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마인> 이나정 PD, “‘여성스러움’이란 단어를 재정의하고 싶었다”
2021-07-08
글 : 임수연
사진 : 오계옥

-방영 전부터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 <힘쎈여자 도봉순>의 백미경 작가와 <쌈, 마이웨이> <좋아하면 울리는>의 이나정 PD의 조합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었다. 준비 과정은 어땠나.

=백미경 작가님은 모성에 대한 부분을 각별하게 생각했다. 새엄마 서희수와 친엄마 강자경이 함께 하준이를 키우는 결말도 처음부터 생각해놓으셨다. 나는 여기에 정서현까지 함께하며 세 여자가 연대하는 것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원래 제목은 <블루 다이아>였는데 <마인>이라는 타이틀도 제안드렸다. 작가님이 흔쾌히 받아들였고 끝까지 진짜 나의 것을 찾아간다는 주제를 가지고 좋은 글을 써주셨다. 나와 작가님은 나이대도 다르고, 작가님은 아이를 낳고 직접 키워보셨지만 난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그러니 내가 모성에 대해 굉장히 도식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여자 크리에이터 둘이 함께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새롭게 확장된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인>에서 사회적 편견을 받는 인물들, 예컨대 성 소수자, 미혼모, 계모 등의 캐릭터는 그간 대중문화에서 정형화돼 표현된 경우가 많았다. <마인>에는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접근이 분명 있었다. 연출자로서 이런 선입견을 걷어내고 싶다고 의식했나.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어렸을 때 읽었던 할리퀸 로맨스 책들도 생각나고, 시청자들에게 단순하게 소비되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생각이 분명 들었다. 하지만 진입장벽을 낮추며 오히려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가장 클리셰가 많고 자극에 익숙한 장르에서 새로운 걸 조금씩 보여준다면, 각 잡고 이 이야기만 하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지 않을까. 선입견을 벗어나야겠다고 작정하기보다는 세 여자의 인생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다. 희수를 그릴 때는 ‘새엄마’가 아니라 희수가 맞닥뜨린 인생의 균열을, 자경을 그릴 때는 ‘미혼모’가 아니라 자경이라는 인물의 무모한 욕망과 성장을, ‘레즈비언’인 서현을 그릴 때는 수지최와의 아름다운 멜로를 연출한다고 생각했다. 정서현의 정체성은 동성애자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크게 확장될 수 있다. 그들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좋은 배우들이 연기해 입체감을 더해준다면 선입견은 사라지고 스토리의 태생적인 전형성은 줄어들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했다.

<마인> 속 효원가 세트

-욕망하는 여성을 다루면서 정작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여성 시청자가 납득하지 못하는 작품들이 있다. 중년 여성들의 욕망을 전면적으로 다루는 <마인>을 연출하면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가령 호화로운 세트장과 상류층이란 소재가 여성은 사치스럽다거나 하는 식으로 드라마가 제시하는 여성의 욕망을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다.

=드라마를 처음 준비할 땐 나 역시 드레스와 파티가 많은 <마인>에서 꾸밈노동을 얼마만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이 집을 보여주는 게 그냥 소비하는 여자들로 비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먼저 정서현 캐릭터는 ‘일하는 여성’이라는 게 명확해서 가능한 한 장소도 많이 바꿔가며 일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그런데 희수가 옷을 많이 갈아입는 건 고민이 됐다. 꾸밈노동이 여성에게 요구되는 과도한 노동이기도 하지만 배우 출신인 희수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게 왜 나쁜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화려한 세계를 버리고 뛰쳐나오는 결말로 나아가기 때문에 콘트라스트를 주기엔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다. <마인>의 여자들은 어떤 물질을 요구하는 계층 상승의 욕구 같은 것은 일절 없고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 효원가 저택 안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심리도 효원가 저택 세트장에서 더욱 극명하게 보여진다.

-특히 드라마 초반 하준이의 친엄마 강자경과 아빠 한지용(이현욱)의 불륜을 다루기가 까다로웠을 듯한데.

=<마인>이 ‘나의 것’을 찾는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 자경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돼 계속 힘들었다. 자경은 미혼모 하면 떠오르는 희생적이고 씩씩한 프레임과는 또 되게 다르다. 자경이 때문에 ‘지저벨’이라는 단어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여자도 남자도 모두 원치 않는,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 서구의 페미니즘에서는 지저벨을 가부장제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로 보는 등 다양한 해석을 한다. 지저벨을 옹호하고 옹호하지 않고의 문제를 떠나 지나치게 악녀화된 여성에 관한 신화를 어떻게 깨뜨려가는지 관련 책을 찾아봤다.

욕망하는 여성의 가장 극단에 있는, 착하지 않은, 비윤리적인 여성의 성장 서사는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결국 자경에겐 갓 태어난 하준이를 버리지 않고 18개월 동안 키웠던 순수한 진심이 있었다. 자경이 내 친구라면 정말 말리고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이고 무모한 여자지만(웃음), 이 사람도 굉장히 뜨겁게 인생의 미성숙한 시절을 거친 거다. 지저벨을 검색하면 마돈나, 빌리 아일리시 얘기가 나온다. 이들을 보면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춤을 추고, 뮤직비디오에 향로가 등장하고….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건 아니지만 조금씩 연결돼서 표현된 부분도 있다. 그래서 드라마 초반에 ‘향로’ 컷이 나온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어려웠다. 지저벨을 구현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 자경 역에 다른 주연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낯선 배우를 캐스팅했다.

=팜므파탈의 정형화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낯설어야 새롭고, 새로워야 위험하다. 그래서 메이드로 들어와 재벌3세 수혁과 사랑에 빠지는 김유연과 강자경은 낯선 얼굴이어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1회 부제도 ‘낯선 사람들’이다. 가난이든 성적인 부분이든 낯선 것에 대한 공포가 있으니 그런 걸 극대화해보고 싶었다.

-<마인>이 다루는 욕망 중 ‘모성’은 어떻게 다루고 싶었나. 자칫 모성 신화의 강요는 여성의 주체적인 욕망을 거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모성’과 ‘여성의 욕망’을 함께 다룰 때는 특히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처음엔 희수가 아이에게 너무 집착한다면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자신이 어떤 비윤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하준이를 사랑하는 거라고. 그런데 실제 아이를 입양한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건 정말 모성이 맞다. 오히려 낳지 않은 아이를 키우면서 생길 수 있는 모성이 희수를 통해 표현됐으면 했다. 실제 드라마에서 빠지긴 했는데 재벌가에서 희수를 버틸 수 있게 했던 게 하준이였다고 말하는 신이 있었다. 되게 높은 풍선에 올라탄 것처럼 불안하고 이상한 곳에 도착했는데 하준이가 희수의 손을 땅에서 잡고 있었다고. 희수에게 6년 동안 험난한 재벌가에서 버틸 수 있게 해준 하준이는 너무 가깝고 예쁜 존재인 거다. 반면 오히려 자경은 모성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봤다. 자경은 하준이를 포함해 자신의 잃어버린 세월을 싹 다 복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두 여성에게 접근하면서 모성을 표현해봤다. 모성이 여성 캐릭터가 맹목적으로 답습해야 할 욕망이 아니라고 할 순 있지만, 여성이 모성을 갖는 게 또 안될 일은 아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 있어 여성만이 갖고 있는 부분도 있다. 다른 기반에서 비롯된 독특한 모성은 어쩌면 개개인의 욕망이나 사랑이 아닐까.

-마지막 회까지 보고 나면 집사들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묻게 된다.

=정작 재벌들은 어딘가 갇혀 있고 집사와 메이드들이 더 자유롭고 신나게 사는 느낌이 있다. (웃음) 이들은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했을 것 같다. 주 집사가 한지용에게 자기를 씹다버린 껌처럼 대했다고 말하는 신이 있다. 한진호가 집사들의 뺨을 때리는 것도 다 봤다. 반면 진심으로 자신에게 사과한 서현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희수도 집사들을 순수하게 대한다. 우발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주 집사는 본인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마인>에선 서로를 질투하고 열등감을 드러내는 게 남자들이다. 그리고 정말 찌질하게 나온다. 반면 여성들은 초반엔 ‘누가 진짜 하준이 엄마냐’를 놓고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연대하고 끝까지 서로를 지킨다. 이 대조는 의도한 그림이었나.

=박완서 선생님이 “(소설 속) 남자들이 게으르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는 데 어떤 의도가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건 의도가 아니라 리얼리즘이라고 한 게 생각난다. (웃음) 난 그 정도까진 아니었고, 그냥 여성스러움이란 단어를 재정의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의리를 보여주는 걸 되게 남자답다고 하지 않나. 여자 같다는 건 질투나 신경전, 작은 일로 삐지는 것의 대명사처럼 쓰일 때가 많은데 말이다. 그런 표현이 정말 이상했다. 여성스럽다는 말을 여성들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마인>은 어떻게 보면 되게 단순한 드라마다. 세 여성의 연대, 쉽고 재밌다. 그래서 이를 표현하는 방식을 많이 고민했다. 드라마에서 보통 남자들은 술자리에서 무언가를 도모한다. 그래서 와인 창고가 많이 등장한다. 여자들은 역시 티타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모든 순간을 신경 썼다. 다이닝 홀은 술 한병 없이 전부 동양과 서양의 티세트로만 표현된다. 배우들도 현장에서 여자들끼리 합을 맞추는 걸 굉장히 재밌어했다. 법정에서 한지용의 뒤통수를 치고 세 여자가 연대하는 장면의 경우 김서형 배우가 “서현이 법정의 문을 열어야 할 것 같다”고 의견을 낸 거다. 나도 그런 식으로 연출하고 싶었다며 신을 만들어갔다.

-<마인>이 한국 드라마사에 남긴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역시, 정서현이 레즈비언이라는 설정일 것이다. 주말 프라임 시간대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레즈비언이 등장하는 작품은 거의 처음 아닌가. 심지어 시청자 개개인의 인권 감수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그의 사랑을 설득시켰다. <마인>을 본 시청자들은 평소 동성애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든 정서현의 사랑을 응원한다. 두 자리 시청률을 기록하며 성공한 드라마가 이 일을 해냈다.

=이보영 배우가 연기한 모성이 맑고 깨끗할 수 있었던 것처럼, 김서형 배우 자체가 가진 힘이 설득한 부분도 분명 있다. 멜로 연기를 할 때 20년의 세월을 압축해서 그간의 그리움을 한번에 보여주는 배우다. 연출하는 감독으로서는 서현이 그리는 날개, 파도, 코끼리를 통해 이들의 사랑이 너무 어렵지 않고 시청자에게 한번에 이해될 수 있게 보여주려고 공을 들였다. 너무 어렸을 때 사랑하다 헤어진 첫사랑이니까 무조건 순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짧은 신을 늘려서 연출한 부분도 있다. TV드라마에서 수용될진 모르겠지만 어린 서현과 어린 수지최가 달리는 장면은 그냥 안고 키스하는 스킨십까지 찍고 싶었다. 서현과 수지최의 사랑은 동성애를 다룬다는 것보다 이들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더 했다. 멜로의 끝을 치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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