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 제임스 본드인 다니엘 크레이그와 작별할 시간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다섯 번째 007 시리즈 출연작이자 마지막 여정이 될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그간 철저하게 숨겨왔던 제임스 본드의 미션이 무엇일까. 시리즈의 전작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
김현수 기자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가 드디어 공개됐다. 지난 시리즈와 스토리가 이어지므로 그가 주연한 4편의 본드 영화 속 사랑과 증오, 복수로 가득 찬 사적, 공적 인물 관계를 복기하고 봐야 한다. 이번 영화는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기 때문에 기획 단계에서 이미 화려하고 멋진 퇴장을 준비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작비도 3억 달러나 쏟아붓고 러닝타임도 시리즈 최장 길이인 163분에 달한다. 볼거리가 많다. 제임스 본드의 미션에서 기대하는 모든 장면이 한 편의 영화에 총망라되어 있다. 시리즈 최초로 아이맥스로 촬영한 영화 초반 액션 시퀀스는 압권이다. 단점도 있다. 163분 내내 액션을 보여줄 수 없고 스토리상으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정리해야 하므로 액션과 액션 사이의 전개가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007 시리즈’를 오랫동안 좋아했던 팬의 입장이라면 긴 러닝타임이 고마울 것이고 영화의 엔딩에 마음이 울컥해질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의 역대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캐릭터와 플롯을 차용한 지점이 많다. 그의 첫 영화 <007 카지노 로얄>은 원작자 이언 플레밍이 쓴 첫 번째 소설 <카지노 로얄>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었다. 그의 마지막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고 또 오마주를 바치는 과거의 시리즈 작품은, 지난 50년 넘게 영화화된 시리즈의 시작점이었던 첫 번째 영화 <007 살인번호>와 제임스 본드에게 사랑을 허했던 에피소드를 다룬 <007 여왕 폐하 대작전> 두 편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스펙터’가 처음 언급됐던 <007 살인번호>의 악당 닥터 노의 캐릭터를 이번 영화의 악당 사핀(라미 말렉)에 투영했고, 제임스 본드와 마들렌(레아 세이두)의 마지막 사랑은 <007 여왕 폐하 대작전>에서 묘사했던 본드(조지 라젠비)와 트레이시(다이애나 리그)의 비극적 관계와 오버랩된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에 삽입된 루이 암스트롱의 곡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는 <007 여왕 폐하 대작전>에도 쓰였으며 “시간은 많으니까(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라는 대사는 조지 라젠비가 연기했던 본드의 마지막 대사이며 이번 영화에서 다니엘 크레이그가 직접 똑같이 대사를 인용한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보며 떠오르는 지난 시리즈를 한 편 더 언급하자면, 4대 제임스 본드 티머시 돌턴의 출연작이자 본드의 절친 CIA 요원 펠릭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007 살인면허>다. 가장 혼란스러운 일을 겪게 된 본드의 인간적인 면묘를 보여주는 영화들이라서 <007 노 타임 투 다이>와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또한 이번 영화에는 티모시 돌턴의 제임스 본드가 몰았던 애스턴 마틴 V8이 상징적으로 등장한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미션은 성공적이다. 그의 뒤를 이어줄 말로리(랄프 파인즈)와 노미(라샤나 린치) 두 캐릭터 묘사가 마음에 썩 들지는 않지만 어쨌든 후련하게 떠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박수받아야 할 사람이 한 사람 있다. 바로 제작자 바바라 브로콜리다. 그녀는 아버지 커비 브로콜리의 뒤를 이어서 가문의 과업으로 <007 시리즈>를 계속해서 만들고 있는데 다니엘 크레이그의 시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할리우드를 휩쓸고 지나간 미투 운동 이후 제임스 본드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뭘 담을지 고민된다면, 전부 찍어서 다 넣어라."라는 아버지 커비 브로콜리의 조언을 잘 이어받은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
배동미 기자
다시 오프닝을 떠올려본다. 매들린(레아 세이두)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본드(대니엘 크레이그)가 기차 앞에서 매들린에게 이별을 고하는 신말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볼을 맞대는 다정한 몸짓으로 포옹한 본드는 매정한 표정을 한 채 매들린을 기차에 태운다. 본드는 기차에 오르지 않는다. 대신 기차를 등지고 그 자리에 선다. 본드는 매들린에게, 어쩌면 관객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기차가 출발하자 매들린은 냉담하게 등을 돌린 본드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기차 안에서 좌석 사이를 빠르게 걷는데, 매들린의 시점 숏으로 창문들을 통해 본드의 뒷모습만 보인다. 그는 정말 되돌아볼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네모난 창문은 스크린처럼 보이고, 15년 동안 관객을 매료시켰던 비밀요원은 마치 영화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 어쩌면 역대 본드 중 가장 많이 두드려 맞고, 많은 피를 흘렸으며, 직접 땀 흘려서 뜀박질했던, 그래서 가장 촉각적이었던 6대 본드는 볼을 맞대는 인사를 끝으로 영화 속으로 그렇게 사라진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오프닝은 본드의 앞으로 펼쳐질 그의 운명을 예감하게 하면서도 그의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대 본드들과 달리 그는 임무에 뛰어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육탄전을 벌이는 요원이었으며,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인간이었으며, 자주 과거를 돌아보는 불완전한 사람이었으나 중요한 순간엔 총을 던져버리고 과거를 놓아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뒷모습으로 남았다.
6대 본드, 대니엘 크레이그를 위한 거대한 엔딩 시퀀스인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9월29일 국내 개봉했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대니 보일에서 캐리 후쿠나가로 감독이 교체되는 사건을 겪었으며, 각본가로 피비 월러 브릿지가 합류하는 등 영화 내적으로 큰 변화들을 겪었다. 가장 큰 변수는 역시나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2020년 4월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3번의 개봉 연기 끝에 약 1년6개월을 기다려 극장 개봉했다. 지난 9월28일 런던에서 열린 영화의 프리미어 행사에 영국 왕실이 총동원돼 영화를 안내하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알만하다. 언제나 자신의 몫보다 더 큰 임무를 짊어지는 제임스 본드처럼,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한편의 영화 그 이상이다. 코로나19로 위기에 처한 세계 영화계의 활력을 불어넣는 구원자 역할까지 해내길 바라는 은근한 부추김을 받고 있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시리즈 특유의 활력, 재치, 웃음, 액션을 모두 보여주는 훌륭한 영화다. <007 스펙터>에서 매들린이 본드에게 들려준 섬뜩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하며 전편을 보지 않은 관객을 맞은 작품은 은퇴한 본드와 매들린 커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 마테라 지역에 머무는 중인데, 본드 홀로 아크로폴리스에 묻힌 베스퍼(에바 그린)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살해위협을 받는다. 언제나 그렇듯 갑자기 시작된 알 수 없는 적들과의 싸움에서 본드는 훌륭한 액션을 선보이지만, 본드가 입은 상처는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었다. 매들린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본드는 베스퍼 사건으로 그랬던 것처럼 곁은 내줬다가 차가워지기를 반복한다. 겉으로는 단단하지만 내적으론 예민하고 상처를 잘 입는 <007 카지노 로얄> 속 본드 그대로인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주요 줄거리는 매들린의 과거와 얽힌 악당 사핀(라미 말렉)이 벌이는 나노봇 테러를 막는 것을 향해 달려간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출연한 <007 카지노 로얄> <007 퀀텀 오브 솔러스> <007 스카이폴> <007 스펙터>를 모두 본 관객이라면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볼 때 더 큰 재미를 느낄 것이 분명하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 시작한 펠릭스(제프리 라이트)와의 우정과 <007 스펙터>에서 그려진 블로펠드(크리스토퍼 발츠)와의 악연은 이번 편에서도 이어진다. 본드 월드에 초대받은 새로운 캐릭터들이 주는 기쁨도 확실하다. 3주 훈련을 마치고 쿠바 작전에 투입된 팔로마(아나 디 아르마스), 이제 2년차인데도 불구하고 007의 번호를 물려받은 노미(라샤나 린치) 등 새로운 세대의 출연도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