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살 장그래(<미생>의 주인공)와 ‘K장녀’ 그리고 한 마리 fox, MBC <미치지 않고서야>의 한명전자 생활가전사업부에는 이런 삼각형이 존재한다. 삼각관계가 아니다. 셋 중 둘을 어떻게 엮어놓든 주옥같은 장면이 펼쳐진다는 뜻이다. 우선, 22년차 개발자인데 윗선에 밉보이는 바람에 인사팀에 뚝 떨어진 최반석(정재영)은 사회성이 부족한 IT 천재나 휴머니즘의 화신이 아니다. 사내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 동료들과 두루 잘 지내고 업무 관련 소통 능력도 뛰어난 그는 한대 맞으면 최소한 0.8대는 돌려주는 근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심드렁하고 구시렁거리는 연기의 1인자 정재영이 맡아 더욱 현존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 최반석을 얼결에 떠맡은 인사팀장 당자영(문소리)은 산전수전 다 겪은 18년차 직장인이자 아버지와 동생의 생계까지 책임지는 가장이다. 많은 한국 드라마 속 ‘똑똑한 여성’ 캐릭터가 무표정하고 유연성 없는 원칙주의자인 것과 달리 유리절벽에서 살아남아 임원이 되기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당자영의 현란한 사회생활 스킬은 문소리의 연기를 통해 풍부한 입체감을 획득한다. 감정적인 남자들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늘 은은하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그가 치밀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려 눈을 한번 치켜뜨거나 숨을 고를 때마다 웃음이 터지면서도 울컥하는 이유는 이 유능한 여성이 일터에서 느끼는 외로움마저 너무나 생생하게 전해져서다.
그러나 어쩌면 <미치지 않고서야>의 진짜 주인공은 이처럼 서로 다른 욕망과 일해야 할 이유를 가진 인물들로 구성된 회사라는 유기체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복잡하게 얽힌 사내 이해관계 속에서 모든 구성원은 계속, 무사히 일하며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는 가끔 드라마 홈페이지의 한명전자 조직도를 다시 들여다본다. 낯설었던 수십명의 얼굴이 점점 각자의 삶을 가진 ‘사람들’로 보이는 경험이 신기하고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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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법정>
왓챠
<미치지 않고서야>에는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등장한다. 가해자가 조직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일 때 피해자가 원하는 해결책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정도윤 작가는 2017년 <마녀의 법정>을 통해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관점과 방식을 다각도로 보여준 바 있다. 출세욕 강한 검사 마이듬 역을 맡은 정려원의 연기가 매력적이고, 여성가족부 제작지원작이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배우는 오늘도>
넷플릭스, 왓챠
문소리가 뛰어난 배우라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겠지만, 그가 정말로 엄청난 코미디 배우라는 사실은 더 많은 사람이 알 필요가 있다. 문소리가 직접 감독, 각본, 주연을 맡은 <여배우는 오늘도> 속 여배우 문소리는 인생의 무게에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자신의 일을 더 잘하고 싶어 마음이 급하다는 면에서 당자영과 닮았고,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