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짧아도 인연은 길다.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에 함께 출연했던 김재화·황미영 배우는 같이 등장하는 장면은 없었지만 이후 인연을 이어오면서 서로의 작업을 응원해주는 끈끈한 선후배 사이가 되었다. 둘의 인연은 ‘숏필름 유니버스’ 프로젝트에서도 이어진다. 국내외 영화제에서 사랑받은 26편의 단편영화를 6편의 옴니버스 장편으로 재구성해 7월부터 6개월 동안 상영하는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먼저 개봉하는 영화 <숏버스 이별행>에 두 배우가 각각 출연한 <중성화>와 <그녀는요>가 포함됐다.
두 영화는 배우들간의 인연과는 정반대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김재화 주연의 <중성화>는 연인과 함께 키우던 고양이의 중성화 수술을 하러 가는 길에 남자가 지긋지긋해진 여자의 이별 다짐을 그린 이야기이며, 황미영 주연의 <그녀는요>는 소개팅 자리에 나온 상대 남자로부터 외모와 삶의 태도에 대해 손가락질받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다.
제작 뒷이야기를 듣다 보니 두 영화 모두 감독이 작품을 구상할 때부터 두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들이 연기한 각각의 인물 자체가 배우가 가진 고유의 매력을 담아내기 좋은 그릇이었다는 사례를 증명이나 하듯 모두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두 배우 모두 서로 다른 극단에 속해 있으면서 영화, 드라마, 공연 등 여러 매체를 오가며 연기하고 있다는 점 역시 닮았다. 배우와 작품 사이의 연관성을 찾다 보면 이런 식으로 대화의 꼬리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다.
두 배우와의 유쾌한 대화에 이어 ‘숏필름 유니버스’ 프로젝트 전체를 소개하는 기사도 덧붙였다. 7월 22일 개봉하는 <숏버스 이별행>을 시작으로 8월 <숏버스 감성행>, 9월 <숏버스 기묘행>, 10월 <숏버스 섬뜩행>, 11월 <숏버스 감독행>, 그리고 12월 <숏버스 배우행>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주제를 담은 단편영화 모음을 미리 만나보자.
-제19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출품작인 <중성화>의 김홍기 감독, <그녀는요>의 원은선 감독과 각자 재미있는 인연이 있다고.
김재화 <코리아>에서 한국 선수 중 한명을 연기한 조민재 배우와 오래 알고 지냈는데, <이혼합시다>라는 단편에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그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김홍기 감독이 나를 염두에 둔 단편을 썼다기에 다시 한번 작업하게 됐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시나리오를 15고까지 수정했는데 매번 우리 집 근처에서 같이 수정했다. 캐스팅이 잘 안되는 배역은 동생들을 추천했는데 수의사는 둘째인 김혜화 배우가 연기하고 간호사는 셋째인 김승화 배우가 연기했다. 사촌 동생이 미술과 소품을 담당했으니 가족영화라고 불러도 되려나. (웃음) 모두가 ‘내 작품이다’라는 생각으로 십시일반 도와가며 찍었다. 또 조민재 배우는 이번에 내가 찍은 단편영화에도 출연했다.
황미영 평소 친한 이상희 배우가 어느 날 카페에서 이야기하다가 단편영화에 한번 출연해보라고 추천했다. 그런 대화를 주고받은 다음날, 인스타그램 DM으로 원은선 감독에게서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다. 나를 생각하며 쓴 시나리오라면서 말이다. 누가 봐도 이상희 배우가 추천했겠거니 의심해볼 상황이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거짓말처럼 우연한 타이밍이었다. 처음엔 내가 영화 출연을 고사할 거라 생각해서 며칠 고민하다가 보냈다고 하더라.
김재화 장편영화에선 느낄 수 없는 단편영화만의 매력이 있다. 배우로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해보지 못한 역할을 연기할 때가 많아서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관객도 나를 다른 시선으로 봐줄 거라는 생각에 좋은 단편이 있다면 많이 찍고 싶다.
황미영 나도 작품을 가리지 않는 편이다.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 출연을 결정할 때도 있다. 부모님이 보시기에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역할이라면 어떤 역이든 다 하려고 한다.
김재화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단원인데 그곳 대표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배역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고. 물론 제작사와 감독님이 결정하시겠지만. (웃음) 어떤 역할이든 나와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거부하기보다 어떤 역이든 소화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스케줄 문제만 아니면 거의 다 하는 편이다. 그런데 다른 의미로 힘든 순간은 있다. 예를 들면 아이를 키우는 부모다 보니 아동 학대와 관련된 역할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한 적 있다.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때보다는 힘들게 연기할 것 같다.
-<중성화>와 <그녀는요>를 보면서 배우의 외적인 모습을 생각해봤다. 다른 작품에서도 비슷한 점을 느꼈는데 김재화 배우는 선한 역이든 악한 역이든 공통적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상대를 뚫어져라 쳐다볼 때 그 눈빛에서 힘이 느껴진다. 황미영 배우는 특히 목소리에서 에너지가 느껴진다.
김재화 같은 맥락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얼굴을 좋아한다. 내가 짝눈인데 어느 날 한쪽 쌍꺼풀만 커지는 것 같아서 눈 크기를 맞춰보려 노력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인위적으로 맞추려 한다고 해서 그 모습이 내 마음에 드는 게 아니더라. 서른 즈음에 <하모니>로 처음 연기자로 데뷔하면서 불 꺼진 극장에 앉아 내 얼굴을 보는데 희한하게도 짜릿함이 느껴졌다. 그때 내가 배우로서 내 얼굴을 좋아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 직업을 내가 몇살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배우로 늙어갈지 기대가 된다.
황미영 나는 목소리 때문에 일상에서 불편함을 종종 겪는다. 예를 들면 전화로 내 신분을 확인시켜야 할 때 상대방이 거의 믿지 않는다. 남자 목소리 같으니까 몇번이고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배우로서는 목소리만으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
-그런 오해로 인해 작품 선택할 때 영향을 받은 적이 있나.
황미영 현재 극단 ‘그린피그’에 13년째 소속되어 무대에 서고 있는데 성별 상관없이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배역을 접하고 있다. 대학생 때 <갈매기>라는 작품을 올렸는데 마침 남자 선배들이 군대를 가게 됐다. 다른 역할로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교수님이 나보고 80대 천식 환자인 ‘쏘린’을 연기해보라고 하셨다. 그런 식으로 남자 역할을 종종 했다. 심지어 관객 중 누구도 내가 여자인지 몰랐다.
-<그녀는요>의 미영이 소개팅 자리에서 나눈 외모나 편견에 대한 이야기는 배우의 평소 생각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감독과 의견을 나누며 대사를 바꾸거나 하진 않았나.
황미영 감독님과 촬영 전에 많은 이야기를 했었고, 내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정리했다. 의견을 던지면 감독님과 수정 작업을 했다. 연출자를 만날 때마다 애드리브를 허락 맡고 한다. 즉흥적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자신감 넘치는 스타일이라 생각하는데 <그녀는요>를 찍기 전에는 사실 그렇지 못했다. 이 작품을 찍으면서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오늘 입고 나온 옷이 영화 촬영 때 입었던 옷이다.
-의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중성화>의 혜수는 중간에 똥이 묻은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헐렁하고 낡은 축구복을 입고 등장한다.
김재화 사실 오늘 그 옷을 입고 인터뷰하려고 가져왔다. (웃음) 지금 차에 있는데 아무래도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급하게 압구정쪽 숍에 가서 원피스 한벌 장만했다.
황미영 인터뷰 전에 우리끼리 영화 속 의상을 입고 인터뷰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회의를 잠깐 했다. 그런데 그냥 깔끔하게 입기로 했다. 예전에 <족구왕> 무대 인사할 때 영화 의상을 그대로 입고 나와 관객 앞에 서니 굉장히 좋아하시더라. 그 이후로 인터뷰할 때나 무대에 설 때 영화 의상을 종종 입는다.
-<중성화>의 혜수를 보면서 감정 상태가 꽉 차 있는 인물을 주로 연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김재화 감독님들이 내게 그런 역할을 주로 맡기신다. 과거에 누군가가 나에게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보고 싶냐고 물었을 때 무표정으로 다 표현이 가능한, 표정 없는 여자를 연기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주로 소리치거나 크게 웃거나 되게 슬프거나 감정 기복이 심한 역할을 많이 맡았다. 배우는 자신의 몸을 매개로 하는 예술을 하는 직업이다 보니 그럴 때마다 정말 에너지가 고갈된다. 찍을 때 힘이 있으려면 평소에 잘 먹어야 한다.
-카메라 앞이나 무대에서 에너지를 제대로 발산하기 위해 평상시 축적하는,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나.
황미영 음주가무를 좋아한다. 노래방 가는 걸 진짜 좋아한다. 한번 노래방에 가면 5시간 동안 계속 서서 부른다. (웃음) 그런데 팬데믹 상황이라 요새는 거의 가지 못한다.
김재화 대화로 푼다.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떨면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현장에서 준비할 때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게 서로 주고받는 에너지의 순환이 좋은 것 같다. 사실 무대에서 공연할 때 관객의 기운을 받는 게 그렇게 좋다. 아이들이 학교 들어가고 생활이 안정되면 1년에 한편씩 꼭 공연하고 싶다.
-같은 직업을 가진 배우들과의 관계에서 얻는 에너지도 있을 것 같다. 황미영 배우는 이상희 배우와 친분이 돈독하기도 하고 김재화 배우는 세 자매가 모두 배우로 활동 중이다.
김재화 어떨 때는 같은 배역 오디션 시간이 앞뒤로 맞물려 잡힐 때도 있었다. <러브픽션>은 혜화와 같은 배역으로 오디션을 봤는데 나는 떨어지고 혜화가 붙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역할로 같은 장면에 나왔다. <상의원>에도 같이 출연했는데 오디션 연습할 때 서로 상대 역할을 해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다른 현장 경험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서로 조언도 할 수 있다. 막냇동생과는 13살 차이가 나는데 우리 둘이 동생이 모르는 생경한 현장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자매간에 서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작품 가지고는 서로 연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준비할 때는 많이 나눈다.
황미영 주변에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많다. 그들에게 더 많은 작품에 출연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기도 하는데 나는 연극 무대에 설 때가 좋다. 돈벌이는 전혀 안된다. 언제까지 돈을 벌지 않고 살 수 있냐며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이상희 배우를 비롯해 내 공연을 항상 찾아주는 친구들은 내가 뭘 하든 응원해준다. 서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내가 하는 일이, 가는 길이 맞다고 얘기해주는 그들이 있어서 힘이 난다.
-무대, 스크린 등 매체를 제한하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기 바란다. 현재 작업 중이거나 정해진 차기작이 있나.
김재화 우정 출연한 <좀비크러시: 헤이리> <괴기맨숀>은 현재 상영 중이고 <숏버스 이별행>이 개봉하면 이어서 <액션히어로> <모가디슈> <싱크홀>이 대기 중이다. 올여름, 나와 함께 6편의 영화를 보자. 개봉의 여왕이 되고 싶다. (웃음) 현재는 <밀수>를 찍고 있다.
황미영 얼마 전에 시작한 <목선>이라는 공연을 춘천공연예술제 무대에 올린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코로나19를 주제로 지원받아 단편영화를 찍었는데 제목이 <마스크 짙게 바르고>다. 내가 지었다. 이번주 촬영을 마무리한다. 올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인 <태어나길 잘했어>에 출연했다. 관객과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
김재화 필모그래피
영화 2021 <숏버스 이별행> <싱크홀> <모가디슈> 개봉예정 <액션히어로> 제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 2020 <담보> 2018 <우상> <도어락> 2017 <소공녀> 2015 <극적인 하룻밤> 2014 <장수상회>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상의원> <거인> <현기증> 2013 <롤러코스터> 2012 <공모자들> <코리아> 2011 <러브픽션> <퀵> 2010 <황해> 2009 <하모니>
드라마 2020 <여신강림> <오 마이 베이비> 2019 <쌉니다 천리마마트> 2018 <복수가 돌아왔다> <나인룸> 2017 <마녀의 법정> <김과장> 2016 <함부로 애틋하게> 2012 <엄마가 뭐길래>
황미영 필모그래피
영화 2021 <숏버스 이별행> 2019 <시호> 2018 <악몽> 2017 <바람 바람 바람> <소공녀> 2016 <로마서 8:37> <굿바이 싱글> 2013 <족구왕> 2012 <1999, 면회>
드라마 2019 <조선로코-녹두전> 2016 <툰드라쇼 시즌2-꽃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