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아시아 여성감독이 만든 최고의 영화 4~9위 …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등
2021-07-26
글 : 이주현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4위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변영주 / 한국 / 1995년

한줄 추천: 마지막 장면,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몸을 마주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한국 독립영화사, 다큐멘터리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연작 시리즈다. 척박한 제작 환경에서 진정한 ‘독립’영화로 제작·배급된 과정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변영주 감독은 일본의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사무실에서 카메라와 녹음장비를 장기 대여하고 필름과 제작비를 여기저기서 후원받아 영화를 찍었다. 그렇게 완성된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한국 다큐멘터리로는 최초로 극장에서 개봉해 관객을 만났다. 영화는 또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50년간 가슴 깊이 묻어뒀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역사학자들도 외면했던 여성들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에 일조한다. 영화는 1993년 12월23일 제100차 수요시위 현장을 시작으로, 나눔의 집에서 살아가는 김순덕, 박옥련, 이영숙, 박두리, 강덕경, 송판임 여섯 할머니의 일상을 가까이서 기록한다. 나아가 중일전쟁 당시 중국 우한의 위안소에 있었던 할머니들을 만나 구체적인 증언을 채록한다. 공감 능력과 문제의식, 친화력과 끈기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세상에 알린 변영주 감독의 뜨거운 의지가 작품 곳곳에 묻어난다. 다큐멘터리의 자리와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는 작품이다.

5위 수자쿠 Suzaku

가와세 나오미 / 일본 / 1997년

한줄 추천: 떠나간 자와 남겨진 자의 자리를 응시하는 고요한 시선이 애틋하게 가슴에 머문다.

다큐멘터리로 영화를 시작한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27살에 만든 첫번째 장편 극영화 <수자쿠>로 1997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신인감독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직접 영화의 촬영을 맡은 이는 다큐멘터리 감독 오가와 신스케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촬영 감독 다무라 마사키였다. 가와세 나오미는 고향인 나라현에서 대부분의 영화를 찍었는데, <수자쿠> 역시 나라현의 산간 마을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타하라 고조는 어머니, 아내 야스요, 딸 미치루, 조카 에이스케(시바타 고타로)와 함께 산다. 고등학생이 된 미치루는 사촌 오빠 에이스케를 좋아하고, 에이스케는 할머니에게 자신을 맡기고 떠난 부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외숙모 야스요에게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선 고조가 실종되면서 가족들은 작별의 순간을 맞게 된다. 어린시절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개인적 고백과도 같은 이 영화에는 감독의 영화적 감수성과 특징들이 한데 응집되어 있다. 여름이라는 계절, 그 계절의 기운을 한껏 받은 초록의 대지, 갑자기 쏟아지는 난감한 소나기, 가족에 대한 탐구, 고요한 응시, 그리움과 쓸쓸함의 정서 등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 세계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이 <수자쿠>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6위 내가 여자가 된 날 The Day I Became A Woman

마르지예 메쉬키니 / 이란 / 2000년

한줄 추천: 사회가 요구하는 여자 되기를 거부하려는 여성들. 그들의 부지런한 움직임.

남편인 모흐센 마흐말바프, 두딸 사미라 마흐말바프, 하나 마흐말바프와 함께 마흐말바프 필름 하우스의 일원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마르지예 메쉬키니. <내가 여자가 된 날>은 메쉬키니 감독의 첫 번째 연출작이다. 영화는 세개의 에피소드, 세 여자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9살 생일을 맞은 하바 이야기. 할머니는 하바에게 9살이 되었으니 이제 아이가 아니라 여자라며 어제까지 같이 놀았던 동네의 남자 친구와 놀지 못하게 한다. 두 번째는 결혼한 젊은 여성 아후의 이야기. 아후는 한 무리의 여자들과 차도르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질주한다. 말을 타고 쫓아온 남편은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협박하지만 아후는 더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세번째는 노년의 여성 후라 이야기. 후라는 냉장고, 세탁기 등 온갖 살림살이를 새로 장만해 해변에 늘어놓는다. 후라는 난생처음 자신을 위해 마음껏 소비하고 자유롭게 떠난다. 바닷가 인근에서 하룻동안 벌어지는 세 여성의 이야기를 엮어 억압으로 가득한 여자의 일생을 고찰하게 만든다. 점점 짧아지는 나무 막대기의 그림자를 통해 하바에게 주어진 자유 또한 줄어들고 있음을 긴장감 있게 시각화하고, 자전거를 탄 여자와 말을 탄 남자의 질주만으로 손에 땀나는 추격전을 만들어내는 연출력도 인상적이다.

7위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 한국 / 2001년

한줄 추천: 집이 없어서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길고양이 같은 스무살들에게 보내는 서글프고 아름다운 위로의 편지.

교복 입은 소녀들은 원치 않아도 언젠가 스무살이 된다. 스무살이 된다는 건 무궁무진한 자유를 얻게 되는 동시에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현실의 장벽을 처절히 체감하게 된다. 정재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는 잿빛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다섯 소녀들이 맞이한 스무살의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청춘영화다.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태희(배두나), 혜주(이요원), 지영(옥지영), 비류(이은실), 온조(이은주)는 스무살이 되어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혜주와 지영이다. 서울의 증권회사에 입사해 커리어 우먼의 미래를 꿈꾸는 혜주와 미술 유학을 떠나고 싶지만 집안을 걱정해야 하는 지영은 학창 시절 가장 친했으나 점점 관계가 틀어진다. 자유롭고 엉뚱한 성격의 태희는 집안일을 도우며 뇌성마비 시인과의 인연을 이어나가고, 차이나타운의 쌍둥이 자매 비류와 온조는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판다. 다섯 소녀 사이로 새끼 고양이 티티가 옮겨 다닌다. 이들의 스무살은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정해진 답은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길 잃은 소녀들의 얼떨떨한 표정과 불안정한 뒷모습을 무심한 듯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고양이를 부탁해>의 미덕이다. 무시하거나 대상화하지 않은 채 스무살 여성의 마음과 목소리를 담아낸 세련되고 감각적인 작품.

8위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 Marlina the Murderer in Four Acts

몰리 수리아 / 인도네시아, 프랑스, 말레이시아, 타이 / 2017년

추천: 인도네시아에서 온 정중동의 정의 구현 여성 복수극.

인도네시아의 젊은 감독 몰리 수리아의 세 번째 장편영화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은 복수를 테마로 한 서부극의 특징들을 취한다. 주인공은 남편과 아이를 잃고 혼자 사는 말리나(마샤 티모시). 말리나는 강도들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강간당한다. 침착하고 용감하게 두목의 목을 벤 말리나는 잘린 머리를 들고 경찰서로 향한다. 복수와 고해의 여정에서 말리나와 연대하고 교감하는 건 만삭의 친구 노비, 버스에 동승한 노년의 여인, 식당에서 만난 여자아이처럼 모두 여자들이다. 반면 조서를 작성하는 경찰, 노비의 남편은 모두 무능력하거나 부도덕하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의 단면을 장르영화의 문법으로 비장하면서도 과감하게 그려낸다. 흙먼지 날리는 평화로운 풍경에 감춰진 사회의 야만성에 날카롭게 칼끝을 들이미는 용감한 영화다.

9위 가버나움 Capernaum

나딘 라바키 / 레바논 / 2018년

한줄 추천: 지옥 같은 현실을 향한 날카로운 분노와 냉엄한 고발, 잊을 수 없는 눈빛과 미소.

2018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레바논 베이루트에 살고 있는 12살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이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다. 왜소한 체구, 무표정한 얼굴의 자인이 법정에 서기까지 어떠한 일들이 있었던 걸까. <가버나움>은 한 소년이 겪게 된 벼랑 끝 시간들을 건조하고 세밀한 시선으로 그려내며 레바논 사회의 빈곤과 폭력을 조명한다. 조혼으로 팔려간 어린 여동생 사하르(하이타 아이잠), 불법체류로 체포되는 미혼모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 등 자인 곁에 있던 여성들은 피치 못할 고통을 겪고, 이는 자인과 관객에게 깊은 분노와 절망을 안긴다. 비전문 배우들의 열연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나딘 라바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아랍 여성감독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9위 와즈다 Wadjda

하이파 알 만수르 / 사우디아라비아 / 2012년

한줄 추천: 힘차게 내리밟는 소녀의 페달, 그것이 만들어내는 작지만 단단한 변화의 힘.

사우디아라비아의 소녀 와즈다(와드 무함마드)는 이웃 소년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갖고 싶지만 여자는 자전거를 타면 안된다는 어른들의 단호한 반대에 좌절할 뿐이다. 어느 날 거액의 상금이 걸린 교내 코란 퀴즈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된 와즈다는 자전거를 갖겠다는 집념으로 열심히 코란을 외운다. <와즈다>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인권에 있어 매우 상징적인 영화다.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하이파 알 만수르가 연출을 맡은 영화이자, 이 영화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들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직면하는 사회·제도적 문제를 담아내며 여성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와 뜨거운 의지,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작지만 분명한 변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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