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기록한다. 어쩌면 그건 지나간 걸 다시 쓰는 게 아니라 매일을 충실히 살아온 흔적들을 모으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정훈이만화가 그렇다. 매주 독자들을 웃기고 시원하게 속을 뚫어줬던 만화들이 모여 이제는 역사가 되었다. 정훈이 작가를 만나 이젠 역사가 된 순간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해 12월 연재를 마치고 난 뒤 전시 준비를 시작했나.
=<씨네21>과 마지막 인터뷰 때도 말했지만 연재가 끝나고 1년 정도는 쉬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전시 제안을 해왔고 나도 지나온 시간을 정돈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준비를 시작했다. 6개월 정도 준비한 것 같다. 그림도 새로 그렸고, 예전 연재본 중에 그대로 쓸 수 없는 것들이 많아 손보기도 했다. 사실 그렇게 시간이 걸릴 일은 아니었는데 애니메이션의 컨셉이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아 조금 애를 먹었다.
-지나온 길을 이렇게 정리해서 본다는 게 감회가 남다를 텐데.
=내겐 매주 마감이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25년이 흘렀다니 기분이 묘하다. <씨네21> 연재는 잡지 만화니까 이걸 큰 전시 형태로 다시 꺼내 보는 게 생경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원래 지나간 걸 잘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물건을 보관하거나 쌓아두는 편도 아니고. 그런데 이렇게 하나씩 꺼내 다시 정리하다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새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 전시 작품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겠다.
=주간 연재라는 게 기본적으로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몇개를 정한다는 게 어려웠다. 일단 한국영상자료원쪽에서 기본적인 컨셉을 정해주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다시 쭉 살펴보면서 상중하로 분류했다. 제일 중요한 기준은 댓글 반응이랄까, 독자들의 피드백이 와닿는 작품들로 골랐다. 풍자의 정도가 강할수록 시간이 지나면 재미가 떨어질 수 있는데 간혹 독자에 의해 다시금 읽힐 수 있는 작품들이 있는 것 같다. 작품의 생명이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싶기도 했다.
-지면으로만 접하다가 ‘패러디 클라쓰’의 애니메이션을 보니 새롭다.
=이번 전시를 하면서 배우는 것들이 있다. 단지 지나간 길을 되돌아보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분이다. 애니메이션 자체는 시간이 오래 안 걸렸는데 컨셉을 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전시된 결과물을 보니 이렇게 읽어나가는 방식도 있겠다 싶어서 나 역시 재미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 섹션을 위해 그림을 다시 그렸다고.
=부분적으로 예전에 그렸던 걸 다시 리터치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새로 그렸다. 25년 동안 한국영화사에 수많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중 몇개만 고를 수 있을까 걱정이 됐지만 직관적인 표현이 가능한 순간들, 내게 더 와닿은 순간들로 뽑아보았다. 1996년 대종상영화제 시상식 때 일어난 ‘애니깽 사태’는 젊은 사람들은 거의 모르지 않을까. 그런 걸 소개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내년까지 전시가 이어지니 1년간은 정훈이만화를 떠나보내는 기간이라고 해도 좋겠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만화를 더 그리지 않을까 싶다. 기간만 정하고 구체적인 방향과 방식은 고민 중이다.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잘하던 것을 더 다듬고 싶기도 하다. 어느 쪽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꾸준히 해나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