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의 리듬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전 생애를 낭비한다.’ 내 책상 앞에는 하재연 시인의 <4월 이야기>의 한 구절이 붙어 있다. 이해를 바랄 만큼 내면이 복잡한 편도 아니고, 그저 전 생애를 낭비한다는 대목이 괜히 사무쳐서 붙였다. 시에는 겨울에 만나 한여름에 관해 이야기하다 봄에 헤어지는 이들이 있고, 이제 정말 안녕이라고, 작별의 시기를 알리는 ‘4월의 눈’이 내린다. tvN 드라마 <너는 나의 봄>에도 늦은 봄눈이 내렸다. 강다정(서현진)과 주영도(김동욱).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다른 목련보다 일찍 한겨울에 만개하는 ‘미친 목련’에 관해 이야기하고 ‘미친 봄눈’이 펑펑 내리는 날, 접어뒀던 마음을 펼친다. 이르게 설레는 마음엔 잘못이 없고, 봄눈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미친 짓을 핑계 삼기 좋다.
<너는 나의 봄>은 대사가 많고 대부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말의 합이 맞는 사람끼리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의 리듬으로 쾌감을 만드는 극본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미나 작가는 우선 화법이 다른 이들끼리의 충돌을 빚는다. 호텔 컨시어지 매니저인 다정은 일터를 벗어난 공간에서는 자신을 지키는 방어적인 화법에 상대의 말을 부정하느라 말이 많아지는 타입이고, 아래층 정신과 의사 영도의 침착한 말투는 때로 얄밉다. 남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 위주로 말을 쏟아내는 배우 안가영(남규리)과 만나면 다정도 얼이 나간다. 대화의 밀도도 높은 편인데, 그보다 심리적인 배경으로 공감이 간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오버페이스구나 싶은 상황들이 있다. 다정을 보면 상대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말 한마디 한마디 토를 달던 어떤 때가 기억나고, 영도가 말할 때는 괜찮지 않은 상태인데도 담담하게 말하는 것 외에는 견딜 방법을 모르던 시절도 떠오른다. 무리해본 사람끼리 서로의 리듬을 이해하고, 말 뒤편의 마음에 닿는 순간들이 있어서 TV 속에 내리는 봄눈에 같이 설렜다. 밖은 열대야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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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미, 힐미>
웨이브
채준이라는 이름으로 다정에게 다가와 최정민이라는 본명으로 사라지고 얼굴이 똑같은 이안 체이스로 다시 나타난 복잡한 인물을 맡은 배우 윤박의 활약을 보며 <킬미, 힐미>에서 7개의 다중인격을 연기한 지성을 떠올렸다. 두 드라마는 정신과 의사가 주연이고, 유년기의 학대를 다루며, 이름을 빼앗겼거나 이름을 갖지 못한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풍선껌>
티빙
온갖 사소한 말의 의미를 되짚느라 전 생애를 낭비하는 사람이라면 이미나 작가의 전작 <풍선껌>과도 결이 맞을 테다. “전화할게. 누군가는 그 말을 곧 전화기를 들어 통화를 하겠다는 약속으로 해석했고, 누군가는 그 말을 지금은 일단 대화를 그만하고 싶다는 인사말로 사용했다.” 같은 말을 다르게 받아들이며 끝내 헤어지는 연인들에 관한 라디오 PD 김행아(정려원)의 내레이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