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에서 정해인은 언제나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상대를 배려하느라 머뭇거리다가도 일순간 사랑 앞에 용감해지는 인물. 후회가 남지 않도록 사랑을 퍼주던 멜로 장르 속 정해인은 신기하게도 격정적이기보다 따스하게 기억된다. 그의 순한 눈빛과 미소,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에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묘한 힘이 스며 있다. 탈영병들을 잡는 군무 이탈 체포조 D.P.가 되어 군복을 입었어도(특색 없는 사복을 입고 등장하는 장면이 더 많지만) 정해인이 가진 특질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정해인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에서 D.P. 조장 한호열(구교환)과 짝을 이뤄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이병 안준호를 연기한다. 군대 내 괴롭힘을 목격하기도 하고 경험하기도 하는 안준호는 뜨겁게 치미는 복잡한 감정을 삼키며 조금씩 단단해져간다. 개가 되지 않고 인간이 되려는 안준호의 마음은 정해인이 가진 따스한 기운과 뒤섞여 냉소를 밀어낸다. 안준호가 보여주는 최선의 안간힘에 정해인은 최선을 다해 반응한다. <D.P.>에 대한 정해인의 애정은 이등병 안준호가 일병이 되고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는 모습까지 보고 싶다는 바람에서도 비쳤다. 화상 인터뷰가 처음이라며 모니터 너머로 히죽 웃어 보이곤 다정하게 마지막 인사까지 건네는 정해인과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넷플릭스 유저인가.
=온 가족이 애청하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참여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번에 모든 회차가 공개되고, 매일 홈페이지에 인기 작품 순위가 뜨는 것도 새로운 경험일 텐데.
=드라마 첫 방송, 영화 개봉 때와는 또 다른 경험이다. 처음 겪어보는 설렘이다. 나 역시 완성된 결과물이 궁금하다. 작품이 공개되는 8월 27일에 가족과 함께 시청할 예정이다.
-<D.P.>는 어떻게 만난 작품인가.
=먼저 제의가 왔고, 대본도 흥미로웠다. 군대 이야기를 다뤄 크게 이슈가 된 작품이 <용서받지 못한 자>(2005) 이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가장 큰 이유는 함께하는 사람들이었다. 한준희 감독님과 첫 만남에서 두 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권위적이지 않은 분이었고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해주는 게 느껴졌다. 대본 보면서도 빨리 다른 배우들을 만나고 싶었고, 호흡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준희 감독은 물론 구교환 배우와도 첫 작업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기본적 호감이 있었나.
=호감도 있었고 호기심도 있었다. 함께할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은 항상 있는 것 같다. 어느 배우를 만나든. 상대에게 호기심을 갖고 알아가는 작업이 재밌다.
-탈영병을 쫓는 군인 안준호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는지.
=강하게 들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간 군인이 군인을 잡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되는데, 탈영병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다. 그들은 고작해야 20살, 21살, 많아봤자 20대 후반인 불완전한 청춘들이다. 내게는 이들을 잡으러 가는 게 꼭 이들을 지키러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형사가 범인을 잡으러 다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흔들리는 청춘을 붙잡으러 가는 또 다른 청춘의 이야기로 다가와 매력적이었다.
-방황하는 20대를 지나왔기 때문에 그 시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안준호를 연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내가 지금 그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면, 20대 초반의 남자였다면, 준호를 연기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거리두기하면서 그때를 돌아봐서인지 더 면밀히 인물과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군 생활 때 기억, 훈련소에서의 기억, 이등병 때 기억도 작품에 도움이 되었다. 한번은 촬영 끝나고 집에서 군대 시절 사진과 편지들을 꺼내봤다. 부모님께 받은 편지, 부모님께 보낸 편지들을 다시 보니 부끄러웠는데, 그럼에도 그땐 몰랐던 것들이 보이더라.
-부끄럽지만 소중한 추억이겠다.
=맞다. 부끄럽지만 소중한 추억!
-안준호와 정해인을 비교하면 어떤 점이 닮았고 어떤 점이 다른가.
=둘 다 생각이 많다. 그리고 동물적이다. 나도 촉이 좋은 편인데,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준호의 모습을 보면 역시 촉이 좋다. 음, 얼마 전에 (구)교환 형이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 한 말인데 그걸 따라해보자면, 준호와 나는 발 사이즈도 비슷하고 목소리도 비슷하고 외모가 비슷하다. (웃음)
-그렇다면 준호와의 차이점은.
=그래도 내가 안준호보다는 조금 더 유머러스하지 않을까?
-초반엔 대사에서 관등 성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등병이라 느리게 또박또박 이름을 대는데, 박자와 톤은 어떻게 만들었나.
=경험에서 나왔다. 실제로 이등병은 관등 성명을 또박또박 해야 한다. 빨리 하면 혼난다. 짬이 차고 상병이나 병장쯤 되면 관등 성명도 빨라진다. 고증 아닌 고증이라 볼 수 있다.
-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하던 21살 때 입대했다.
=대학 1학년 마치고 바로 군대에 갔다. 과 동기들이 다 군대를 가니 나 역시 휴학계를 냈다. 단순했다. 친구들 가니까 나도 가야겠네. 그러면 비슷한 시기에 복학해서 같이 수업 듣고 같이 작업할 수 있겠네. 그런 생각으로 일찍 갔다. 지금 돌아보면 훈련소 때 기억이 많이 남는다. 힘들게 행군 마치고 돌아오면 무언가 대단한 걸 해낸 것 같은 성취감이 들었고 이상한 전우애도 처음 느껴봤다. 군에서 보직은 운전병이었다.
-안준호의 얼굴이 열 마디 말을 대신하는 장면들이 있다. 따뜻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대체로 무표정한 얼굴로 안준호의 마음을 그린다.
=무언가 표현할 때 과하지 않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표정을 짓기보다 가만히 쳐다보는. 그러면서도 어떻게 준호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카메라 앞에선 가만히 서 있거나 그냥 걷는 것도 어려울 때가 있다. 뭔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더 어렵다.
-그동안 여러 편의 멜로 작품에서 정적인 분위기, 정적인 호흡의 연기를 안정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그런데 늘 어렵다. 항상 새롭고.
-머리도 잘라야 했다. 멋을 내려야 낼 수 없는 이등병의 머리로.
=정직하게 군인처럼 보이는 게 중요한 포인트였다. 짧은 옆머리를 다운펌하면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은 다 눈치챈다. 머리가 가짜라는 걸. 거기서부터 불신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에 애초에 군인이 돼야만 했다. 훈련소에 가는 모든 남자들의 모습이어야 했다. 피부톤도 어둡게 하려고 태닝을 했다. 메이크업도 하지 않았다. 워낙 액션이 많아서,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메이크업을 하면 땀 흘릴 때 티가 난다. 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 아예 초반부터 맨얼굴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감독님께 말했다.
-유일하게 옷을 갖춰 입는 경우는 헌병복을 입을 때고, 대부분은 아무 특징 없는 사복을 입는다.
=아마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입었던 옷들 중 가장 후줄근하지 않을까 싶다. 준호가 입는 옷은 이전의 D.P.들이 입었던 것을 물려받은 거라 깨끗하지도 않고 많이 해졌다. 또 탈영병을 잡으러 가는데 눈에 띄면 안되기 때문에 옷이 튀어서도 안됐다. 최대한 모노톤에 무채색의 옷을 입었다.
-준호는 복싱을 한 인물이다. 촬영 전 3개월가량 복싱을 배웠다고.
=복싱은 이번에 처음 배웠는데 이렇게 힘든 운동인 줄 몰랐다. 다이어트할 때 최고의 운동인 것 같다. 한여름에 복싱 배우느라 땀을 더 많이 흘린 것도 있지만, 두세 시간 뛰고 나면 정말 녹초가 된다. 3분씩 뛰는 인터벌 트레이닝을 하면서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목에서 피맛이 날 정도였다.
-고된 훈련의 결과는 부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3화 ‘그 여자’ 편에서 멋지게 드러난다.
=액션 신 찍을 때 긴장을 많이 했다. (탈영병 정현민을 연기한) 이준영 배우와도 복싱 연습을 많이 했다. 촬영 땐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어 조심할 수밖에 없었고, 조심하느라 긴장하면 몸이 굳고, 잔부상들이 생기니 또 긴장하게 되고. 쉽지가 않더라. 최대한 다치지 말자, 그게 큰 목표였다.
-구교환과의 콤비 플레이를 보는 재미도 컸다. 캐릭터뿐 아니라 두 배우가 지금껏 보여준 연기 스타일도 달라 어떤 호흡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교환 형과 친해져야지, 가까워져야지 하고 특별히 의식하진 않았다. 형이 워낙 위트 있고 유머러스한 사람이라 좋았다. 유머의 기저에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깔려 있다. 현장에선 교환 형 때문에 웃음을 참기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다. 준호는 진지하게 연기해야 하는 장면이 많은데, 형의 연기 때문에 웃으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와서 엔지도 여러 번 났다. 웃음이 터지는 경우는 형이 리허설 때 하지 않았던 애드리브를 슛 들어가서 할 때였는데, 준호는 애드리브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계급이 아니다. “이병 안준호.” “네, 알겠습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대답이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웃음) 교환 형의 애드리브를 받아서 리액션을 해야 하는데 막상 할 수 있는 리액션이 별로 없어 곤란했다. 계급이 높았다면 편하게 웃기라도 할 텐데 늘 긴장하고 얼어 있어야 하는 이등병이라 리액션이 어려웠다.
-구교환 배우와 친해진 계기가 있나.
=한준희 감독님도, 나도, 교환 형도 축구 게임을 좋아해서 같이 게임을 한 적 있다. 그때 좀 가까워진 것 같고, 부산에서 한달 가까이 머물면서 촬영했을 때도 너무 좋았다. 지금까지 집 떠나서 한곳에 오래 머물며 촬영을 한 적이 없었다. 이번엔 촬영 끝나면 함께 밥 먹고, 서로 얼굴 볼 시간도 길고. 한달간 부산 로케이션하면서 허물없이 지내게 된 것 같다.
-<D.P.>의 준호도 그렇고, 고집스럽게 상대에 몰두하는 마음을 자주 표현해왔다. 정해인이란 사람도 그런 편인가.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사람을 만나면 오래 보려 하고, 한번 친해지면 정말 오래간다. 그런데 연기하면서 성격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어릴 적 친구들은 내가 연기를 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며 신기해한다. 연기하면서 좀 외향적으로 변했다고 해야 하나? 원래는 굉장히 내성적이었다.
-지금도 외향적으로 보이진 않는데.
=많이 발전한 거다. (웃음)
-<D.P.> 마지막 촬영날의 기분이 기억나나.
=항상 비슷한 것 같다. 시원섭섭함. 끝나고 나면 촬영 현장에 대한 감사함과 소중함이 커지면서 동시에 ‘할 때 잘하지’라는 생각도 든다. 열심히 했지만 더 열심히 할걸 하는 후회가 항상 남는다. 크랭크업하면 정말 모든 게 끝이니까.
-<D.P.> 이후 숏필름 프로젝트 <언프레임드> 중 이제훈 배우가 연출한 단편 <블루 해피니스>에 출연했다. <시동>을 같이한 박정민, <D.P.>를 같이한 손석구도 감독으로 <언프레임드>에 참여했는데, 함께 연기하던 배우들이 연출하는 모습을 보니 어땠나.
=드라마 <설강화> 촬영을 끝내고 제훈 형의 단편을 찍었다. 제훈 형은 꼭 한번 같이 연기해보고 싶은 배우 중 한명이다. 이번엔 감독과 배우로 만났지만 다음엔 배우 대 배우로도 만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배우들이 연기뿐 아니라 연출하는 일이 참 좋아 보인다. 언젠가 나도 연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