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석에서 ‘000 작가의 책이 잘 팔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도저히 그의 작품이 SF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라는 말을 들었다. 또 다른 어딘가에서는 ‘000의 작품은 정말 좋은데 너무 가르치려드는 것 같아 불편하다’라는 말도 들었다. 자주 듣는 얘기다. 요즘 SF소설이 유행이라기에 읽어봤더니 어딘가 예전 SF와는 느낌도 많이 다르고, 별로 과학적이지도 않고, 메시지도 너무 정치적이더라는 말들. 이런 의견은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SF는 정치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예전 SF’들을 살펴볼까? 우선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대표작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은 정치적이다. 혁명 이야기니까. 이 작품은 아무리 봐도 러시아 붉은 혁명이 모티브다. 아서 C. 클라크의 대표작 <유년기의 끝> 역시 냉전 시대에 대한 짙은 거부감과 공산주의로부터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도 그리 다르지 않다.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은 대놓고 베트남전을 비판하는 작품이고,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은 본인이 의도했건 안 했건 여성주의 SF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뉴로맨서>를 비롯한 사이버펑크 소설들에는 펑크라는 이름답게 68 이후의 반자본적 저항 정신이 가득하다. 근 1년간 해외 SF 작품 중 단연 독보적인 판매량 1위를 자랑하는 작품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인데, 이 작품에 정치적 메시지가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
어떤 이들은 이런 비판을 하기도 한다. ‘서양의 SF 거장들은 인류의 진보와 거대한 정신적 도약을 논해왔는데, 요즘 우리 SF는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나 하고 있지 않나요?’ 자신들이 SF에 바라는 테마는 이런 게 아니라고 불평한다. 저런, SF 작가들이 당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건 뒤처진 이슈니까. 지금 시대에 이야기할 문제가 더는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오해와 달리, 안타깝게도 SF는 인류의 거대한 미래를 논하는 장르가 아니다. SF 작가 역시 미래학의 권위자가 아니고. 그들은 그저 스토리를 끄적이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SF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최전선일 따름이다.
과거 SF 작가들이 거대한 서사를 주로 다룬 이유는 당시엔 실제로 그런 거대한 문제들이 그들 삶의 가장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인지 공산주의인지, 참전인지 반전인지, 물질인지 정신인지, 백인 남성인지 그외의 부류인지 같은 굵고 심플한 대립항들이 당시의 정치적 최전선이었고, 이러한 정치적 메시지들은 고스란히 당시의 SF에 담겼다. 그 시절 작품들이 우리에게 정치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냥 옛날에 쓰여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SF 작가 역시 인간인지라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강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1950~60년대 SF소설들이 지나치게 군대 냄새가 나는 이유는 그 작품들을 쓴 작가들이 우익이거나 군국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냥 2차대전과 베트남전을 겪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신체강탈자 장르가 태동한 과정에는 냉전 시기 스파이에 대한 공포가 한몫했다. 우주 이야기가 주류가 된 배경에는 분명 미소간 우주 경쟁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절 인간들이 인류의 정신적 진보니 거대한 정신적 존재와의 융합이니 하는 주제에 집착하게 된 이유도 히피 운동과 LSD 같은 뉴웨이브의 영향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그런 이야기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냉전은 끝났고 우리 삶을 위협하는 문제들은 잘게 쪼개어졌다. 복잡해졌고, 어려워졌고, 보다 교묘해졌으며,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 시절 미국인들은 러시아 핵무기와 연결된 데드맨 스위치와 싸워야 했지만, 지금 우리는 플랫폼 노동자를 핍박하는 AI 알고리즘과 싸운다. 냉전 시대의 프로파간다 대신 지구가 평평하다는 가짜뉴스와 싸운다.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고 코로나19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MAGA!”를 외치며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백인들이나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며 광화문에 모이는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배리어 프리와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싸워야 한다. 당신은 바로 그런 싸움들에 대한 SF를 읽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만의 흐름도 아니다. 3년 연속 휴고상을 수상한 N. 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시리즈는 혐오와 차별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석권한 켄리우의 단편 <종이 동물원>에는 중국계 미국인인 그의 개인적 경험이 강하게 묻어난다. 존 스칼지의 최근작 <무너지는 제국>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기후 위기에 대한 노골적인 은유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도 <블랙 위도우>나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같은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디즈니는 <인어공주>의 피부색을 바꾼다고 하고, <미나리>와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주목받는 걸 보면 솔직히 이게 SF만의 현상도 아닌 것 같다. 섬세하고 예민한 창작자라면 매체 불문 어디서나 시대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지금의 SF가 과거의 SF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건 더이상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작품들이 주목받고 사랑받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 작품들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정세랑, 김초엽, 천선란, 심너울 같은 작가들의 책이 잘 팔리는 이유 역시 무슨 순문학과 타협했거나 SF 요소를 억제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왜 예전에 하던 대로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가끔은 가엾다. 달라져버린 세상의 변화에 따르지 못하는 발버둥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서 따라오시길. 물론 따라오기 버겁다면 마음 편히 내려놓으셔도 된다. 요즘 친구들은 왜 이런 걸 쓰냐 욕하는 대신 과거의 천재들이 탄생시킨 주옥같은 명작 사이에 파묻혀 남은 여생을 즐기셔도 좋다. 혹은 여전히 낡고 고리타분한 SF 소재들에 천착하는 구닥다리 SF 작가 이경희의 작품을 한번 읽어보셔도 좋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