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톰 히들스턴)는 매번 죽었다. 정확히는 죽은 척해왔다. 이 사랑스러운 거짓말쟁이는 매번 죽음을 위장하여 퇴장한 뒤 커튼 뒤에서 음모를 꾸미다 들키면 천연덕스럽게 돌아왔다. 하지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에게 목을 졸려 살해됐을 때 사람들은 충격 속에서도 더이상 장난의 신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잔혹한 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타노스는 선언한다. “이번엔 못 살아날 거다.” 그렇게 우리는 가슴 아픈 이별과 함께 로키를 떠나보냈다. 그런 줄 알았더니 장난의 신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또 한번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앞에 돌아왔다. 바로 시간 여행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무슨 억지냐고 따지고 싶다가도 바로 그 ‘로키’라면 납득이 간다. 총괄 제작자 스티븐 브루사드는 “타노스로 인한 죽음과 희생을 무효화하고 싶지 않았다. ‘농담이야, 없던 일로 해’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찾아낸 우회로가 바로 ‘TVA’(Time Variance Authority, 시간 변동 관리국)다.
TVA는 현재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와 동시대에 공존할 수 있는, 타임라인 밖의 존재들이다. 오래전 멀티버스간 전쟁이 벌어져 우주의 모든 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타임키퍼들이 나타나 시간의 흐름을 하나로 묶어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들 TVA는 멀티버스 전쟁을 막기 위해 새로운 타임라인을 만들려는 시도를 차단하고 시간을 어지럽히는 존재를 체포한다. 드라마 <로키>는 <어벤져스:엔드게임>에서 2012년의 로키(<어벤져스> 1편 직후 쉴드에 체포되는 시점의 로키)가 테서랙트를 이용해 탈출하는 시점부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게 시간의 분기점을 만들어낸 로키는 TVA에 끌려가 재판을 받고, 이때 로키의 팬을 자처하는 모비우스(오언 윌슨)가 나타나 로키에게 TVA 요원으로 일할 것을 제안한다. 새로운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범죄자들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 그리고 그 범죄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또 다른 시간 축에 존재하는 변종 로키들이다.
<로키>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캐릭터의 개성을 100% 이끌어내는 드라마다. 제4의 벽을 수시로 넘나드는 데드풀처럼 사슬에서 풀려난 로키는 장난의 신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MCU에서 가장 사랑받은 빌런이자 선악을 구분하기 곤란한 복잡한 매력을 지닌 로키는 다른 시간 축의 자기 자신과 대결하면서 전에 없던 깊이를 선보인다. 케이트 헤론 감독은 “<로키>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자 도덕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자기 발견의 여정”이라고 말한다. 로키는 확실히 죽었다. 예정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애쓰는 로키의 여정은 변덕스러웠던 캐릭터를 한층 입체적으로 만든다. 물론 드라마 <로키>는 캐릭터의 본질도 잊지 않았다. 의미보다 즐거움, 진지하게 허를 찌르는 장난의 신. 마블이 이미 죽어버린 캐릭터를 꼭 되살려야 했을 만큼 로키는 멋지고 예상치 못한 상상력으로 우리를 만족시킨다. 거기에 더해 향후 전개될 멀티버스의 밑그림을 그리는 결정적인 역할도 수행 중이다. “아스가르드의 왕자, 오딘의 아들, 요툰헤임의 적법한 왕, 장난의 신”은 이제 MCU의 세계를 잇는 마법의 열쇠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체크 포인트
톰 히들스턴의 로키는 10년 동안 영화에 등장한 시간이 2시간도 채 되지 않지만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그런데 로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6시간이나 생긴다면? 어쩌면 MCU의 진정한 매력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시리즈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