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2021-11-29
글 : 배동미
사진 : 백종헌
사회적 참사 관련 문화 콘텐츠 제작하는 재단 관계자 3인의 대담
박채웅(5.18기념재단 교육문화부 부장), 조정희(제주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 팀장), 박래군(4.16재단 상임이사)

11월23일, 5·18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사태의 장본인인 전두환씨가 사망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한 인간의 죽음은 비극적인 현대사를 소환시켰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속 응어리를 건드렸다. 오랫동안 상처받은 이들을 위무하고 역사의 아픔을 후대에 전하는 역할을 한 건, 역사책뿐만 아니라 영화와 연극, 문학작품들이었다. 겨울로 향하는 길목, 박래군 4·16재단 상임이사, 박채웅 5·18기념재단 교육문화부 부장, 조정희 제주4·3평화재단 기념사업팀 팀장이 근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문화 콘텐츠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씨네21>과 4·16재단이 기획한 대담에 참석한 전문가들 역시 정치의 영역 외에도 문화의 역할을 강조했다. 미래의 <택시운전사> <김군>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 <생일>을 기대하며 대담에서 오간 이야기를 정리해 전한다.

사회적 참사나 역사적 비극을 다룬 영화를 비롯한 문화 콘텐츠가 계속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관련 재단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대담 자리를 꾸렸다. 우선 각 재단은 그동안 문화 콘텐츠 사업을 어떻게 진행해왔나.

박채웅 영화 제작에는 간접적으로 참여해왔다. <화려한 휴가> 등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제작진이 5·18기념재단에 고증을 문의하면 협조하는 형태다. 재단이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문화 사업이라면 5·18문학상이 있고, 전시 및 공연 사업, 사진작가 지원, 창작 연극 지원이 있다.

조정희 2019년부터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의 기탁금을 받아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를 제작하려고 공모전을 열고 있다. 4·3을 겪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은 다큐멘터리 영화 <목소리들>이 내년에 제작에 돌입하고,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선정된 <내 이름은…>이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장편 극영화 제작에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내 이름은…>은 4·3 당시 ‘오라리 방화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2018년은 제주 4·3사건이 벌어진 지 70년 되는 해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문화예술 사업이 많지 않았는데, 이후부터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박래군 4·16재단은 설립된 지 3년 됐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많은 문화 사업을 해왔다. 공모전을 열고 극영화, 다큐멘터리 시나리오를 매년 선정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애프터 유>가 완성돼 내년에 상영될 것 같다.

아픔을 가슴으로 기억하려면

4·16 세월호 참사, 5·18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 회복을 돕는 재단들이 문화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박채웅 5·18 정신을 부드럽게 시민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재단은 15년간 5·18민주화운동을 인정해달라고 투쟁했다. 왜곡이 많았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진실을 전달하는 게 재단의 첫 과업이었다. 그 시기에는 판화와 탈춤, 굿 등의 민중미술이 주를 이뤘다. 지금은 2기에 해당하는 시점에 와 있다. 지금 시대의 눈으로 5·18민주화운동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삶 속에 녹여내야 할 때다. 과거를 기억으로만 남겨두면 그 기억은 화석화되고, ‘과거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에서 멈춘다. 5·18정신을 내 삶에 연결시키고 융화시키는 게 중요하다. 재단은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광주 금남로를 청소년들에게 내어주고 그들이 생각하는 5·18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펼쳐는 5·18 레드페스타도 열고 있다.

조정희 문화는 기억을 전승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다큐멘터리 <김군>이 없었더라면 ‘북한특수군 광수1호’로 지목된 김군에 대해 폭넓게 알 수 있었을까.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 당시 사건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크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가슴에 와닿지 않으면 기억은 확산되거나 전승되기 어렵다.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문화예술 운동가들이 큰 역할을 해왔다.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증언자 역할을 하고 진상규명 운동을 벌였다. 교과서에, 뉴스에 나오지 않았던 4·3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제주 지역 예술가들이 시나 미술 작품으로 표현해온 것이다.

영화에 좁혀 이야기하면, 재단 인사들이 영상 문화의 전문가가 아닌데 어떤 기준으로 시나리오를 선정하나.

박채웅 어떤 사업을 하든 외부 전문가위원회를 섭외해서 결과물을 시상한다. 다만, 어느 수준을 벗어나면 ‘이 작품이 5·18민주화운동과 무슨 관련이 있나’라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게 딜레마다.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경계가 과연 어딜까, 실무자들은 이 점에 대해 늘 긴장할 수밖에 없다.

조정희 비슷하다. 재단 인력이 문화예술까지 포괄할 수 없으니 심사는 외부 전문가들에게 맡긴다. 가급적 지역에 있는 예술인과 지역 밖 예술인을 섞어서 심사위원단을 꾸리려 한다. 다만 문화 콘텐츠에도 두 가지 갈래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창의적이고 변화를 시도하는 문화 콘텐츠, 다른 하나는 변하지 않는 당대 기억을 환기시키고 재인식시키는 작업이다.

박래군 2024년이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다. 벌써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이 옅어지고 있고, 지겹다는 소리가 나오는데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를 지금부터 준비하고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투자자가 되어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고민 중이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지슬>,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 4·16 세월호 참사를 다룬 <생일> 등 많은 작품이 있었다. 사회적 참사를 다룬 작품 중 좋아하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박래군 <지슬>을 재밌게 봤는데, 두번은 못 볼 것 같다. 동굴 신을 촬영한 제주 동광리에 있는 용암동굴 ‘큰넓궤’에 가서 앉아보니 <지슬>이 떠오르고 기분이 묘했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 중에서는 <김군>이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은 이름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고, 당시 큰 역할을 한 여성들과 처절하게 싸웠던 빈민들은 소홀히 다뤄져왔다. <김군>은 마지막까지 총을 들고 싸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질문하는 다큐멘터리다. 강상우 감독은 집요하게 광수1호로 지목된 사진 속 김군을 찾으면서 사실 그가 5·18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빈민이었다는 점을 밝혀낸다.

조정희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를 꼽고 싶다. 4·3평화재단이 시나리오 공모전을 시작한 계기가 된 작품이다.

문화가 답이다

흔히 역사를 기록하는 가장 명징한 방식은 사건 당시를 기록한 사진과 스트레이트 기사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다층적인 맥락이 이후에 발견되기도 한다. 문화 콘텐츠가 이를 수용하면서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같다. 사회적 참사와 역사를 다룬 문화 콘텐츠가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박채웅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순수한 기억에서 지향해야 할 가치로 넘어가야 한다. 과거 신군부 쿠데타와 같은 일이 다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문화 콘텐츠가 중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이런 시도들이 온전한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시민 교육에 자양분이 되길 바란다. 유럽의 시민교육은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잖나. 독일은 홀로코스트,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을 기반으로 시민교육을 펼친다. 근현대사 사건 중 5·18민주화운동이 시민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가치를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많아지길 바란다.

박래군 5·18민주화운동, 4·16 세월호 참사, 제주 4·3사건 모두 중요하다. 세월호 참사는 예외이지만, 젊은이들에게 이 사건들이 먼 과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학교교육 말고 시민 스스로가 사건에 대해 공부하고 사건에서 얻어야 할 교훈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문화가 답이다. 문화는 누구나 스스로 참여하고 스스로 느끼는 형태로 향유하는 것이다. 민주시민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표현할 때 탄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문화는 정말 중요하다.

조정희 개인적으로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공간에서 벌어진 아픔이 있고 그것을 겪은 시민들이 곁에 존재한다면, 그들의 아픔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시민으로서 제대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제주 4·3사건은 올해 73주년이 됐다. 여전히 생존자와 유가족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워낙 피해 규모가 크기 때문에 2000년대에 태어난 제주 사람이라도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4·3사건과 엮여 있을 정도다. 사건을 겪은 이가 여전히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면 마땅히 그들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통해 제주 4·3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각자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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