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신작 넷플릭스 6부작 '지옥' 공개한 연상호 감독>에서 이어집니다.
3부까지는 묵직하게, 4부부터는 뜨겁게
(이 단락에 <지옥>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정진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는 신의 징벌에 합리적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그것이 세상에 일으킬 혼란을 막기 위해 자기 인생을 쏟은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순교자라면 순교자인데,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터무니없이 단순하고 미숙하다는 것이 죄가 아닐까 싶었다.
=매우 합리적인 정의를 찾는 사람인 동시에 평온한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 같은 감정이입을 지닌 인물인데 그 모두를 유아인 배우가 잘 표현해서 놀라웠다. 후반에 A4용지 한장이 넘는 긴 대사가 있는데 딱 한 테이크 만에 해냈다. 원래는 한번에 끝까지 갈 계획이 아니었는데 모니터를 보는 동안 이거 발동 걸렸다는 느낌이 왔다. 대사 뒷부분의 촬영 준비가 안돼 있었는데도 스탭들을 급히 움직여 한번에 끝까지 찍었다.
-콘티를 바꾼 셈이다. 해당 신은 정진수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장광설을 풀어놓는 장면이다. 도중에 어둠 속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신이라 조명팀에서도 당황했을 것 같다.
=실은 상대방 배우가 손전등을 들고 있는 장면이라 나중에 조명 담당으로 실수할까봐 긴장했다고 자기 몫을 강조했다. (웃음) 빛의 떨림에 상대방의 감정이 반영되기도 한다.
-<지옥>에는 시연의 미스터리를 풀려는 인물이 셋 등장한다. 진경훈(양익준)은 형사, 민혜진은 변호사, 4부 이후에는 방송 PD(박정민)가 등장한다. 직업이 다른 이 셋이 각기 사태에 어떻게 접근한다고 설정했나.
=경찰, 법, 언론은 모두 인간 세상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제도다. 최규석 작가와 내겐 인간의 합리성이 순식간에 극히 원시적인 단계로 돌아가는 과정을 한번 보여주자는 의도가 있었다. 합리적인 인간 세상을 지탱하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참담한 감정이 전개에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3부의 마지막에 볼 수 있는 변호사와 형사 캐릭터의 정신적, 육체적 붕괴가 그것을 대변한다고 봐도 되겠다. 형식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연상호 감독은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병행하기 때문에 어떤 형식으로 찍느냐의 결정 단계가 하나 더 있다. 이를테면 비슷하게 종교적 소재를 다뤘지만 초자연적 현상이 없는 <사이비>를 실사로 찍고 <지옥>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것이 논리적일 것도 같은데 사실은 반대다. 한 이야기에 어떤 형식이 적합한지 정할 때 작가로서 어떤 자문을 하나.
=실은 이제 형식에 대해선 많이 고민하지 않는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은 표현방식과 프로덕션 과정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창작자로서는 그보다 오히려 산업적 차이를 더 많이 느낀다. 예컨대 어느 정도의 예산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가 더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건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입장이다. 최규석 작가와 <지옥>을 연재할 때 제일 좋았던 점은 만화로 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만화는 예산에 얽힌 여러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둘이서 열심히 하면 만들 수 있으니까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시나리오를 쓴 것을 최규석 작가가 (만화로) 연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영상물은 결국 넷플릭스 시리즈가 됐지만 영화가 될 수도, 소설 형태로도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웹툰이 한국에서 특히 시리즈물과 영화로 각색되고 있다. 보통은 감독과 웹툰 작가가 다른 인물인데 본인의 웹툰을 직접 각색하고 연출하는 경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만화 작업에서도 최규석 작가의 영역은 신경을 안 쓴다. 어떤 장면은 최규석 작가가 바꾸기도 해서 내 상상과 크게 다를 때도 있었다. 훨씬 더 좋았다. 이것을 영상으로 연출하니 내 아이디어와 최 작가의 연출에서 가장 좋은 것을 모아 최선의 종합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 배우가 들어가면 또 달라진다. 특히 박정민 배우의 캐릭터가 만화의 인물과 달라졌다. 배우가 “이거 저 마음대로 해도 되죠?” 물어서 흔쾌히 동의했다. 박정민 배우는 영화적 감각이 탁월한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나보다 그의 캐릭터 연출을 신뢰한 것뿐이다. 양익준 배우도 그렇고, 스스로 창작자이기도 한 배우들이 많다 보니 그들이 <지옥>이라는 틀을 갖고 각자 표현하고 싶은 바를 감독으로서 지지하고 싶었다.
-시각효과(VFX)로 만들어지는 지옥의 사자 디자인이 아무래도 포인트다. 웹툰을 보고 예전에 봤던 지용호 작가의 폐타이어로 만든 돌연변이 동물 조각이 연상되기도 했다. 웹툰과 넷플릭스 시리즈 디자인의 큰 차이가 있다면 처음 죽음을 고지하는 천사의 모습이 시리즈에서는 지옥 사자와 유사해졌다는 점인데.
=지옥 사자와 차이는 있다. ‘천사가 그냥 거대한 얼굴이면 어떨까’ 얘기했었고 만화에서는 여성형에 가까운 얼굴로 그려졌는데 영상에서는 불필요한 의미 부여가 없길 바라서 변화를 주었다. 죽음을 고지받은 자들에게 몰려가 린치를 가하는 ‘화살촉’이라는 집단을 묘사할 때도 만화에서는 인디언 추장 머리 장식을 쓰고 있는데, 단순한 편의적 설정이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겠다 싶어서 바꿨다.
-각색에서 일어난 다른 변화는 진경훈 형사의 아들이 딸(이레)로 바뀐 것이다.
=양익준 배우가 캐스팅된 후 비혼이라 아버지로서 감정을 연기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나도 아이가 딸이라 쉽게 아들과의 관계에 들어가기 힘들더라. 최규석 작가는 아들이 있다. (웃음) 물론 내가 원작 대본에 아들로 썼지만 이레 배우가 이 역을 연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컸다.
-신이 지목한 사람의 신상을 캐고 폭행하는 화살촉이라는 집단의 활동은 모종의 흥에 겨운 것처럼 묘사됐다. 어떤 정서일까.
=정진수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제시한 셈인데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 이데올로기를 고리로 삼아 연대하는 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라 공통의 목표로 움직이는 ‘우리’를 가졌기에 굉장히 즐거울 수 있다.
-<지옥>이 3부까지 재앙의 상승 국면이라면 이후로는 환상이 뒤집히는 하강 국면이라고 보면 될까.
=4부에서 완전히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3부까지가 묵직하다면 4부 이후는 뜨거울 것이다. 원래 원작을 쓸 때 4, 5, 6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먼저 쓰고 만화 작업에 들어가려 했는데 최규석 작가가 앞이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아예 뒤집어엎어 1, 2, 3부 대본을 썼는데 쓰고 나니 최 작가가 앞서 쓴 이야기도 붙이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정말 의견을 잘 수용하는 편인가보다. (웃음) <지옥>에는 신이 인간을 단죄하는 폭력이 있고 인간이 인간을 폭행하는 대목이 있다. 영상으로 옮겨오면서 아무래도 길어지기도 했다. 두 가지 폭력을 어떻게 찍을지 가이드라인이 있었다면.
=<염력>의 변봉선 촬영감독(<더 테러 라이브> <승리호>)이 <지옥>도 함께했는데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찍어야 한다는 집요한 소신이 있었다. 그래서 화살촉의 라이브 방송은 영화 카메라로 찍고 후반작업하는 대신, 아예 실제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시연을 중계하러 나온 방송 카메라 시점의 장면은 철저히 방송 카메라로, 뉴스나 화상통화 장면도 촬영 기기를 바꿔서 찍었다.
-지금까지 작품을 보면 여럿이 한 사람을 몰매질하는 이미지를 자주 본다. 이런 상황을 본인이 가장 공포스럽게 여겨서일까.
=사회생활에서 많이 느끼는 공포 중 하나다. 다수의 입장에 속하면 마음이 편한데 그에 반하는 입장이 된다는 건 무척 겁나는 일이다.
독점하지 않는 유니버스
-직접 연출하지 않고 각본만 쓴 작품의 촬영 현장도 방문하나. 티빙 시리즈 <괴이>가 최근에 촬영을 시작했는데.
=거의 전혀 안 간다. 작품이 만들어져 공개될 쯤에야 본다. 내가 썼지만 감독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그냥 기다리는 입장이다. 그래서 신선한 면도 있다.
-<괴이>의 가장 놀라운 캐스팅은 장건재 감독(<한여름의 판타지아> <회오리바람>)이다.
=장건재 감독을 알린 영화와는 성향이 다르지만, 문화학교 서울 시절이나 과거에 B무비 등을 좋아했던 영화 마니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제안했는데 다행히 거절당하지 않았다.
-<서울역>부터 <반도>까지 이어진 좀비 세계관은 더 확장될까. <방법>과 <방법: 재차의> 그리고 각본을 쓴 <괴이>가 연결된 또 하나의 우주도 있다. 이런 식의 유니버스 구축은 마블 이후 트렌드이기도 한데 산업적 유행 이전에 감독 본인이 스토리텔러로서 한편의 작품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거나 연작 구상에 끌리는 면이 있는지.
=이제 유니버스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그럴듯해 보이긴 한데 내 경우는 서브 컬처를 엄청 좋아한다. 과거 내가 사랑한 서브 컬처의 맥락 안에 내 영화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B무비라 하면 조금만 잘되어도 무조건 10탄까지 나왔고 내가 좋아한 강시 영화의 경우도 편수가 어마어마하다. <나이트메어> 시리즈 같은 호러물도 마찬가지다. 퀄리티를 떠나서 계속 재생된다는 것이 서브 컬처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연상호 월드는 유니버스라는 개념이 나오기 이전의 속편 문화가 뿌리라고 보면 될까.
=<지옥>의 장르도 그렇고 좀비물도 기원은 거기다. 내가 시작한 시리즈가 저예산으로 마구 재생산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물론 지금까지 내 작품의 규모는 그런 영역에 속하지 않지만 원래 나의 꿈은 계속 파생돼 서브 컬처를 이루는 이야기였다. 가령 <부산행> 유니버스에 나 아닌 이 세계관을 갖고 노는 창작자들이 들어와 팬 메이드 형식으로 멋대로 만든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다른 감독들이 연상호 월드에 들어와 작품을 만드는 것을 환대한다는 얘기인데 현실적으로는 저작권에 대해 얼마나 유연하게 협상할 수 있느냐가 해결 과제겠다.
=그런데 저작권으로 버는 돈이 그렇게 많지 않고 새로운 창작자가 어떤 식으로 만들고자 하는지 규모에 따라 유동적일 거다. 예컨대 할리우드에서 몇 천억원 규모로 찍겠다면 많이 받아야겠지만 작은 프로젝트라면 그냥 작은 비용을 받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