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강릉국제영화제]
GIFF #5호 [인터뷰] '준호' 부석훈 감독
2021-10-26
글 : 김현수
사진 : 백종헌
방관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부석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 <준호>는 연극계의 추악한 잘못을 세상에 들춰낸 미투 파문의 여파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올해 강릉국제영화 국제경쟁부문에 진출한 유일한 한국영화로, 부석훈 감독이 뉴스를 접한 뒤에 연극계에 몸 담고 있었던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사실 등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감독 자신의 유학 시절 경험과 함께 출연한 배우들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통렬한 반성극이다. 영화제를 찾은 그를 직접 만나 영화 제작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물었다.

- 쉽지 않은 기획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를 기획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 2018년 즈음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때, 졸업하면 독립 장편영화를 찍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무엇을 찍어야 할지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 해 초에 연극계 미투 운동 관련 뉴스를 접하게 됐다. 거기 얽혀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 통화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 일종의 편지를 써서 위로를 전달해줄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리고 그 편지의 메시지에는 ‘너희들 너무 억울하다 여기지 말아라, 공동 책임이 있는 거다.’라는 이야기를 담아볼까, 생각했다. 마치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영화화를 시작했다.

- <준호>의 주인공 ‘준호’의 이야기는 창작한 것인가. 실제 경험이 기반이 된 이야기인가.

= <준호>의 주인공 준호를 연기한 조원준 배우의 삶에서 가장 많은 모티프를 얻었다. 그 친구에게 뭘 쓰겠다는 이야기도 안 하고 무작정 초고를 완성한 뒤 건넸다. “내가 이걸 꼭 찍겠다는 건 아닌데 만약 찍게 되면 이렇게 너의 삶이 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주변 상황에 얽매이지 말고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내 뜻을 전했다. 본격적으로 영화는 그가 감정을 추스른 몇 개월 후부터 시작됐다. 초고는 원준의 이야기가 많이 반영이 됐고, 또한 내가 경험했던 도제 시스템, 남성 지배적인 사회의 풍경을 더했고 준호가 미국에 건너와 지내게 되는 이야기는 20대 초반에 미국에서 내가 이방인으로써 느꼈던 많은 경험을 극에 담으려고 했다.

- 배우들의 캐스팅도 어려웠을 것 같다. 어떤 배우들의 경우에는 출연 자체가 이 사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일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 영화의 오디션 과정이 자연스럽게 일종의 취재 과정이 되어버렸다. 정말로 다양한 극단에 계신 분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 작품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오디션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경험을 공유해주셨다. “이 작품을 응원은 하지만 나는 참여는 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밝히신 분들도 많았다. 결과적으로는 한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수많은 관련자들의 이야기가 종합적으로 녹아들어간 시나리오가 됐다.

- 영화의 첫 장면은 후반부 미국 생활 중에 준호가 폭주하듯 거리 공연을 할 때의 이미지, 그 때의 표정으로 시작해서 과거 준호가 연극판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됐을 때의 술자리 풍경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첫 이미지를 무엇으로 시작할지를 결정할 때 중요하게 고민한 것은 무엇인가.

= 촬영감독과 상의했던 영화 전체의 구조적 방향은 영화 전체가 준호의 플래시백으로 이뤄지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관객에게 현재는 영화가 끝난 이후 암전되는 첫 프레임이 현재인 것이다. 그 순간에 준호가 과거를 돌아보도록 꾸며보고 싶었다. 접근하고 싶지 않았던 스스로의 기억 속을 헤매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비주얼 면에서도 현실적이지 않은 조명과 미장센을 꾸미려고 했다.

- 준호가 미국으로 먼저 떠나 자리잡고 살고 있는 선배 창녕을 만나러 갔을 때, 준호가 묵게 되는 숙소에서의 일상 풍경이 특이한 앵글로 꾸며져 있다. 예를 들면 준호와 창년 두 사람이 방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은 마치 둘이 무대에 올라가 있고 관객이 공연을 보는 것처럼 묘사된다.

= 준호가 머무는 샌프란시스코의 집 장면 대부분의 샷 디자인이 무대라는 공간 위에 준호가 올라가 있는 것처럼, 즉 모든 공간이 무대라는 관점에서 샷을 디자인했다. 준호 스스로 자신이 정착하려고 하는 그 곳 자체가 연극 무대가 되는 거다. 배우의 연기는 담백하되 시각적으로는 무대 위에 올라서 재현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 준호가 처음 방에서 짐을 풀며 창문을 내다보면 사람들의 환호성이 환청처럼 들리는데 마치 백 스테이지에서 커튼콜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

- 준호가 머물게 되는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이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데 일반적인 관광 스팟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잘 몰랐던 장소들이 등장하는 것 같다.

= 준호의 상황 변화, 낯선 곳을 방문한 관광객의 입장에서 거주자의 위치로 서서히 변하게 되는 상황을 영화 속 풍경을 통해서도 보여주려고 했다. 그 중에서도 관광명소라고 할 만한 장소들이 등장한다. 가령 샌프란시스코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있는 트윈픽스의 경우에도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장소가 아니라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에 준호를 배치하는 식으로 공간을 결정했다.

- 영화는 준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는 현진의 시점으로 넘어간다.

= 일종의 주인공이 바뀌는 이야기의 구조에 대해서는 각본을 쓰던 때부터 결정했다. 애초 이 영화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감히 다가가기 힘든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진 역을 맡은 전한나 배우가 합류하게 되면서 감독으로서 많은 용기를 얻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정도까지는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첫 장편 영화를 완성했다. 이후의 계획은 무엇인가.

= 적은 규모라도 괜찮으니 <준호>의 개봉을 추진하려고 배급사들과 접촉 중이다. 내년에는 관객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영화 일을 하고 싶다. 팬데믹 상황이 길어지면서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날도 길어졌다. 그동안 화상으로만 만나서 이야기하던 사람들과 직접 대면해 나의 거취와 작업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할리우드에서 도전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