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예술에는 쓸모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를 밝은 눈으로 짚는 일이 비평의 쓸모 중 하나쯤은 될 것이다. 현실에 단단히 발붙이고 작품의 외연을 넓히려는 비평의 노력이 지금으로선 절실하다고 느낀다. ‘프런트 라인’에 합류한 취지다.
21세기 웨스턴 장르의 정의는 다시 내려질까. 다음 영화들을 살펴보자. 정확히 말하자면 다음 영화들 사이의 우연과 필연을 연결지어 살펴보자. <퍼스트 카우>(2019),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 이하 <레버넌트>), <로스트 인 더스트>(2016), <미나리>(2020), <노매드랜드>(2020), <뉴스 오브 더 월드>(2020)…. 2010년대 후반 이후 미국영화에 나타난 어떤 시류는, 이들 작품을 중심으로 하나의 하위 범주를 만들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퍼스트 카우>는 <레버넌트>와 1820년대라는 시대 배경뿐 아니라 서부 개척 시대 유랑노동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공유한다. 독립 이후 ‘미국 땅’이 형성되던 시기, <퍼스트 카우>의 킹 루(오리온 리)는 캘리포니아로, <레버넌트>의 피츠제럴드(톰 하디)는 텍사스로 가고 싶어 한다. 한몫 챙기는 대로 따뜻한 남쪽에 널찍한 땅을 마련해 농장주가 되는 것이 그들의 장래 희망이다. 200년 뒤 그들의 후예들은 은행으로부터 텍사스 농장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거나(<로스트 인 더스트>), 캘리포니아 정착에 실패해 텍사스 옆 아칸소 땅으로 흘러들어간다(<미나리>). 서부 개척 시대로부터 100년쯤 뒤 은행에 농장을 빼앗긴 인물들이 내륙의 오클라호마(텍사스 바로 위)를 떠나 서부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분노의 포도>(1940)의 여정 이후, 다시 수십년 뒤 <미나리>의 인물들은 데칼코마니처럼 캘리포니아를 떠나 서에서 동으로 역주행한다. <레버넌트>의 19세기 유랑노동자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노매드랜드>의 21세기 유랑노동자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은 종종 거역할 수 없는 압도적 자연 속에서 미미한 점처럼 묘사된다. 200년 동안 열심히 달려왔지만 되돌아보니 제자리라는 얘기일까.
서부 개척과 역주행의 역사
<로스트 인 더스트>에는 그 답을 압축하는 대사가 나온다.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보안관이 말한다. “여기는 우리 조상들의 땅이었어요. 지금 보이는 모든 것, 어제 본 모든 것들이 저들의 증조부모들이 빼앗아간 거죠. 그런데 이제는 저들이 털리고 있어요. 이번엔 군대가 아니라 저 개자식들(은행) 손에 말이죠.” 대자연 앞에 왜소하기 짝이 없는 <레버넌트>와 <노매드랜드>의 인물은, 이미지는 비슷하지만 표상이 다르다. 200년 전의 이미지로 돌아가게 만드는 역주행 연료는 말할 것 없이 고장난 미국 자본주의다. <로스트 인 더스트>의 출발점이 돈 놓고 돈 먹기를 일삼는 금융자본의 모순이었다면, 불과 4년 뒤인 <노매드랜드>에서 자본주의의 오작동은 아예 시대의 기본값이 돼버렸다. <레버넌트>와 <뉴스 오브 더 월드>의 어린 세대는 부와 모의 인종이 다르거나 낳은 이와 기른 이의 인종이 다른 ‘복합 인종’이다. 홀로코스트로 숨진 유대인 숫자보다 몇 곱절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세운 나라가 다름 아닌 미국임을, 이들 영화가 분명히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카메라는 공통적으로 땅과 사람의 관계를 높은 밀도로 화면에 새긴다. 이제 질문들이 손에 잡힐 것도 같다. 미국 땅의 주인 행세를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래서 미국인이란 누구인가, 개척정신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알던 프런티어 정신은 지금도 그 가치를 유지하는가…. 20세기엔 흔치 않았던 질문이다. 21세기의 서부영화들은 지금, 미국인들이 앞만 보고 달려온 길을 고개 숙여 되짚어가는 중이다.
위 질문들의 답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영화 밖으로 나와 사태를 살필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미국은 누가 뭐래도 백인이 주도하는 나라다. 그곳의 백인 비중은 얼마나 될까. 지난 8월 미국 통계청이 발표한 전국 인구 센서스 결과를 보자. 2020년 말 현재 미국 인구 3억3144만명 가운데 백인은 1억9170만명. 전체의 57.8%다. 백인 비중이 60% 아래로 떨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10년엔 63.7%였다. 1965년 새 이민법이 발효되기 전엔 84%였다. 지난 10년 동안에만 510만명이 줄었다. 백인 인구가 순감한 것도 미국 인구조사 역사상 최초다. 학계에선 2040년대 중반이면 미국 내 백인 비중이 과반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에 이견이 없다. 반면 히스패닉 비중은 전체의 18.7%, 아시안은 6.1%로 꾸준한 증가세다. 아프리카계도 전체의 12%대로 현상 유지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눈에 띄는 대목은 부모의 인종이 서로 다른 ‘복합 인종’ 인구가 3380만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전체의 10%가 넘는 숫자다. 미국의 인종 다양성은 이렇게 확장 중이다. 한 사회의 주류 세력이 대체되면 그곳의 문화나 지배적 인식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윌리엄 프레이 박사는 이를 근거로 “미국이 극적으로 바뀌는 중”이라고 단언한다. 최근 할리우드영화들에서 보이는 인종 다양성에 대해 말할 때도 이같은 실체적 사실을 함께 이야기해야 공허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사회의 ‘정치적 올바름’과 관련한 흐름 또한 그들이 만든 사회 배경과 시장의 수요를 함께 봐야 한다.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히스패닉 인구 비중이 39.4%, 백인이 34.7%다. 이곳에서 백인은 이미 ‘소수 인종’이다.
두개의 화두: 정체성과 자립성
‘지금 왜 서부극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작품의 내부 담론만 이야기한다면 절반의 답에 그치는 것일 수 있다. 영화 밖 이야기를 좀더 이어가보자. 심증을 굳히기 위해 전문가를 찾아 묻기로 했다. 미국 정치심리에 정통한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 내 백인들의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형성된 ‘지위 위협’은 현재 미국정치·사회의 핵심 화두다. 주류 백인들 입장에서는 자녀 세대의 미국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크다. 민주당은 이 현상이 반가울 테고, 공화당은 달갑지 않을 텐데, 그 안에서 의견이 나뉜다. 트럼프 전 대통령처럼 적극적으로 이민자를 억제해야 한다는 부류가 있는 반면 부시 2세 전 대통령처럼 소수 인종을 백인 집단으로 포섭하자고 주장하는 세력도 상당하다.” 포용이든 포섭이든 현재 미국 사회에서 소수 인종에 대한 ‘수요’는 생각보다 폭넓다는 뜻이다. 하 교수는 “이전까지 이방인 취급을 받던 이탈리안 이민자들이 2차대전 이후 자연스럽게 미국 내 백인 집단에 포섭된 것처럼, 현재 가톨릭을 믿는 히스패닉부터 포섭해야 ‘우리가 산다’는 움직임이 (보수 백인 사회에서) 강하게 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쯤에서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역주행 목적지’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텍사스, 오클라호마, 아칸소. 모두 공화당의 견고한 아성이 버티고 있는 곳들이다. <힐빌리의 노래>(2020)처럼, ‘우리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나’에 대한 성찰을 부르는 지역이기도 하다. 고장난 경제 속에 백인들의 지위 위협 감정을 적극 공략함으로써, 시민들이 자기 신뢰가 아닌 유력 정치인에 마음을 의탁하는 형세를 만들어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 트럼프다. 최근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2024년 대선 후보에 적합한 인물로 트럼프를 압도적 1위로 꼽았다는 소식이다. 하 교수는 ‘미국인 정체성’과 관련해 영화 이야기도 덧붙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그랜 토리노>를 보면 늙은 백인 주인공이 중국 소수민족 젊은이와 어울리면서 ‘셀프 릴라이언스’(self reliance·자기 의지, 자기 신뢰를 바탕으로 자립해 살아가는 힘)를 강조하는 모습이 보인다. 영화는 젊은 세대가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거나 타인을 등치고 살면 안된다거나 하는 등 개척 시대의 가치관을 말하고 있다. 주인공이 나름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온 데 대한 자긍심과 함께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가 이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에 대한) 자성, 자숙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서부 개척 시대의 보수적 가치관을 이어온 영화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고, 이 대목에서 나는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가 미래 세대에 이 세계의 문제에 맞서는 독립자 역할을 부여한 설정이 떠올랐다. 이는 오늘의 주제인 서부영화의 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으며 최근 화제작 <듄>의 모티브와도 연관이 있다). 현재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두개의 화두, 즉 ‘미국인 정체성’과 ‘셀프 릴라이언스’는 자연스레 현재 미국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서부 개척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21세기 서부영화들은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우회하는 길에 발견한 것들
이같은 흐름 속에서 <퍼스트 카우>가 택하는 역주행 우회로를 따라가다 보면 그 새로운 풍경에 눈이 번쩍 뜨인다. 피고위츠(존 마가로)와 킹 루는 백인도 아니고 원주민도 아닌 유대인과 중국인이다. 이들 역시 당시 서부의 일원이었거니와, 틈만 나면 치고받고 총질하는 남성성만으로 개척의 역사가 쓰인 것이 아니었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퍼스트 카우>의 인물들은 <레버넌트>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대자연과의 투쟁이 아니다. 그저 버섯을 따고 아기를 달래며 빵을 굽는다. 회색곰으로부터 습격받는 대신 몸이 뒤집혀 움직이지 못하는 조그만 도롱뇽을 돕는다. 1.37:1의 좁은 화면비는 그렇게 내향형 인간의 시야와 깊이를 담는다. 약 5분간 이어지는 이 영화의 프롤로그는, 막대한 재화를 실어나르는 화물선의 모습으로 시작해 두 사람의 유골이 나란히 묻혀 있는 장면으로 끝난다. 백인들이 그들의 존재를 알든 모르든 소수 인종의 피와 땀과 죽음 위에 오늘날의 미국이 서 있음을 강도 높게 역설하는 대목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국 주류 엘리트들의 지배 아래 노동력을 바친 이탈리아나 아일랜드계가 처음부터 ‘미국 백인’으로 받아들여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히스패닉이나 아프리칸에 대한 배타적 차별화를 통해 백인 지위를 획득하려 했다. 애초에 인종이라는 개념이 통용된 것 또한, 기존 민족 단위의 질서에서 정치·사회적 이합집산의 필요를 느낀 제국의 요구에 의해 ‘발명’된 측면이 크다(예컨대 황인종이라는 구분은 한국인과 태국인 사이의 크나큰 차이를 무화해 싸잡는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없다. 앞으로 미국 내 소수 인종들이 사회 변동에 따라 점유할 지위가 어떤 층위에 자리 잡을지 모를 일이다. 백인-원주민 이분법 속에 그 경계인 정도에 눈길을 주던 미국 서부영화의 시야는, <퍼스트 카우>의 좁은 화면 안에서 소수 인종과 여성성을 향해 한껏 폭넓어지는 것이다. 피고위츠의 별명은 쿠키(cookie)다. 그가 쿠키를 굽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성이라곤 없는 무리에서 요리를 할 줄 아는 남성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킹 루의 거처에 초대받은 피고위츠가 처음 하는 일은, 빗자루로 바닥을 쓴 다음 꽃을 꺾어와 실내 분위기를 밝히는 것이었다. 킹 루는 쿨리다. 쿨리(coolie)는 ‘苦力’(고력)을 중국어 발음대로 읽은 것으로, 19세기 초부터 아프리카 출신 노예만으로는 노동력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열강들이 중국, 인도 출신들과 일종의 노비 계약을 맺고 착취한 인력이다. 광둥성 출신들이 대거 유입됐고, 북미 횡단 철도와 같은 미국 산업의 동맥들이 그들의 ‘고력’ 없이는 지어지기 어려웠을 만큼 미국 건설에 있어 동양인 노동력의 기여는 상당했다. 골드 러시를 좇아 북미 대륙에 건너온 아시안들은 아프리카 출신 못지않게 혹독한 조건 속에서 미국 땅을 일궜다. 이를 포함한 유랑노동자들은 <레버넌트>에서처럼 주로 군대나 무역회사에 고용됐는데, <퍼스트 카우>에서도 가혹한 환경을 견디다 못한 것으로 추정되는 노동자들의 저항이 있었고 군대는 그 주동자를 “태형 20대”의 형벌에 처했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들이 더 무거운 벌을 내리지 않는 것은 오로지 노동력이 아까워서다. 군 출신의 지역 권력자 팩터 대장(토비 존스)과 군 지휘관 루비 대위(스콧 셰퍼드)는 착취 무역을 통한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상한 것과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
미국 자본주의 태동기에 관한 묘사로서 <퍼스트 카우>의 시각 또한 이같은 세계관의 연장이다. 먹을 게 없어 구두를 끓여 먹던 사람이라도 금맥만 발견하면 일약 부호가 될 수 있던, 말 그대로 ‘황금광 시대’에 사유재산이란 무엇이고 교환가치란 무엇인지 근본에서 다시 묻는 것이다. <미나리>의 제이콥(스티븐 연)은 수돗물을 훔치고 <퍼스트 카우>의 피고위츠는 팩터 대장의 소에서 우유를 훔친다. 소는 묶인 채로 거의 움직임이 없어서 이들의 범행은 마치 수도관에서 수돗물을 빼내거나 금맥에서 금을 캐는 것과 유사한 이미지가 된다. 젖소는 애초에 북미 서부에서 키우지 않던 동물이어서 선술집에 모인 노동자들은 “오리건주 최초의 소”라며 “애초에 없던 것”이라고 말한다. 동료가 말을 받는다. “애초에 없던 건 백인도 마찬가지지.” 미국 북서부에 없던 ‘퍼스트 피플’로서 유대인과 중국인은 “우리 방식으로 역사를 맞을 수 있다”며 아메리칸드림을 꿈꾸지만, 결국 사유재산 개념과 자력구제를 위한 총기 사용 전통이 자리 잡던 시절의 희생자가 된다. 이상한 것들과 이상한데도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들끼리의 충돌이 그칠 줄 모르는 시대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온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적이고도 치명적인 결함은 2008년 이후 모두가 아는 것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별다른 도리도 없어 각자 살아남느라 발버둥이다. 노예제든 여성 참정권 배제든, 애초부터 그랬던 건 없다. 2021년 현재 미국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까운 미래에 매우 이상했던 것으로 여겨질 일들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바꾸지 못하는 일들도 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을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는 영화들의 감각은, 그래서 지금의 미국에 더 절실하며 당분간 이 경향은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