠더라고요. 그런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친정엄마 역할만큼은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한번 역할을 맡으니 계속 들어온 것도 있지만 제가 고집한 부분도 분명 있어요.
-최근의 인터뷰를 보면 내면을 많이 비우고, 배우로서의 고두심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아요.
=늘 그래요. 내 마음이 복잡하고 욕심이 가득하면 어떻게 상대의 마음을 울리는 배우가 되겠어요. 잘 비워지진 않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다보면 마음도 정제되겠죠. 또 작품에서 배우만 있고 인물이 없으면 안되니까, 스스로를 가리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요.
-고두심, 윤여정, 나문희 배우의 활약을 두고 ‘K할머니 신드롬’이라 일컫는데, 새로운 흐름을 이끈 당사자로서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기분 좋죠. 나문희, 윤여정, 고두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전부 다르지 않나요. 개성도 있고 연기 스타일도 확연히 다르죠. 고유한 연기 톤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영향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 캔 스피크>를 보고 ‘저건 고두심도 못한다, 문희 언니가 진짜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화해서 “언니, 딱 언니 배역이었어. 그건 어느 누가 해도 안되겠더만” 했더니 (나문희 배우 톤으로) “야야, 그런 소리 하지 마라” 하시더라고요. (웃음) 여정 언니도 <미나리>로 상을 받은 후에 잘하셨다고, 축하드린다고 문자를 보내니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겨우 살아 돌아왔어”라고 답장 온 게 기억이 나네요. 두분 다 제가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들이에요.
-내년이면 데뷔 50주년이 되는데요. 근 50년간 배우로 활동하면서 선생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였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배우를 떠나 제 인생 전체를 놓고 보자면 아이를 낳은 순간이 아닌가 싶어요. 나이가 들면서 아이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느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아이를 갖고, 아이가 태어난 순간이 살면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빛나는 순간>을 보시는 관객도 각자 자신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였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