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통유리창이 시원스러운 커피숍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다. 오후 1시20분. 휴대폰 액정의 시계가 남자를 제외한 세상 모두에게 무의미한 시각을 새기는 순간, 멀리서 지축이 울리고 걸어다니는 암흑처럼 생긴 괴물들이 창을 깨고 돌진해온다. 외계인의 침입? 그러나 세 괴물은 오직 한명만을 좇아 보란 듯이 백주 대로에서 사냥한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인물의 죽음을 다짜고짜 목도하게 만들며 어두운 입구를 여는 넷플릭스 6부작 <지옥>(11월 19일 넷플릭스 공개)은 연상호 감독과 최규석 작가가 지은 동명 웹툰을 시리즈로 각색한 스릴러다.
지난 9월 토론토국제영화제의 프라임타임 섹션을 통해 3부까지 공개한 <지옥>은 “죄악의 만연에 환멸을 느낀 신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건 기대를 접고 공개 처형을 통한 공포정치를 시작한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지금까지 좀비와 염동력의 근거에 무심했듯, 연상호 감독은 <지옥>에서 신이 정의로운지 묻지 않는다. 대신 신의 뜻을 해석하고 전파하는 사도를 자임하는 자,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의 인권을 지키려는 자, 신이건 인간이건 모든 타살은 불의라고 믿는 한줌의 사람들이 투쟁을 시작한다. 직접 연출하는 첫 시리즈물이지만, 호러 장르 관습과 사실적인 폭력 묘사, 차갑고 예리한 한국 사회 관찰의 결합이라는 연상호식 레시피는 여전하다.
생각해봤자 답이 없는 초월적 문제로 갑론을박하느니 현재 우리의 상태와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을 한정한다는 연상호 감독의 인생관은 창작에도 적용된다. 시나리오를 넘긴 작품의 연출에는 관심을 끄고, 직접 연출하는 작품의 공동 작업자- 만화가, 배우, 스탭- 가 텍스트에 일으키는 변화를 대환영하며, 나머지 산업과 관련된 일은 당연히 전문가가 알아서 하겠거니 믿는다. 연상호는 21세기 엔터테인먼트의 대세인 유니버스 구축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감독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주의와 오리지널리티도 연상호에게는 부차적 문제다. 끝없이 꼬리를 무는 만화와 B급영화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성장한 작가답게 연상호는 <서울역>에서 <반도>로 이어지는 세계와 <방법>의 우주에, 팬과 다른 창작자들이 들어와 시끌시끌 북적이는 광경을 스스로 서브 컬처의 열렬한 소비자였던 20대 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기다린다.
*‘김혜리의 콘택트’에서는 <씨네21> 김혜리 편집위원이 만난 대중문화예술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영상을 기반으로 한 이 인터뷰는 앞으로 한달에 한번 <씨네21> 공식 유튜브 채널과 지면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연상호 감독과의 인터뷰는 10월 1일 <씨네21>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온라인으로 참석해 프라임타임 섹션에서 공개된 넷플릭스 6부작 <지옥>의 첫 3부를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천사가 찾아와 당신이 몇날 몇시에 죽는다고 고지하고 그 시각에 괴물 형상의 세 사자가 나타나 지옥을 미리 경험하는 듯한 참혹한 방법으로 그 사람을 죽인다. 이 처형을 극중 신의 뜻을 알린다고 주장하는 새진리회에서는 ‘시연’(試演)이라 부른다. 1부의 오프닝이 예고편에도 나오는 도시 커피숍에서 벌어지는 시연인데 그 희생자가 <반도>에서 김 이병 역을 했던 김규백 배우다. 연달아 김규백 배우에게 너무하는 거 아닌가. (웃음)
=오프닝에만 나오는 캐릭터라 미안한 마음에 잘 아는 김규백 배우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고생을 해서 너무 미안했다. 사전 공개된 영상도 김규백 배우 위주여서 많은 전화를 받고 있다고 한다. 오프닝 신은 길기도 하지만 완전히 열린 공간으로 설정돼 공간으로서는 가장 큰 공이 들었다. 커피숍에서 시작해 거리로 이어지는 시퀀스인데 로케이션, 세트, 오픈 세트를 이어 붙여 만들어졌다.
-<스파이더맨2>의 닥터 옥토퍼스 습격 장면처럼 통유리창 바깥에서 뭔가 유리를 깨고 안으로 들어와서 희생자를 잡아끌고 실외 공간까지 나아가는 동선이다.
=워낙 특수효과와 파괴가 많다보니 한 공간에서 찍기 어려웠다. 실제 거리도 한두 블록의 도로를 완전히 통제하고 찍었다.
-<지옥>은 신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기대를 접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 역을 하는 종교도 건너뛰어 직접적으로 공포정치를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상상에 기초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씨앗은 원작의 공동 저자 최규석 만화가와 브레인스토밍에서 나왔나 아니면 단편애니메이션 <지옥: 두개의 삶>(2004) 때부터 맹아가 있었나.
=<지옥: 두개의 삶>부터 기본적 설정은 있었다. 지옥은 실재하는데 ‘시연’을 행하는 존재가 누구고 어떤 의도인가의 문제는 모호하다. 이를 장편 시리즈로 구체화해보려는 시도가 <지옥>이었다. 최규석 작가와는 20대 동안 매일 통화하고 자주 보는 사이였는데, 나이 먹고 바빠지니 1년에 한번 볼까 말까 했다. <염력>을 끝낸 다음 오랜만에 만나서 맥주 한잔했는데 작업을 같이하면 자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매우 건설적인 해결책이다. (웃음)
=그러다 단편 <지옥>을 장편으로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기획 핑계로 자주 보기 시작했다.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가면 근처에 커다란 만화카페가 있다. 손님은 별로 없고 심지어 지금은 없어졌는데 거기 회의실이라 불리는 방도 있어 커피도 마시고 만화책도 볼 수 있었다. 스토리를 짜다가 이야기가 막히면 라면도 시켜먹고. 그렇게 한량처럼 몇달을 보내다 대본을 썼다.
-<지옥>을 보고 알베르 카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이라는 글을 다시 찾아봤다. 당시 카뮈가 사형제도가 무용하다고 주장한 큰 이유 중 하나가, 사형제도 옹호자들은 사형이 대중에게 두려움을 일으켜 범죄 발생을 막는 본보기 역할을 한다고 말하지만 현대의 사형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외과수술처럼 집행되니 무용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지옥>의 신은 마치 “그렇다면 공개 처형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자”라고 대응하는 듯하다.
=(<지옥>의 시연을) 일종의 현상으로 보는데, 더 중요한 것은 그 현상에 의미를 덧씌우는 인간의 행위였다. 대사도 있지만 사람은 의미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니까. 소수의 희생이 있더라도 평균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쪽과 그렇게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이야기다. 정답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6부작을 다 보면 희미하게나마 결론 비슷한 곳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원작도 읽지 않고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지옥>을 보기 시작한 시청자는 처음에는 시연이 인간의 조작, 어떤 악당이 만든 홀로그램은 아닐까 의심할 것이다. 그 의심이 기각된 다음에는 이러는 신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묻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보통일 텐데, <지옥>은 불가지 영역은 그대로 두고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행태를 이야기의 본체로 삼는다. <부산역>을 비롯한 좀비 세계관의 작품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연상호 감독 작품에서 서사의 본론은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라 그걸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떻게 벌거벗겨지느냐 같다.
=마이클 조던 다큐멘터리를 보면 자기가 노력해도 알 수 없는 것엔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 초자연적인 사태나 예측 불가한 불행에 대해 사람들은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알려는 욕망을 이용해 득을 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에 집착하기보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지옥>은 전작과 달리 어쨌든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적 관점의 반응도 각오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제에서 공개되지 않은 4부부터 신의 의도를 엄청나게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박정민, 원진아 배우가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그러면서 매우 단순하고 명확한 이야기가 된다. 인간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신이 거기 있건 없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번져나가는 것 같다. 3부까지 제일 중요한 인물은 신의 의도를 설명하려는 새진리회의 정진수 의장이다. <사이비>의 목사 캐릭터도 그랬지만 정진수는 유순해 보이지만 어떤 방에 들어가면 공기를 싸하게 만드는 종류의 카리스마가 있다. 처음 함께한 정진수 역의 유아인, 민혜진 변호사 역의 김현주 배우를 어떤 고려 끝에 캐스팅했는지 궁금하다.
=원작 만화를 연재할 때부터 정진수 역에는 유아인 배우를 생각했다. 그래서 안 한다고 하면 대안이 없는데 어떡해야 하나 고민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만났는데 아주, 아주 정진수 같았다. 특정 과거 출연작에서 뭔가를 봤다기보다 세상에 공개된 부분만 놓고 봤을 때 자신의 논리와 (생각의) 구조가 무척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정진수 역시 고요하지만 그 안에 논리 구조가 강한 인물이다.
-논리를 일단 세우고 나면 본인 인생을 그것의 실현에 바칠 의지가 있는 사람?
=연기로 따지면 보이는 큰 연기가 필요하지 않고 잔잔한데 그 안에 비틀린 강한 구조가 있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었다. 작품 이야기를 할 때도 정진수라는 인물에 대해 배우와 의논하기보다 오히려 내가 정진수에 대해 생각하는 이미지, 르포 사진- 일본의 히키코모리라든가을 공유했다. 현장에서 유아인 배우가 내가 제시했던 이미지를 충실히 표현해서 놀랐다.
-김현주 배우는 최근에도 <언더커버>라는 드라마에서 인권변호사 역을 했다.
=민혜진은 정진수의 뒤틀림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어야 하고 도중에 한번 크게 변모하기도 하므로 두 면모가 있어야 했다. 김현주 배우는 데뷔한 지 오래됐지만 보지 못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역시 만나뵌 자리에선 작품 이야기보다 짜파게티 이야기만 오래 한 기억이 난다. (웃음) 이번엔 거의, 아니 100% 원하던 배우들과 일하게 되었고 제작투자쪽에서도 이견이 없어서 굉장히 운이 좋았다. 그런데 모아놓고 보니 좀 기묘한 조합인 거다. 각자 영역에서 너무 잘하는데 그동안 접점이 없었던 배우들이랄까. 서로에 대한 리스펙트가 있었다.
-항상 연상호 감독의 캐스팅을 보면 다른 스타일의 연기자들이 혼재해서 감독의 배우 취향을 짚어내기 어려웠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 같다. 김현주 배우는 넷플릭스에서 보게 될 차기작 <정의>에서도 타이틀 롤을 맡았다. <지옥>을 함께한 경험을 근거로 내린 결정인가.
=그것이 컸다. 첫 촬영 때부터 연기할 때 에너지가 엄청 셌다. 촬영장에서 단역배우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슛 들어가면 집중력이 대단했다. 하드한 액션에서 부상을 우려했는데 몇달간 트레이닝을 받고 해냈다. 현장에서 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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